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나 당신이랑 있고 싶어요. 당신 세상, 당신 집에서.”
뉴욕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순도 높은 로맨스
홀로 참석한 크리스마스 파티, 나를 초대한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아무와도 대화하고 싶지 않아 크리스마스트리 뒤편으로 숨어든다. 그리고 그곳에서 ‘클라라’라는 여자와 마주친다. “나는 클라라예요.” 클라라는 나를 이끌고 테라스로 나간다. 함께 뉴욕의 밤 풍경을 본다. 나는 클라라의 세상에 초대받은 기분이다. 그 후 일주일간 매일 밤 클라라를 만나 뉴욕을 거닌다. 연말 주간, 마침 프랑스 영화감독 에릭 로메르 영화제가 열리고 있다. 나는 클라라와 영화를 보고 술을 마신다. 함께 본 영화에 관해 이야기하고 음악을 듣는다. 클라라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눈이 소복이 쌓인 길을 걸어 홀로 돌아간다. 그리고 밤마다 클라라에 대해 생각한다. 이튿날 만나서도 클라라가 설렘을 간직하고 있기를, 자신 역시 그러기를 바라면서.
《여덟 밤》은 사랑의 시작점을 그리지만, 특별히 많은 사건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소설 속 두 사람은 함께 영화를 보고 예술에 관해 논하며 각자 살아온 삶과 떠나보낸 사랑에 대해 털어놓을 뿐이다. ‘가장 우아하며 관능적인 문장을 쓰는 작가’라는 찬사에 걸맞게 안드레 애치먼은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의 감정, 입 밖으로 내놓지 못하고 마음속을 휘도는 어지러운 생각을 더없이 섬세한 문장으로 재구성한다. 군중 속 일부에 불과했던 타인이 단 하나뿐인 존재로 다가오는 순간, 그 사람을 향한 목마른 갈망, 놓칠지 모른다는 불안……. 소설 속 ‘나’는 사랑에 빠져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었을 감정으로 열병을 앓는다. 보편적 감정을 고백적이고 내면적인 문체로 담아, 《여덟 밤》은 두 인물이 만나 점점 가까워지는 여덟 밤 동안 독자가 함께 슬퍼하고 기뻐하게 한다.
서로 갈망하지만 다가가지 못하는 사람들
클래식한 기법으로 빚어낸 가장 우아한 연애소설
안드레 애치먼은 〈롱리즈〉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소설 속 인물들을 ‘서로 사랑에 빠졌으나 선뜻 행동에 나서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한다. 한쪽이 다가서려 하면 다른 한쪽이 한 걸음 물러선다. 그들은 사랑하기에 준비되지 않아 보인다. 미성년의 어설프고 달뜬 첫사랑을 담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대학생의 불안과 찬란한 여름날을 그린 《하버드 스퀘어》에 이어 《여덟 밤》은 성숙한 나이에 접어들어 오히려 조심스러운 이십대 후반의 겨울날을 펼쳐 보여준다. 《여덟 밤》에서 인물들은 과거의 상처, 같은 실수를 할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함부로 사랑을 시작하지 못한다. 그렇게 여덟 번의 밤을 건너는 동안 어느 순간 사랑이 점화되고, 안드레 애치먼은 붕 떠오르듯 불안하면서 황홀한 감정을 산문시처럼 풀어놓는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하버드 스퀘어》 등 전작에서도 드러나듯 안드레 애치먼은 소설 속에서 클래식 음악, 미술, 흑백영화 등 고전적 예술을 키워드로 활용한다. 《여덟 밤》에서 인물들은 매일 에릭 로메르 영화를 관람하는데, 소설 자체의 장면과 대사도 그 영화들을 모티프로 삼아 창의적으로 오마주한다. 또한, ‘Eight White Nights’라는 원제에서 암시되었듯 도스토옙스키의 〈백야〉를 연상시키는 구성과 문체, 서술 방식은 《여덟 밤》에 고전문학과 궤를 함께하는 고아한 면모를 갖추어준다. 파티에서 만난 두 사람, 휴대전화를 붙들고 메시지를 보낼지 말지 고민하는 순간……. 《여덟 밤》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현대의 사랑을 고전적 기법으로 그려내면서 전에 본 적 없는 깊고 우아한 연애소설을 완성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