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무렵에 하는 면도의 매력, 요절과 장수의 딜레마,
스키야키, 장어, 크로켓, 도넛을 향한 예찬…
천진난만하고 엉뚱한 하루키 씨의 유쾌한 단상
“갓 튀겨낸 도넛은 색깔이며 향기며 씹었을 때 바삭한 식감이며, 뭔가 사람을 격려하는 듯한 선의로 가득 차 있다. 많이 먹고 건강해집시다. 다이어트 따위, 내일부터 하면 되잖습니까.” _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에세이의 매력은 무엇보다 소설에서는 절대 눈치챌 수 없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또 다른 면모를 만나는 데 있을 것이다.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는 경쾌한 리듬으로 무라카미 하루키만의 ‘소확행’적 일상을 전한다. 저녁 무렵에 하는 면도의 쾌감부터 음식과 음악, 여행과 사랑에 이르기까지, 거창한 사건도 특별한 교훈도 없는 일상의 작은 에피소드가 이어진다. “인생에는 감동도 수없이 많지만 부끄러운 일도 그만큼 있더군요” “인생에는 어느 정도 터무니없는 수수께끼와 유쾌한 오해가 필요한 게 아닐는지” “다이어트 따위, 내일부터 하면 되잖습니까” 같은 문장에서는 세계적인 작가의 진지한 얼굴 뒤에 숨은 장난기와 유머도 만날 수 있다. 늘 완벽해 보이기만 하던 그가 수줍은 듯 털어놓는 ‘헐렁한’ 일상을 엿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진지한 소설을 써온 작가가 이토록 아무렇지 않게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다는 것, 그리고 그 이야기가 이상하리만치 재미있다는 것이 ‘무라카미 라디오’의 묘미다. 별것 아닌 일도 허투루 지나치지 않고 한 번 더 생각해보고, 그 생각의 끝에서 뜻밖의 방향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하루키의 화법은 천진난만하고 또 능청스럽다. 그렇게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에게서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조금 더 친근한 무라카미 하루키 씨를 만나게 된다.
이 책에 보낸 찬사
마치 단편소설의 도입부 같은 글도 있다. <리스토란테의 밤>은 그중 압권이다. 아내와 결혼기념일을 축하하러 간 고급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옆 테이블의 상황을 엿들은 해프닝을 담았다. 남자는 ‘슬슬 꼬셔볼까’ 생각하고 있고 여자도 ‘그냥 넘어가줄까’ 궁리중인 게 역력한 옆 테이블의 분위기는 남자가 파스타를 “츠르릅 츠르릅!” 하고 엄청난 소리를 내며 먹기 시작하자 얼어버린다. 하루키와 그의 아내와 웨이터와 옆 테이블의 여자 모두 “계절이 바뀔 때 지옥의 문이 한번 열렸다 닫히면서 나는 것 같은 소리”에 말을 잃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그저 행복하게 “츠르릅 츠르릅!”, 이런 식으로 언제나의 하루키처럼 맥주와 재즈, 책 읽기와 야구, 기담과 김밥, 달리기와 강아지 같은 화제를 조곤조곤 늘어놓는다. 그야말로 하루키다운 글의 향연.
_이다혜 기자 | <씨네21>
21세기 초반 무렵이니까 무라카미 하루키가 오십 무렵에 패션잡지 <앙앙>에 연재한 에세이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여성해방의 상징으로 불태워진 브래지어들을 떠올리며 브래지어들은 하루하루 자기 일을 했을 뿐인데, 하고 브래지어를 가엾게 여기거나 집 안의 업소용 냉장고에 좋아하는 크로켓을 대량으로 만들어 냉동해두었다가 수리 기사를 부를 수 없는 주말, 오필리어처럼 슬프게 녹아가는 크로켓을 이틀에 걸쳐 장렬히 먹어치운 나머지 끝내 크로켓들에게 단체 폭행을 당하는 꿈을 꾸고 말았다는 이런 글들은 하루키 에세이의 정수다. 뭐랄까, 너무나도 인체에 무해한 재미가 있다.
_김현진 칼럼리스트 | <채널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