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들의 섬
토끼들은 심지어 부리까지 깨끗이 먹어치웠다. 그런 다음, 털이 다시 하얗게 될 때까지 부지런히 몸을 단장했다.
토끼들의 섬 La isla de los conejos 엘비라 나바로 저자 이진 역자
  • 2024년 10월 24일
  • 280쪽128X188mm비채
  • 978-89-349-3546-9 03870
토끼들의 섬
토끼들의 섬 La isla de los conejos 저자 엘비라 나바로 2024.10.24
스페인어권 작가들의 최고 등용문으로 꼽히는 하엔 소설상을 비롯, 유수의 신인상과 작품상을 연달아 수상하며 현대 스페인 문단을 이끌어갈 새로운 목소리의 탄생을 알린 엘비라 나바로. 2010년 영국 문예지 <그랜타>에서 선정한 ‘35세 이하 최고의 스페인어권 작가 22인’에 오르는 등, 일찍부터 세계적 주목을 받은 그가 대표작 《토끼들의 섬》으로 한국 독자를 찾는다. “카프카와 보르헤스의 문학적 성취를 이어받은 걸작”이라 극찬받으며 2021년 전미도서상 번역문학부문 후보에 오른 소설집이다.
 
새가 들끓는 섬에 눈처럼 새하얀 토끼를 풀어놓으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표제작 <토끼들의 섬>부터, 귀에서 발이 돋아나는 어느 여성의 나날을 기록한 <스트리크닌>, 신혼여행지에서 돌연 자신이 벌레로 변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남편의 이야기를 담은 <잇몸> 등 기묘한 이미지가 넘실거리는 열한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어두운 밤과 같은 영혼”이라는 작품을 향한 수식어에 걸맞게, 환상과 악몽을 오가는 매혹적인 세계가 펼쳐진다.
 
P.20-21
토끼들은 우선 날카로운 앞니로 새의 목덜미를 공격했다. 그러고 나면 떨리는 주둥이와 가는 수염이 눈 색깔과 똑같이 피로 빨갛게 물들었다. 얼마 되지도 않는 살점을 다 뜯고 나면, 녀석들은 마른 나뭇가지가 분질러지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한동안 뼈를 갉아 먹느라 여념이 없었다. 토끼들은 심지어 부리까지 깨끗이 먹어치웠다. 그런 다음, 털이 다시 하얗게 될 때까지 부지런히 몸을 단장했다.
P.35
이제 발은 여자의 가슴 아래까지 늘어졌다. 한 뼘 정도 더 커진 데다, 작은 입이 달리고 거미처럼 움직이는 발가락도 자라났다.
P.76-77
그녀는 집이 엘 카날에, 그것도 오래되어 외벽이 거무스름하게 변한 건물에 있어 놀랐다. 하지만 이러한 첫인상은 낡고 곰팡이가 핀 벽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조 대리석 복도 끝에서 본 풍경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할머니가 공중에 떠 있었다. 뚱뚱한 편인 데다 구운 가지 냄새를 풍기는 할머니는 거실 한 구석, 커튼 봉 옆에 뜬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P.158
여자는 자기가 일하는 호텔에서 살았다. 세끼 식사와 마찬가지로 방세 또한 쥐꼬리만 한 월급에서 공제되었기에 실제로 손에 쥐는 돈은 거의 없었다. 지하에 있는 세탁실 옆방에서 기거하는 웨이터 두 명도 여자와 같은 조건이었다. 여자는 창문에서 도시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다는 점에서 작더라도 꼭대기 층에 있는 방을 택했다.
P.243
“그런데 당신한테 할 말이 하나 있어.” 그가 숨도 쉬지 않고 말을 이어나가는 통에 뭐냐고 물어볼 틈조차 없었다. “사실 나, 벌레로 변하고 있어.” 그의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이스마엘도 따라 웃었지만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내 어금니 위에 자라난 게 그냥 살이 아니야. 정말이야.”
<토끼들의 섬>
복잡한 도시를 떠나 작은 무인도에 정착한 ‘가짜 발명가’.
섬에 들끓는 새를 없애기 위해 빨간 눈의 토끼를 풀어놓는다.

