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철학자 한병철 인터뷰 : 《사물의 소멸》 출간에 즈음하여

2024.02.26 #한병철#철학
Q. 유튜브뿐 아니라 다양한 매체가 등장하면서 새로운 정보와 데이터가 쏟아지고, 내게 필요한 정보를 언제든 검색해 알아볼 수 있는 세상이 왔습니다. 저 역시 구글링을 통해 과거 기사, 전자책을 찾아보며 제게 필요한 정보를 얻고 있는데요. 선생님께서는 이 책에 ‘우리는 정보를 쫓아 질주하지만 앎에 도달하지 못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알아두지만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고 분석해주셨습니다. 이러한 정보가 그 즉시 궁금증을 풀어줄 수는 있지만 ‘앎’,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할 거라고 분석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매 순간 새롭고 관심 있는 정보가 바뀌기 때문에 우리에게 충분히 정보를 숙고할 시간이 부족해졌기 때문일까요.

A. 문제는 정보라는 현상 자체에 들어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보가 무엇인지 이해해야 해요. 정보는 지금 우리 삶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습니다. 정보가 현재성을 띠는 기간은 아주 짧죠. 그렇게 정보는 놀라운 일이 주는 흥분을 먹고 살기 때문에, 시간적 안정성이 없습니다. 정보는 실재를 영원한 현재성의 현기증 속으로 처넣어요. 그래서 우리의 지각은 파편화되고요. 정보 곁에 하염없이 머무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정보는 인지 시스템을 동요하게 하죠. 앎, 경험, 깨달음 같은 인지적 실행은 몹시 시간집약적이에요. 이 실행들은 과거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까지 뻗어있거든요. 정보사회의 현재성 광란은 그 실행들을 파괴해요. 정보의 본질은 우연성입니다. 그래서 정보는 삶 자체를 우연으로 만들죠. 정보는 삶에 멈춤과 방향을 줄 만한 의미를 매장해버립니다.

Q. 인간의 생각하기는 때론 바보처럼 굴며 전혀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만들어낸다고 하셨습니다. 반면 인공지능은 지나치게 똑똑해서 이 같은 ‘바보 같은 생각’을 할 수 없다고 보셨죠. 인공지능이 만들어놓은 데이터에 익숙해진 사회는 이런 바보 같은 생각이 쓸모없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의 사고방식에 익숙해지는 일상이 인간의 사유에 어떤 영향을 미칠 거라고 보시는지요.

A. 인공지능은 생각하지 않아요. 단지 계산하기만 하죠. 지능intelligence은 여럿 ‘중에서 선택하기(inter-legere)’를 의미합니다. 요컨대 지능은 한 시스템 안에서 이미 주어진 선택지들 가운데 하나를 고르죠. 지능은 주어진 시스템의 울타리를 넘어가지 못해요. 오직 생각하기만 이 넘어가기 능력을 지녔고 그 능력을 통해 전혀 새로운 것을 향한 통로를 엽니다. 생각하기의 핵심 특징은 지능이 아니라 오히려 바보짓이에요. 새로운 어법, 새로운 생각,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는 철학자는 누구나 바보입니다. 그런 철학자는 기존에 있던 모든 것과 결별하죠. 생각하기는 근원적인 어리석음을 품고서 철저한 타자를 향하여, 아무도 발 디딘 적 없는 곳을 향하여 도약을 감행합니다. 독일 극작가 보토 슈트라우스는 이렇게 썼어요. “어리석음의 내부는 부드럽고 잠자리 날개처럼 투명하다. 그곳은 극복된 지능으로 찬란하게 반짝인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위험은 사람들도 인공지능처럼 생각은 안 하고 계산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Q. 인공지능은 정말 바보 같은 생각을 할 수 없을까요. 이마저도 프로그래밍으로 설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근에는 소설과 시를 쓰는 인공지능 모델이 나왔습니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영역으로 여겨졌던 ‘상상하기’ 역시 인공지능이 대체할 수 있다고 보시는지요. 이마저 인공지능이 대체한다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유의 영역은 무엇이 남을까요.

A. 진정한 인간적 활동들은 항상 몸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생각하기조차도 신체적 차원을 지녔어요. 감정과 느낌이 없으면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 말을 자주 해요. ‘이미지 앞에서 맨 먼저 발생하는 생각은 소름이다.’ 심지어 사랑과 깨달음도 관련이 있어요. 오직 사랑하는 사람만 실재를 제대로 볼 수 있어요. 사랑을 알고리즘으로 모방할 길은 없고요.

