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밤
안녕, 나 오늘 밤 혼자 있고 싶지 않아요. 나 당신이랑 있고 싶어요. 그리고 당신 친구들이랑. 당신 세상. 당신 집에서. 그리고 모두가 간 다음에도 머물고 싶어요. 당신처럼, 당신으로, 당신과 함께 있고 싶어요.
여덟 밤 안드레 애치먼 저자 백지민 역자
  • 2024년 06월 25일
  • 768쪽131X204mm비채
  • 978-89-349-1639-0 03840
여덟 밤
여덟 밤 저자 안드레 애치먼 2024.06.25
“사랑받고 싶어. 우리의 세상에는 마법이 부족하니까.”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안드레 애치먼 신작 장편소설
사랑을 정면으로 다루는 작가는 생각보다 귀하다.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영화로도 만들어진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이후, 안드레 애치먼은 ‘첫사랑의 마스터피스’라는 수식어를 얻으며 운명적 만남과 사랑을 그려왔다. 비채에서 출간되는 신작 장편소설 《여덟 밤》 역시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이십대 남녀가 우연히 만나며 시작된다.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파티, 누구와도 말을 섞기 싫어 숨어든 크리스마스트리 뒤편, 그곳에서 마주친 두 사람. 그 후 일주일간 두 사람은 매일 밤 뉴욕을 거닐며 가까워진다. 《여덟 밤》은 격렬하거나 소란스러운 사건을 보여주는 대신,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내면을 현미경 들여다보듯 탐구한다. 안드레 애치먼 특유의 섬세한 문장이 켜켜이 엮이며 전에 본 적 없는 우아한 연애소설로 완성되었다.
P.188
안녕, 나 오늘 밤 혼자 있고 싶지 않아요. 나 당신이랑 있고 싶어요. 그리고 당신 친구들이랑. 당신 세상. 당신 집에서. 그리고 모두가 간 다음에도 머물고 싶어요. 당신처럼, 당신으로, 당신과 함께 있고 싶어요. 당신이 은신하고 있다고 할지언정, 내가 은신해 있듯이, 한스가 은신해 있듯이, 베릴과 롤로와 잉키와 이 도시의 다른 모든 이가 산 자든 죽은 자든 난파된 채, 하자가 있는 채, 원하는 채 은신, 은신, 은신해 있듯이, 당신과 단둘이서만 있어서 끝내 내가 당신 냄새가 나고, 당신처럼 생각하고, 당신처럼 말하고, 당신처럼 숨 쉬게 되고 싶어요.
나처럼 숨 쉰다고요? 진심이에요?
제가 분위기에 휩쓸렸네요.
길 한복판에서 나는 다시금 올려다보았고 너무도 많은 사람이 위층의 서리가 낀 유리창에 등을 기대면서 파티를 하는 실루엣을 알아보았다. 모두가 팔꿈치를 쭉 뻗고 있으니 각자들 손에 와인잔과 접시를 들고 있다는 뜻이었다.
P.396
“그녀의 뭐가 좋았는데요?”
“한동안은 모든 게요.”
“그러다가는요?”
“나는 그녀를 사랑하기를 멈췄어요. 멈추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어요.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걸 넘어 나는 그녀에게 귀 기울이고 싶지 않기 시작했고, 그러다 그녀를 만지고 싶지 않기 시작했어요. 그녀의 웃음소리나 그녀가 집에 올 때 열쇠가 달가닥거리는 소리, 그녀가 한밤중에 깨어나 담배 한 대 피우러 거실로 들어가서 내가 불을 켜면 거슬린다고 했기 때문에 그녀가 거기 어둠 속에 앉아 있을 때의 슬리퍼 소리, 그녀가 침대로 돌아온다는 걸 뜻하던 텔레비전을 껐을 때 그 딸깍 소리에 이르기까지 싫어하기 시작했어요. 그건 끔찍했어요. 내가 끔찍했어요. 그래서 내가 그녀를 떠났어요.”
P.523
그러더니 그녀는 한 번도 하지 않은 일을 했다. 그녀는 내 손을 가져가서 자기 뺨에 두었다. “좀 낫네요.” 그녀는 말했다. 마치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혹은 사이를 회복하려는 친구에게 말하는 듯한 말투로. 나는 내 손이 그녀의 뺨에 닿게 두었다. 그러다가 그녀의 목을, 귀 바로 밑을, 그녀가 몇 시간 전 영화관에 왔을 때 내가 열렬히 키스한 곳을, 순간의 열기에 휩싸여 그녀가 대비하지 못한 채 허점을 찔렸을 것이 틀림없는 정확히 그곳을 어루만졌다.
P.746
어머니는 일어나서 피스타치오로 그릇을 채우는데, 딱 봐도 나더러 먹으라는 거다. 그녀는 껍질을 버리라고 또 다른 그릇도 가져온다.
“두 분한테 있었던 게 뭐길래 그렇게 특별했던 거예요?” 나는 끝내 묻는다.
“우리한테는 진짜배기가 있었어. 아니면 진짜배기에 가장 근접한 것이, 어쩌면 그보다도 나은 것이.”
“그래서 그게 뭔데요?”
그녀는 한순간 뜸을 들이더니만 미소를 짓는다.
“웃음. 우리한테 있었던 건 그거야.”
“웃음요?” 내가 완전히 당황해서 묻는다.
“누가 알았겠어. 근데 그건 웃음이었어. 지금 당장은 우리는 오래된 농담을 주워 먹고 있어. 몇 달 있으면 그게 케케묵었다고 깨닫게 되겠지. 하지만 같은 방에 있으면 우리는 웃기 시작한다니까.”
'목차'는 준비 중입니다.
작가이미지
저자 안드레 애치먼

