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순간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들
길거리에서 우연히 전남편을 만났다. 나는 새로 지은 도서관 계단에 앉아 있었다. 잘 지냈어? 내 인생. 내가 말했다. 27년을 부부로 살았으니 그렇게 말해도 무방하다고 느꼈다. 그가 말했다. 뭐라고? 뭔 인생? 내 인생은 전혀 없었다고.
마지막 순간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들 마지막 순간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들 그레이스 페일리 저자
  • 2018년 06월 26일
  • 284쪽126X192mm비채
  • 978-89-349-8171-8 04840
마지막 순간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들
마지막 순간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들 마지막 순간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들 저자 그레이스 페일리 2018.06.26

거칠면서도 유려하고, 무뚝뚝하면서도 친절하고, 전투적이면서도 인정 넘치고…

한번 빠져들면 이제 그것 없이는 못 견딜 것 같은 신비로운 중독성이 있다.

_무라카미 하루키

 

단 세 권의 단편집으로 미국문학의 전설이 된 작가 그레이스 페일리가 드디어 한국에 소개된다. 페일리의 두 번째 소설집이자 첫 한국어판인 《마지막 순간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들》은 작가가 1960년부터 1974년까지 쓴 작품 17편을 모은 것이다. 중편에 가까운 작품부터 5페이지에 불과한 초단편까지, 작품마다 페일리 특유의 관조적인 시선과 냉소, 유머가 넘친다. 페일리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기승전결이라는 소설의 전통적 문법을 무시해버리는 듯 느닷없이 시작해 갑자기 끝나는 ‘무형식의 형식’이 독자를 당황시키면서도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무엇보다도 이야기의 화자가 대부분 여성이며, 여성의 삶을 깊게 들여다보는 ‘여성서사’여서 더욱 반갑다. 그레이스 페일리의 매력에 깊이 공감해 이 소설을 직접 번역하여 일본에 작가를 소개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를 책의 첫머리에 실어 이해를 도왔다.

P.15
길거리에서 우연히 전남편을 만났다. 나는 새로 지은 도서관 계단에 앉아 있었다.
잘 지냈어? 내 인생. 내가 말했다. 27년을 부부로 살았으니 그렇게 말해도 무방하다고 느꼈다.
그가 말했다. 뭐라고? 뭔 인생? 내 인생은 전혀 없었다고.
P.23
어린 자식들까지 딸린 마리아는 힘든 시기를 최선의 방법으로 살아내려고 애썼다. 동네에 있는 가까운 친척집 몇 곳을 옮겨 다니면서 매번 열심히 일해 그 집 살림을 도왔다. 마리아는 일도 잘했지만 빵을 맛있게 굽는 것으로 유명했다. 마리아는 한동안 좋은 친구의 집에 들어가 살면서 아주 훌륭한 빵을 구웠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집 남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마리아가 구운 빵은 아주 근사해. 당신은 왜 저런 빵을 못 굽는 거지?” 그러고는 아마도 마리아의 다른 면에 대해서도 칭찬한 것 같다.
P.44
“어째서 내 이름을 붙여준 애는 하나도 없는 거니, 마거릿?” 내가 마거릿의 면전에서 대놓고 물었습니다.
“여자아이가 둘밖에 없어서요. 한 명은 우리 엄마 이름을 따서 테레사로, 다른 한 명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언니 이름을 따서 캐서린으로 했어요. 다음에 낳는 아이에게는 어머니 이름을 붙일게요.”
“뭐라고? 아이를 또 낳는다고! 내 아들을 죽일 셈이니?”
P.72
애니타 프랭클린, 혼자서 잘해낼 수 있겠어? 페이스가 속으로 말했다. 뉴 위트레흐트 고등학교에서 가장 섹시했던 애니타 프랭클린, 요즘은 밤에 어떻게 자? 똑똑한 세파르디 유대인 학자이자 강사인 잘난 아서 마자노의 옆에 다시는 누울 일이 없는 요즘 어떤데? 이제 침대에 누우면 네 위로 시간이 덮쳐올 거야. 네 입술에 닿는 잘생긴 금발 아서의 입술도 아니고, 보이스카우트 같은 지적이고 뜨거운 손가락도 아니야.
주변에 어른거리며 맴돌던 리카르도의 그림자가 이 순간 커다란 문젯거리로 훅 솟아올라 그녀의 왼쪽 눈에 잽을 날렸고, 페이스가 놓인 바닥 수면이 얼마나 얕은지 온 세상에 드러냈다. 이 순간 그녀의 육체라는 논에 벼를 심을 수도 있을 정도였다. 그리하여 이 순간부터 시작되어 오후 내내 그녀가 어찌해볼 수 없을 만큼 물줄기가 밀려오는 가운데 아름답고 힘차게 새싹을 틔울 수 있었을 것이다.
P.88
이야기를 나눈 뒤 내 상태는 더 악화되었다. 나는 아이들을 집에 둔 채 살아 있는 생명체 속에 섞여 얼른 한잔하기 위해 길모퉁이로 달려갔다. 그러나 줄리네 가게를 비롯하여 모든 술집에는 얼른 핫위스키를 들이켠 뒤 자리를 옮겨 사랑을 나누려는 남녀들이 가득했다.
사람은 생명의 행위를 갖기 전 술기운을 빌릴 필요가 있다.
P.146
“이를테면!” 필립이 말했다. 귓불에서부터 셔츠 안까지 벌겋게 물들어 얼굴 전체가 흥분으로 완전히 빨개졌다. 피가 그의 머리에서부터 아래로 쏠리는 걸 지켜보고 있자니 나는 그의 성기를 살며시 부여잡고 싶어졌다. 말하자면 모든 기운이 쿵쿵 용솟음치면서 쏠리는 그 부위, 바로 거기 있고 싶었다.
P.162
아내와 아들은 오전 9시면 늘 슈퍼마켓에 간다. 마침내 아내와 아들이 카트와 쇼핑백과 차를 가지고 떠나자 남자는 일요일이면 허구한 날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또 나누었으니 이제 어떻게 여자와 성관계를 시작할지 다양한 방법을 강구해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P.229
“제발, 네 이야기 속에는 결혼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니? 다들 침대 속으로 뛰어들기 전에 시청으로 달려갈 정도의 시간도 없는 거야?”
“없어요.” 내가 말했다. “현실 생활에서는 그럴 시간이 있지만 내 이야기에서는 없어요.”