Q. 손에 잡히는 ‘사물권’에 살던 사람들이 손에 잡히지 않고 새로운 정보가 끊임없이 흐르는 ‘정보권’ 안에 살고 있습니다. 생활 방식도 바뀌었습니다. 정보는 유튜브, 인터넷에 얼마든 검색해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소유’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 같은 생활 방식의 변화가 편리함을 가져다주기도 했지만 선생님께서는 ‘놀람을 먹고 사는 정보의 덧없음이 삶을 불안정화한다’(p.11)고 책에 분석해주셨습니다. 사물권이 정보권으로 변화하는 삶이 우리 삶을 어떻게 불안정화하고, 이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잃고 있는 걸까요.

A. 인간은 상대가 필요해요. 공명(共鳴) 관계를 맺을 상대 말이에요. 사물은 말하자면 공명체입니다. 공명이 없으면, 우리는 세계를 상실하게 돼요. 그러면 우울해지고요. 정보는 상대의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정보 곁에 하염없이 머무를 수 없잖아요. 게다가 정보는 덧없기 그지없어요. 정보는 공명 관계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보는 세계 빈곤을 일으킵니다. 세계 빈곤은 우울증의 한 증상이죠.

Q. 과거에는 사진을 인화해 사진첩에 간직하고 보관하고 소유해왔다면 지금은 스마트폰의 사진첩 속에 저장돼 있습니다. 실체가 없는 사진들은 휴대전화 데이터 용량이 꽉 차면 언제든 제거될 수 있는데요. 비단 사진뿐만 아니라 책, 음악 등은 더 이상 소유하지 않고 스트리밍하고 공유할 수 있게 됐습니다. 잡다한 물건들을 소유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가방은 가벼워졌지만 ‘소유에서 체험으로’ 바뀐 삶의 방식은 우리에게 소중한 무언가를 더 이상 오래도록 간직할 필요가 없는 세상으로 바꿨습니다. 어떤 사물을 소유해 오래도록 간직하고 지키고 쓰는 일상이 소멸하는 것은 우리 삶을 어떻게 바꾸고, 이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잃고 있을까요.

A. 우리는 기억하는 능력을 점점 더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는 삶이 몹시 덧없고 불안정해지는 것이죠. 행복은 점처럼 고립된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로지 우리가 호흡해온 공기 속에서만, 우리와 함께 살아온 사람들 사이에서만 행복을 떠올릴 수 있어요. 행복은 과거로 길게 뻗은 꼬리를 가지고 있죠. 행복은 우리가 살면서 겪어낸 모든 일을 주로 먹고삽니다. 행복하려면 이야기가 지닌 끌어당기는 힘이 필요해요. 그것은 과거 일을 현재로 끌어당겨 현재 안에서 계속 효과를 발휘하게 하는 힘, 그야말로 과거를 부활시키는 힘이죠. 그렇게 행복은 구원과 맥이 통합니다. 모든 것이 우리를 현재성의 현기증 속으로 몰아넣는 곳에서는, 바꿔 말해 우연의 폭풍 속에서는 행복을 느낄 수 없습니다.

Q. ‘정보권은 우리에게 더 많은 자유를 가져다주지만 동시에 우리를 감시와 조종에 노출한다’고 분석해주셨습니다. 일례로 우리가 사용하는 스마트폰은 개인의 구매 이력을 이용해 상품 광고에 활용합니다. 구매를 위해 장바구니에 담아둔 상품이 지속적으로 광고에 노출되는 식입니다. 이런 광고가 끊임없이 보이면서 강제 구매 ‘당하게’ 되는 현실입니다. 사물 간 네트워크를 연결해주는 ‘사물인터넷’ 세상이 한 개인의 일상을 감시하는  ‘스마트 감옥’으로 변질된다면 어떤 문제가 벌어질 수 있을까요.

A. 사물인터넷 덕분에 가능한 스마트홈은 주택 전체를 디지털 감옥으로 바꿔버리고 우리의 일상생활을 분 단위로 기록합니다. 고된 청소의 부담을 덜어주는 스마트 청소 로봇은 주택 전체를 측량하여 지도를 작성하죠. 스마트 침대는 그물처럼 연결된 센서들로 수면 중에도 감시를 이어갑니다. 감시가 편리의 탈을 쓰고 일상에 침투하고 있어요. 디지털 감옥은 스마트 안락 구역이기도 해서, 거기에서는 지배 체제에 맞선 저항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좋아요’와 편리의 노예입니다. 디지털 전체주의가 등장할 위험이 임박했어요. ‘좋아요’와 편리에 기반을 둔 디지털 전체주의에 맞서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저는 미국 미술가 제니 홀저의 말을 인용하고 싶어요. “내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줘(Protect me from what I want).”