<스트리크닌>
좁은 골목으로 이어진 아랍의 한 도시. 어느 여인의 귀에서 발이 돋아난다.
여인은 귀를 가릴 만한 히잡을 사기 위해 시장에 나선다.

<헤라르도의 편지>
이별을 앞둔 연인이 외딴 마을로 여행을 떠난다.
음산한 숙소와 이상한 주인, 말라빠진 음식과 벌레가 들러붙은 욕실이 그들을 기다린다.

<역행>
타마라는 자기 할머니가 도시 최고의 요리사라고 으스댔다.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천장에 떠 있는 바로 저 할머니가.

<파리 근교>
파리에 더 머물기 위해 장학금을 연장해야 하는 유학생.
복지센터가 있는 근교로 향하지만, 거리와 건물이 미로처럼 펼쳐지며 길을 방해한다.

<미오트라구스>
구운 고기 요리를 먹던 손님이 웨이터에게 항의한다.
평생 새끼 염소를 먹어왔지만, 이 고기는 절대로 염소가 아니라는 것.

<지옥의 건축학을 위한 기록>
정신병을 앓고 있는 큰형은 언제나 도시가 악마의 지배를 받는다고 말했다.
건축학도인 ‘나’는 큰형의 말대로 악마의 관점에서 도시를 바라보고자 결심한다.

<꼭대기 방>
밤마다 호텔 옆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이상하다. 분명 꼭대기 층에 방은 하나뿐이라고 했는데.

<비망록>
어느 날, 주인을 알 수 없는 페이스북 계정에서 친구 신청 쪽지가 왔다.
그 계정에 세상을 떠난 엄마와 ‘나’만이 알고 있는 이야기가 하나둘 올라오기 시작한다.

<잇몸>
신혼여행지에서 어느 날 밤, 이스마엘이 돌연 자신이 벌레로 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입에서는 실로 구역질 나는 악취가 풍겨 나왔다.

<점술가>
“타로점을 봐드리겠습니다.” 휴대전화에 점술가의 광고 메시지가 계속해서 도착한다.
그저 우연으로 치부하기에 메시지는 여자의 상황과 놀랍게 맞아떨어진다.
 
작가이미지
저자 엘비라 나바로 (Elvira Navarro)
1978년 스페인 우엘바에서 태어나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2007년 십대 소녀 ‘클라라’의 성장통을 그린 《겨울의 도시La ciudad en invierno》를 발표하며 데뷔했고, 기존 성장소설의 틀을 파격적으로 깨뜨렸다는 평을 받으며 같은 해 프낙 신인작가상을 수상했다. 2009년 스페인으로 이민 온 중국인 어머니와 아들의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운 《행복한 도시La ciudad feliz》를 선보였다. 이 작품은 하엔 소설상과 토르멘타엔운바소 신인작가상을 수상했으며, 일간지 <푸블리코>에서 뽑은 ‘올해의 소설’에 선정되었다. 2010년에는 영국 문예지 <그랜타>에서 선정한 ‘35세 이하 최고의 스페인어권 작가 22인’에 오르는 등 스페인 문학을 이끌어갈 차세대 젊은 작가로 공고히 자리매김했다. 이외에도 《일하는 여성La trabajadora》 《아델라이다 가르시아 모랄레스의 마지막 나날Los últimos días de Adelaida García Morales》 《아드리아나의 목소리Las voces de Adriana》 등을 출간하며 활발히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다.

2019년 발표한 《토끼들의 섬》은 환상과 현실, 과거와 현재, 도시와 변두리, 기억과 기록 등 경계와 틈새를 넘나드는 소설집. 새가 들끓는 섬에 눈처럼 새하얀 토끼를 풀어놓으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표제작 <토끼들의 섬>, 귀에서 발이 돋아나는 어느 여성의 나날을 기록한 <스트리크닌> 등 초현실적이고 기묘한 이미지가 넘실거리는 11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출간 직후 안달루시아 비평가상 단편소설부문을 수상했으며 스페인 최고 유력지 <엘파이스>의 ‘올해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2021년에는 “프란츠 카프카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문학적 성취를 이어받아 유럽 사회가 당면한 불안을 이야기하는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전미도서상 번역문학부문 후보에 올랐다.


