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니 컬러TV를 나눠 들고 집으로 들이닥친 의문의 세 남자, 시를 읽듯 혼잣말을 계속하는 청년, 십칠일 째 잠들지 못하고 깨어 있는 주부, 너를 사귄 이유는 너를 잡아먹기 위해서라는 남자…… 현실과 환상의 균형이 이지러진 세계 속 수수께끼에 둘러싸인 듯 은연하고 묘려한 일상. 혼란과 고독, 상실을 헤쳐 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마흔 살 무렵의 무카라미 하루키가 그린 어둡고 단단하고 고요한 세계.
TV피플
봄날의 어느 일요일 해 질 녘, 세 명의 TV피플이 찾아온다. 몸집이 조금 작고 파란색 옷을 입은 수수께끼의 남자들, 그들은 나의 존재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슬며시 내 방으로 들어와 소니 컬러텔레비전을 두고 말없이 떠난다. 평소 책을 쌓아둔 모양이 조금만 흐트러져도 불편한 내색을 보이는 아내는 어째 TV의 존재 따위 괘념치 않는다. 그리고 그날부터 TV피플이 내 일상에 스며들기 시작한다.
비행기 _혹은 그는 어떻게 시를 읽듯 혼잣말을 했나
얼마 전 스무 살이 된 그는, 아이가 있는 일곱 살 연상의 유부녀와 만나고 있다. 매번 여자는 가정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라고 했다. 남편은 자상하고 아이는 사랑스럽고 자신은 행복한 것 같다고. 그때마다 그는 생각한다. 그럼 나랑 왜 잘까? 여자는 자주 운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을 한다. 먼 하늘의 비행기처럼 곧 사라질 흔적을 남기며 지나가는 젊은 날의 이상한 오후.
우리 시대의 포크로어 _고도자본주의 전사
소설가인 나는 이탈리아에 머무를 때 루카라는 중부 마을에서 고등학교 동창과 조우했다. 학창 시절 나는 딱히 그를 좋아하진 않았다. 어디에나 한 명쯤 있는, 흠잡을 데 없는 모범생 타입. 그러나 우연히 만났고, 모처럼이고, 이탈리아 루카이고, 맛있는 레드와인도 있다. 우리는 대화가 길어졌다.
가노 크레타
내 이름은 가노 크레타. 나의 일은 언니 가노 마르타가 물소리 듣는 걸 거드는 것이다. 언니는 물소리 듣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다. 언니는 귀띔한다. “네 몸속 물소리를 듣게 되면 네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언니는 나를 진심으로 걱정한다. 그러나 남자들은 나를 함부로 대한다. 결국 우리는 어느 날 남자 한 명을 죽이기에 이른다. 이 이야기는 그 이후에 벌어진 일의 기록이다.
좀비
결혼을 앞둔 한 커플이 한밤중 묘지 옆길을 걷고 있다. 안개 탓인지 불길한 예감이 감도는 분위기에서 남자가 불쑥 말했다.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인 거 알아? 안짱다리, 암내, 꾀죄죄한 목깃, 귓속의 사마귀…” 여자는 잠자코 있었다. 화가 나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 사람이 왜 이러지, 이건 꿈일까? 그렇다면 깰 수 있을까?
잠
잠을 못 잔 지 벌써 십칠 일째다. 그런데 아무 문제가 없다. 졸리지 않고 의식도 명료하고 피로도 느끼지 않는다. 몸은 오히려 더욱 젊어지는 것 같다. 나는 평범하게 장을 보고 수영을 한다. 남편과 아들을 위해 밥을 해준다. 모두가 잠든 밤에는 래미 마르탱을 마시고 《안나 카레니나》를 읽는다. 나는 원래 어떤 사람이었나? 나는 점점 깊은 생각에 잠기고, 예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