Q. 한 개인의 취향이 알고리즘으로 분석되고 사물인터넷에 통제 아래 살아가는 일상은 무엇을 바꾸고, 이 속에서 개인은 선택의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요.

A. 우리는 골라잡을 수 있어요. 하지만 자유는 더 근본적인 선택권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진정한 선택권을 더는 보유하고 있지 않아요.

Q. 한국에서는 10월 15일 ‘국민 메신저’로 불리는 카카오의 주요 서비스가 데이터센터 화재로 주말 내내 먹통이 되면서, 실체 없이 데이터만 존재하는 초연결사회의 허상이 드러났습니다. 문서 파일을 보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카카오 서비스와 연결된 금융 서비스까지도 마비됐습니다. 일부 언론에서는 이 사태를 두고 ‘디지털 재난’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는데요. 현금, 문서, 사진 등 ‘사물’이 소멸한 미래는 편리함을 가져다주지만 한편으로는 무엇을 소멸시켜가고 있는지, 이로 인해 미래사회에서 우리는 어떠한 재난과 위험을 마주할까요.

A. 기술에 대한 우리의 의존이 점점 더 심해진다면, 종말론적 상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디지털화가 진척될수록 세계는 더 유령처럼 되죠. 어쩌면 조만간 디지털 유령들이 모든 것을 통제에서 벗어나게 만들지도 몰라요. 영국 소설가 포스터의 단편소설 <기계는 멈춘다>는 일찌감치 그런 파국을 묘사했지요. 그 작품에서 유령 떼가 세계를 멸망시킵니다. 미국 소설가 돈 드릴로의 마지막 장편소설엔 “고요The Silence”라는 제목이 붙어있어요. 그 작품은 완벽한 정전(停電) 상황을 서술합니다. 하늘에서 비행기가 추락하죠. 화면은 갑자기 검게 변하고요. 핸드폰도 작동을 멈춰요. 물이 없어요. 엘리베이터, 난방기, 냉장고도 사용할 수 없어요. 고요와 함께 공포가 느껴집니다. 하지만 진짜로 종말론적인 것은,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할 수 없음을 깨닫는 장면이에요. 사람들은 자신이 이야기하는 능력을 잃었다는 것을 자각하죠. 사람들은 정보만 교환할 수 있어요. 강제된 고요가 사람들의 심층적 외로움을 드러냅니다.

Q. 얼굴을 보지 않고도 메신저, 소셜미디어를 통해 타인의 소식을 알 수 있는 세상이 왔습니다. 내가 굳이 타인의 안부를 묻지 않아도 소셜미디어를 통해 타인의 사생활을 엿볼 수 있습니다. 내가 팔로우 하고 싶은 사람들의 일상만 선택적으로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팔로워 수는 늘어나지만 타자와 얼굴을 마주치지 않는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잃고 있을까요. 이런 세상은 타자라는 존재를 이해하는 데 어떤 어려움을 줄까요.

A.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것은 결합되는 것과 다릅니다. 도리어 무제한의 연결성이 결합을 약화하죠. 집약적 관계는 타인을 전제합니다. 처분 가능성에서 벗어나 있는 타인을 말이죠. 그런데 디지털 네트워크 덕분에 우리는 타인 곧 너를 처분 가능한 그것으로 만들어요. 그 결과로 근원적인 외로움에 빠지고요.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소비 가능한 객체는 집약적 결합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네트워크와 연결성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외롭습니다.

Q. 나와 다른 타자가 사라지고 내가 좋아할 만한 정보, 상품, 광고, 텍스트가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계속해서 노출되는 세상은 ‘다른 것’을 마주할 기회를 앗아가고 있습니다. 나와 다른 가치관, 나와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조금은 덜 불편한 사회일지 모르지만 이런 현실은 결국 우울증을 확산하고 한 인간을 자기 안에 가둬두는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고 분석해주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타자의 부활’만이 우리를 결핍으로부터 해방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타자의 부활’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A. 집약적 결합은 우리가 객체에 리비도적 에너지를 쏟아부을 때 발생합니다. 그런데 심리적 에너지의 정체(停滯)가 발생하면, 그 에너지가 타자에게로 흘러나가지 못하고 나에게로 되돌아 흘러오죠. 타자에 깃들지 못한 리비도적 에너지의 이 같은 정체는 우리를 불안하고 우울하게 만들어요. 불안은 객체와의 결합이 부재할 때 발생합니다. 그러면 나는 자기에게로 되던져져 세계 없이 자기 주위를 맴돌죠. 오직 에로스만이 우울을 이길 수 있습니다. 에로스는 타인을 전제하고요.

저자소개

한병철
저자 한병철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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