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현대문학의 스타일리스트 패트릭 매케이브의 대표작
패트릭 매케이브는 데뷔 이래, 자신만의 세계관과 분위기가 강렬한 작품을 써왔다. 마치 아일랜드의 기후처럼 음습하고 눅진한 그의 소설에 대해 평단과 독자는 아일랜드의 현대문학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내렸고, 매케이브는 일약 아일랜드 현대문학 최고의 스타일리스트로 인정받았다. 폭력, 광기 등 잔혹한 이야기만을 쓴다는 일부 비판에, 매케이브는 “난 살인, 폭력 그 자체에 대한 글쓰기에 관심 있는 게 아니다. 난 그것이 세상을 향한 상상력을 굴절시키거나 밀어붙이게 만드는 뇌관이나 여과장치라고 생각한다. 태어나 살다가 죽는 게 폭력, 혼란, 광기다”라고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 《푸줏간 소년》은 매케이브에게 1992년도 아이리시타임스 문학상(前 아이리시타임스-에어링구스 문학상) 수상과 부커상 노미네이트라는 영광을 선사했다. 이러한 문학적 성공에 머물지 않고, 작가 자신이 독특한 원작을 바탕으로 다양한 외적 변용을 시도한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프랭크 돼지가 안녕이라고 말하네’라는 새로운 제목을 달고 희곡으로 변주되어 1992년 더블린 페스티벌 무대에서 초연됐고, 영화 <푸줏간 소년>은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로 유명한 닐 조던의 연출 아래 1998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3관왕에 오르는 성공을 거두었다.
“걱정 마 다시는 누구도 내 속을 긁지 않을 거야!”
소설은 아일랜드의 한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주인공 ‘프랜시 브래디’는 알코올 중독자에 폭력과 폭언을 일삼는 아버지, 우울증 때문에 자꾸만 자살을 기도하는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가정환경만으로도 충분히 불행한 소년의 일상은, 유일한 친구 ‘조’와의 우정으로 겨우 유지된다. 그러던 어느 날, 런던에서 ‘누전트’ 일가가 마을로 이사를 오고, 그 집의 엄정하고 꼿꼿한 누전트 부인은 프랜시를 단박에 천덕꾸러기 취급을 해버린다. 자기 아들과 친해지려 한다는 이유만으로 프랜시의 가족을 싸잡아 ‘돼지’라고 폄하해버리기까지 하는 그녀에게, 프랜시는 나름대로 앙갚음을 시도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냉대와 무관심으로 일관할 뿐이다. 프랜시의 가출과 마을 차원에서의 가혹한 처벌이 거듭되는 사이, 프랜시는 자신에게 소중한 것들을 자꾸 잃어간다는 두려움에 휩싸이고, 결국 제 상실감을 그릇된 방식으로 분출하고 만다.
줄거리에서 엿볼 수 있듯, 소설은 안팎으로 혼란을 겪는 소년의 정신세계에 대한 촘촘한 묘사로 가득하고, 그만큼 작가의 문장은 매우 복잡하고도 섬세하다. 현재 영미문학 번역에서 첫손으로 꼽히는 번역가 김승욱이 이를 잘 살려 옮김으로써 손색없는 감동과 재미를 이끌어냈다.
악마가 되어버린 소년, 독자의 마음속에 동정과 두려움이 뒤엉키게 하다!
수십 년 전 일에 대한 프랜시 브래디의 회상으로 문을 여는 《푸줏간 소년》은 그 문장 스타일 때문에 첫 페이지부터 퍽 낯선 느낌으로 다가선다. 작품 전반에 걸쳐 상상과 현실, 생각과 대사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서술했기 때문이다. 문장부호 사용 규범을 무시하는, 드문드문한 마침표와 따옴표 때문에 모호하고 뭉뚱그려진 느낌은 더욱 강렬해진다. 작가는 이처럼 독백을 끝없이 늘어놓은 듯한 작법을 통해, 독자라는 관찰자의 위치를 주인공 프랜시의 머릿속으로 옮겨놓는다. 그 결과, 독자는 마치 프랜시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고 느끼는 듯 그의 감정이나 행동 하나까지도 강렬하게 공감하게 된다. 이야기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돌연 극단적 선택을 하는 주인공과 맞닥뜨리게 되는데, 그때 독자를 휘감는 것은 두려움과 함께 밀려오는 뭉클한 동정심이다. 냉대와 무관심과 억압밖에 받아본 적 없는 소년의 감정이 마치 자신의 이야기인 것처럼 가슴 깊숙이 파고들기 때문이다. 《푸줏간 소년》은 독자에게 한 소년의 상처와 슬픔에 대한 공감을 선사하는 동시에, 이를 넘어서는 묵직한 질문을 던져온다. 폭력적이고 억압적 상황에 놓인 피해자의 언동은 무조건 정당성을 얻을 수 있는 것일까. 프랜시 브래디가 소년다운 조악하고 허술한 논리에 의거해 극단적 선택을 한 ‘가해자’라고 비난할 수도, 악마가 되어버린 소년을 충분히 그럴 만했던 ‘피해자’라고 감싸 안을 수만도 없는 상황 속에서, 결국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남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