P.271
나는 다시 남자 이야기로 돌아가서 말했다. 백인이든 흑인이든 남자들이 우리에게 줄 거라고는 고작해야 섹스밖에 없는데도 무슨 귀한 선물이라도 주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어요. 섹스란 빵처럼 없으면 안 되지만 사실 흔해빠진 거거든요.
아, 섹스하지 않고도 살 수 있어요. 루디 부인이 말했다. 섹스하지 않고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어요.

차례

 

그레이스 페일리의 중독적인 ‘씹는 맛’ _무라카미 하루키

 

소망

뭐가 달라질까

페이스의 오후 한나절

우울한 이야기

살아 있다

자, 어서, 그대 예술의 아들들이여

나무에서 쉬는 페이스

새뮤얼

무거운 짐을 떠안은 남자

마지막 순간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들

정치적 문제

북동쪽 놀이터

소녀

아버지와 나눈 대화

이민자 이야기

장거리 달리기 

작가이미지
저자 그레이스 페일리 (Grace Paley)

미국의 소설가이자 시인, 정치운동가, 교사이다. 1922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다. 러시아에서 건너온 유대계 이민 2세로, 러시아어와 영어, 이디시어를 사용하며 성장했다. 헌터 컬리지와 뉴스쿨에서 공부했지만 학위는 받지 않았다. 1942년 영화 촬영감독인 제스 페일리와 결혼했으나 이혼하고 1972년 시인 로버트 니컬스와 재혼했다.

여러 출판사를 전전하며 거듭 거절당한 끝에 1959년 첫 소설집 《그의 작은 괴로움The Little Disturbances of Man》을 출간하였다. 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첫 단편집이었지만 작가 필립 로스와 <뉴요커>의 극찬을 받으며 성공적인 데뷔를 이뤘다. 이 책에서 작가의 페르소나인 ‘페이스’가 처음으로 등장했다. 페이스는 두 번째 작품집 《마지막 순간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들》과 세 번째 작품집 《그날 이후Later the Same Day》에서도 여러 번 등장한다. 이렇게 단 세 권의 단편집만으로 그레이스 페일리는 미국 문단의 전설이 되었으며 독자들의 압도적인 지지와 사랑을 받았다. 1980년부터 컬럼비아 대학교, 뉴욕시립대학교, 세라 로런스 대학, 시러큐스 대학교에서 강의했고 1989년 미국 예술·문학 아카데미의 일원이 되었다. 제1회 뉴욕 주 작가상을 수상, 1986년부터 1988년까지 뉴욕 주 공식 작가로 활동했다. 또한 핵확산 방지 운동에 나섰으며, 노벨평화상을 받은 프렌드 봉사평의회에서 일하는 등 평화운동가이자 사회운동가로도 활약했다. 2003년부터 2007년까지는 버몬트 주의 계관시인으로 활동했다. 구겐하임 펠로우십과 이디스 워튼상, 레아 단편소설상, 펜/맬러머드상을 수상했으며 2004년 피츠제럴드상을 받았다. 2007년 지병인 암이 악화되어 버몬트 주의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2007년 5월, 생전에 가진 마지막 인터뷰에서 그레이스 페일리는 자신이 꿈꾸는 세상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인종차별과 군국주의, 탐욕이 없는 세상. 그리고 여성이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싸울 필요가 없는 세상에서 후손들이 살아가기를 바란다.”

'출판사 리뷰'는 준비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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