“캄차카에서 왔군요… 산에서 추락했나요?”
나는 잠깐의 침묵을 만끽한 후에 대답한다.
“아니요, 곰과 싸웠어요.”
평원을 뒤덮은 새하얀 눈, 살갗을 에는 차가운 바람. 시베리아 캄차카 반도. 이곳에서 에벤인을 연구하던 인류학자 나스타샤 마르탱은 혼자 화산 지대를 걷다가 곰의 습격을 받는다. 광대뼈와 턱, 얼굴 전체가 찢기고 오른쪽 다리까지 물리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그는 등반용 얼음도끼를 휘둘러 가까스로 곰을 쫓아내고, 함께 생활하는 에벤인에게 극적으로 발견되어 러시아 클리우치의 군사기지 병원으로 이송된다.
열악한 환경에서 인공 턱을 삽입하는 대수술을 받고 간신히 회복하여 마침내 가족들과 고국으로 돌아가지만, 그는 여전히 평온을 찾지 못한다. 시베리아 곰에게서 생존한 사람을 구경하러 모여드는 사람들, 자신을 연구 대상으로 대하는 의사와 의대생 들, 더는 함께 일상을 공유할 수 없는 친구들. 게다가 이전과는 너무도 달라진 삶에 신음하는 그에게 의료진은 러시아의 수술이 잘못되었다며 ‘프랑스식’으로 다시 수술받아야 한다고 진단한다. 또다시 고통의 시간을 지나며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 살아 숨 쉬는 곰의 존재를 느끼고 다시 캄차카 반도로 떠나겠다고 다짐한다. 수많은 생명체와 호흡하는 법을 아는 이들과 소통하기 위해. 피해자로 남는 대신, 인류학자로서 다시 서기 위해.
회복할 수 없는 상흔을 딛고 일어나 새로운 탄생으로 나아가는 숭고한 여정
문명과 비문명,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파훼하는 도발적 사유
사람보다 곰이 더 많다고 알려진 캄차카 반도. 이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곰의 흔적을 지닌 자를 경외하는 듯 두려워했다. 곰에게서 살아남은 나스타샤를 ‘반은 인간, 반은 곰’이라는 의미로 ‘미에드카’라고 호명하는 에벤인, ‘얼굴 훼손은 정체성의 상실’이라며 끊임없이 기분을 묻는 심리치료사, 자신의 몸을 매개로 끝없는 의료 냉전을 벌이는 동구권과 서구권의 의료진 등 그는 치명상을 회복하며 마주한 일련의 시간 속에서 혼돈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을 규정하는 어떠한 세간의 시선도 거부한다. 인간 세계와 곰의 세계 사이, 바로 그 중간 지대에서 거주하기. 그는 의미적 공백에 두려움을 느끼는 인간 중심 사고에서 벗어나 내면의 곰과 공존한다는 불확실한 상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건은 그저 지나간 비극이 아닌 새로운 삶의 막을 올리는 ‘탄생’으로 격상한다.
레비스트로스가 《슬픈 열대》에서 서구 문명의 우월성을 해체한 지점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야수를 믿다》는 선주민 사회를 어떠한 해석 없이 포착하고, 곰과의 조우라는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자연 속 인간 중심의 위계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길어 올린다. 본작은 이러한 도발적인 사유와 뛰어난 작품성을 인정받아 2020년 “경계를 뛰어넘고 한계를 지우는 파격적인 이야기”라는 평을 받으며 ‘리브르 뒤 레엘상’을, “곰과의 폭력적인 만남과 타자성에 대한 심오한 성찰을 펴냈다”는 평과 함께 ‘프랑수아 소메르 문학상’을 수상했다.
선주민과 함께 호흡한 인류학자의 역동적인 생존기
에세이의 문법을 깨뜨리는 독창적인 논픽션
저자 나스타샤 마르탱은 2009년 알래스카에서 2년여 간 그위친인과 생활했으며, 곰에게 물린 2015년엔 시베리아 캄차카 반도의 숲에서 에벤인과 동고동락했다. 애니미즘을 숭상하는 선주민의 영향 때문인지 그는 곰과 만나기 전부터 곰의 꿈을 자주 꿨다며, 어떤 의미에서 자신이 이미 그 사건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가 이토록 선주민의 사고방식까지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의 저명한 인류학자 필리프 데스콜라의 밑에서 수학하며 일찍이 선주민의 삶과 애니미즘을 깊이 연구한 결과다. 학자로서의 집요하고도 풍부한 성찰, 동등한 위치에서 선주민과 함께 생활한 모험가 정신. 한 사람을 파괴할 수도 있었을 충격적인 사건을 극복하고 오히려 인류학적 고찰을 개진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어쩌면 그의 삶에서 이미 예견되어 있었던 게 아닐까.
《야수를 믿다》는 사건 시점과 서술 시점이 혼재하는 현재형 문체를 구사하고, 회상과 기록 속에 꿈과 환상을 개입시키는 독특한 스타일을 보여준다. 이는 저자가 겪은 혼란과 사유의 전환을 밀도 깊게 전달할 뿐만 아니라, 작품에 시적인 색채까지 가미한다. “몽환적이고 시적인 동시에 깊은 울림을 준다”는 〈레쟁록〉의 평가처럼, 본작이 예리하고 묵직한 통시를 보여주면서도 인류학자의 이론적인 리포트나 단순한 에세이가 아닌 한 편의 문학작품으로 생동감 있게 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추천사
“시베리아 곰에게서 살아남은 인류학자의 생생하고도 강렬한 삶의 기록.”
〈리베라시옹〉
“곰과 인간의 세계 사이에서 독특한 균형을 찾는 아슬아슬한 줄타기.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에 비견된다.”
〈르몽드〉
“의미의 붕괴를 수용하는 이야기. 장르를 초월한 회고록.”
〈뉴욕타임스〉
“이 책은 재탄생의 기록이다. 젊은 인류학자가 북극의 원주민들을 찾아 떠난 여정과 그녀가 겪은 시련에 대해 이야기한다.”
〈텔레라마〉
“극심한 기후위기 시대, 나스타샤 마르탱은 첨예한 기록과 새로운 사고로 비인간과의 연결과 책임을 상기시킨다. 몽환적이고 시적인 동시에 정치적이다.”
〈레쟁록〉
“단순히 ‘타자를 향한 학문’이 아닌, ‘파국을 향해 달려가는 인간 본성을 탐구하는 철학’으로 인류학을 재조명하는 작품.”
〈디플로마티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