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망과 상실 사이 ‘도쿄 몬태나 특급열차’에서 만난
인생의 진짜 얼굴과 그 속에서 빛나는 위트!
131편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도쿄 몬태나 특급열차』를 관통하는 정서는 쓸쓸함이다. 브라우티건은 일본 도쿄와 미국 몬태나를 끊임없이 오가며 자유주의 정신을 잃은 미국과 그 대안인 일본 간에 존재하는 문화적 차이를 통찰하다가 공허한 인간관계와 나이 들어감의 슬픔 그리고 죽음을 의식한다.
1960년대의 자유주의 정신을 대표했던 브라우티건에게 이를 상징하던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은 큰 충격이었다. 「390장의 크리스마스트리 사진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에서 그는 케네디가 암살된 해인 1963년에 대해 “12월은 미국의 모든 국기가 조기(弔旗)로 내걸렸고, 슬픔의 터널 같았다”라고 직접적으로 표현했다. 1976년의 일본행은 자유주의 정신을 잃은 미국에서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한 여정이었다. 그는 동서양의 차이를 통찰하고 그 면면을 특유의 위트로 유쾌하게 풀어냈다. 「일본의 눈(眼)」에서는 자기가 집안의 사자(Lion)라고 거들먹거리는 일본인 남자를 보고 아내가 미국 여자였다면 저 남자의 고환을 찼을 것이라고 얘기한다.
새로운 세계이자 일종의 대안으로 여겨졌던 일본행은, 그러나 낯선 외국 생활에 따른 공허한 인간관계로 이어졌다. 「미지의 친구의 무덤」에서 화자는 낯선 사람에게 친밀감을 느끼지만 말없이 스쳐지나가 버린다. 「내 마음속에서 끓고 있는 어떤 것」에서는 술집에서 만난 여자와 재회를 약속하지만 다음 날 장소가 기억나지 않아 인연을 놓친다. 이처럼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인간관계는 삶의 덧없음으로 확장된다. 「마이 페어 도쿄 레이디」에서 순식간에 변하는 연극 무대와 노인으로 분장한 배우의 얼굴에서 작가는 삶의 허망함과 노년의 쓸쓸함을 상기한다. 「루디 게른라이히에게 바치는 헌사 / 1965년」에서는 병사들이 죽은 애완동물을 묻는 가상의 공동묘지가 등장하는데, 한 묘비에 쓰인 “다 끝났다”라는 글귀가 삶을 바라보는 그의 인식을 짐작케 한다. 그럼에도 작가는 시종일관 특유의 위트를 잃지 않는다.
결국 브라우티건이 도쿄와 몬태나를 오가는 특급열차를 타고 가고자 했던 곳은 상실과 갈망 사이의 중간지대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특급열차처럼 순식간에 지나가버리는 삶은 깊은 허망함 또한 남겼다. 그래서 그의 위트는 풍자하고 냉소하는 수단이 아니라, 이런 허망한 삶을 ‘견디는’ 행위였다. 131편의 글을 찬찬히 곱씹어보면, 문득 그 기저에 짙게 깔려 있는 죽음의 정서가 느껴지는 것도 그래서가 아닐까.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삶을 응축한,
한 편의 시 같은 소설
1935년 미국에서 태어난 브라우티건의 삶은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던 그는 차라리 교도소에 들어가서라도 배불리 먹고 싶어 경찰서 유치장에 돌을 던졌다가 체포되어 정신병원에서 전기충격치료를 받았다. 이후 틈틈이 쓴 시를 출판사에 투고했지만 대부분 거절당했고, 겨우 낸 첫 시집은 무관심 속에 잊혔다. 1961년 완성한 첫 소설 『미국의 송어낚시』는 출판하려는 곳이 없었다. 결국 1965년 완성한 『빅서에서 온 남부 장군』이 데뷔작이 되었다. 다행히 1967년 선배 작가 커트 보네거트의 눈에 띄어 『미국의 송어낚시』가 출판되었고, 미국에 불어닥친 반문화 운동의 바람을 타고 미국 전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심지어 한 신혼부부는 아이의 이름을 ‘미국의 송어낚시(Trout Fishing in America)’로 지을 정도였다. 그리고 한 차례 붐이 지나간 1970년대에 그는 해외, 특히 일본에서 주목받는다. 『미국의 송어낚시』 일본어판이 출간되면서 대중과 평단 모두에게서 호평을 받은 것이다. 그 영향인지, 『도쿄 몬태나 특급열차』에서 드러나 있듯 그는 이 시기에 도쿄에서 살다시피 했고, 1977년에는 도쿄에서 만난 여성 요시무라 아키코와 재혼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함께 몬태나로 건너와 정착했지만 1980년 이혼한다. 이렇듯 작가로서 크게 성공했음에도 오랫동안 앓은 알코올의존증은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결국 『도쿄 몬태나 특급열차』 출간 사 년 후인 1984년, 브라우티건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나이 49세. 아무도 찾지 않는 곳에서 권총으로 자살한 그는 행방을 찾던 출판사에서 고용한 사립탐정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정확한 사망일조차 알 수 없다.
브라우티건은 떠났지만, 그의 문화적 성취는 여전히 살아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비롯해 수많은 작가들이 지금도 그를 언급하고 그에게서 영향을 받아 글을 쓴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의 사망 이듬해인 1985년에 태어난 작가 박솔뫼는 소설 『머리부터 천천히』의 작가의 말에서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워터멜론 슈가에서』는 나를 위한 것 같다”고 쓰기도 했다. 자신의 이름을 ‘미국의 송어낚시’로 바꿨던 미국 소년은 지금 일본 와세다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브라우티건은 “우리 모두는 역사에서 각자 맡고 있는 역할이 있다. 내 역할은 구름이다”라고 썼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타문화를 이해하려던 그의 ‘도쿄 몬태나 특급열차’는 하늘의 흰 구름이 되어 지금도 도쿄와 몬태나를 쉼 없이 오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