스페인 문학의 새로운 미래
엘비라 나바로가 선보이는 11편의 환상과 악몽
프낙 신인작가상, 하엔 소설상, 토르멘타엔운바소 신인작가상 등 저명한 문학상을 연이어 수상하며 스페인 문학계에 돌풍을 일으킨 엘비라 나바로. 발표 직후 “카프카와 보르헤스의 문학적 성취를 이어받은 걸작” “에드거 앨런 포와 니콜라이 고골이 공존하는 듯한 작품”이라 찬사받은 그의 대표작 《토끼들의 섬》이 출간되었다. 환상과 현실, 과거와 현재, 도시와 변두리, 기억과 기록 등 경계와 틈새를 넘나드는 열한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새가 우글거리는 섬에 던져진 빨간 눈의 토끼, 역겨운 피 냄새로 가득한 아랍의 좁은 골목, 존재할 수 없는 공간에서 들려오는 귀를 찢는 굉음 등 잔혹하면서 매혹적인 이미지가 오감을 일깨우는 가운데, 허구와 실재가 뒤섞인 몽롱한 서술이 섬찟한 꿈을 꾸는 듯한 긴장감을 선사한다. 텍스트가 선사하는 상상력의 향연을 만끽하며, 독자의 머릿속에서 비로소 완성되는 환상과 악몽의 세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2019년 출간 직후 안달루시아 비평가상 단편소설부문을 수상하고 스페인어권 최고 권위의 리베라델두에로 단편소설상 후보에 올랐으며, 2021년에는 전미도서상 번역문학부문 후보에 선정되며 젊은 거장의 탄생을 세계에 알렸다.
 
“외곽, 변두리, 경계… 내 관심사는 언제나
현실을 결정짓는 윤곽이 희미해지는 틈새에 있다.” _엘비라 나바로
《토끼들의 섬》에 수록된 열한 편의 이야기는 작중 배경, 초점 화자, 주제 의식 등 모든 면을 달리하지만, 초현실적 세계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꿰어진다. <헤라르도의 편지>에는 은근한 폭력을 행사하는 남자친구와 이별을 결심한 여자친구가 등장한다. 남자친구를 향한 공포는 교외 여행지에서 마주한 음험한 숙소, 기괴한 주인, 이상한 숙박객 무리처럼 평범한 일상에서 마주할 수 없는, 현실의 언저리에서 끓어오르다가 사라지는 유령 같은 존재로 구현된다. <꼭대기 방>의 젊은 여성은 거주비 절약을 위해 자신이 근무하는 호텔 꼭대기 방에 기거한다. 여성에게 주어진 열악한 노동 환경과 그로 인한 심리적 불안은 꿈속으로 침범해오는 타인의 꿈이라는 환상적 기제로 표현된다. 스페인 발레아레스 제도를 배경으로 실제 역사와 허구를 혼합한 <미오트라구스>에는 뒤틀린 자의식으로 ‘여자아이 사냥’이라는 끔찍한 놀이를 하는 대공이 등장하는데, 소설은 멸종 동물 ‘미오트라구스’의 책임을 대공에게 묻는 듯한 고발적 시선을 담아내며 가난한 어린 여성을 착취하는 부유한 성인 남성과, 환경을 착취하는 인간의 탐욕을 대구를 이루어 보여준다.
 
기이하고 불편한 세계를 통해 엘비라 나바로는 젠더, 공간, 계층, 환경, 역사 등에서 거칠게 이분된 관념을 전복하고 무화할 수 있는 지점을 탐구한다. 남성 대 여성, 도시 대 변두리, 자본가 대 노동자, 자연 개발 대 환경 보호, 기록된 정사 대 기록되지 못한 미시 서사 등에서 뒤편으로 밀려난 문제에 관심을 두는 것. 이처럼 소외되거나 외면받거나 무시되어온 대상을 서사의 중심 요소로 삼는 행위는 현실의 질서를 전복하고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려는 시도다. 환상의 표피를 덧입혀 현실을 재구성하는 일은 결국 더 나은 현실을 꿈꾸는 일일 터. 불문에 부쳐온 절망, 공포, 소외를 이야기해온 엘비라 나바로의 소설을 지금 여기의 우리가 읽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