1951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프랑스어를 쓰는 유대인 부모 밑에서 이탈리아어, 그리스어, 아랍어 등 다양한 언어를 접하며 성장했다. 1965년, 반유대주의를 비롯한 정치적 문제로 이집트를 떠났고 로마를 거쳐 뉴욕에 정착했다.

 

1995년 이집트에서의 어린 시절과 고국에서 추방된 후의 성찰을 담은 회고록 《아웃 오브 이집트》를 발표, 화이팅어워드 논픽션 부문을 수상하며 성공적으로 데뷔했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작가가 된 것에 대해 애치먼은 잠복기가 길었을 뿐이라며, 자신에게 글쓰기는 직업이 아니라 사명이라 밝히기도 했다. 2007년 발표한 첫 소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람다 문학상을 수상한 것은 물론 영화로도 만들어져 널리 사랑받았다. 《여덟 밤Eight White Nights》 《파인드 미》 등의 장편소설과 연작소설집 《수수께끼 변주곡》, 논픽션 《폴스 페이퍼False Papers》 《알리바이》 등을 출간하며 전방위적인 작품 활동을 이어가는 한편, 뉴욕시립대학교에서 마르셀 프루스트 과목을 맡아 강의하고 있다.

“안녕, 나 당신이랑 있고 싶어요. 당신 세상, 당신 집에서.”
뉴욕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순도 높은 로맨스
홀로 참석한 크리스마스 파티, 나를 초대한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아무와도 대화하고 싶지 않아 크리스마스트리 뒤편으로 숨어든다. 그리고 그곳에서 ‘클라라’라는 여자와 마주친다. “나는 클라라예요.” 클라라는 나를 이끌고 테라스로 나간다. 함께 뉴욕의 밤 풍경을 본다. 나는 클라라의 세상에 초대받은 기분이다. 그 후 일주일간 매일 밤 클라라를 만나 뉴욕을 거닌다. 연말 주간, 마침 프랑스 영화감독 에릭 로메르 영화제가 열리고 있다. 나는 클라라와 영화를 보고 술을 마신다. 함께 본 영화에 관해 이야기하고 음악을 듣는다. 클라라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눈이 소복이 쌓인 길을 걸어 홀로 돌아간다. 그리고 밤마다 클라라에 대해 생각한다. 이튿날 만나서도 클라라가 설렘을 간직하고 있기를, 자신 역시 그러기를 바라면서.
 
《여덟 밤》은 사랑의 시작점을 그리지만, 특별히 많은 사건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소설 속 두 사람은 함께 영화를 보고 예술에 관해 논하며 각자 살아온 삶과 떠나보낸 사랑에 대해 털어놓을 뿐이다. ‘가장 우아하며 관능적인 문장을 쓰는 작가’라는 찬사에 걸맞게 안드레 애치먼은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의 감정, 입 밖으로 내놓지 못하고 마음속을 휘도는 어지러운 생각을 더없이 섬세한 문장으로 재구성한다. 군중 속 일부에 불과했던 타인이 단 하나뿐인 존재로 다가오는 순간, 그 사람을 향한 목마른 갈망, 놓칠지 모른다는 불안……. 소설 속 ‘나’는 사랑에 빠져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었을 감정으로 열병을 앓는다. 보편적 감정을 고백적이고 내면적인 문체로 담아, 《여덟 밤》은 두 인물이 만나 점점 가까워지는 여덟 밤 동안 독자가 함께 슬퍼하고 기뻐하게 한다.
 
서로 갈망하지만 다가가지 못하는 사람들
클래식한 기법으로 빚어낸 가장 우아한 연애소설
안드레 애치먼은 〈롱리즈〉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소설 속 인물들을 ‘서로 사랑에 빠졌으나 선뜻 행동에 나서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한다. 한쪽이 다가서려 하면 다른 한쪽이 한 걸음 물러선다. 그들은 사랑하기에 준비되지 않아 보인다. 미성년의 어설프고 달뜬 첫사랑을 담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대학생의 불안과 찬란한 여름날을 그린 《하버드 스퀘어》에 이어 《여덟 밤》은 성숙한 나이에 접어들어 오히려 조심스러운 이십대 후반의 겨울날을 펼쳐 보여준다. 《여덟 밤》에서 인물들은 과거의 상처, 같은 실수를 할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함부로 사랑을 시작하지 못한다. 그렇게 여덟 번의 밤을 건너는 동안 어느 순간 사랑이 점화되고, 안드레 애치먼은 붕 떠오르듯 불안하면서 황홀한 감정을 산문시처럼 풀어놓는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하버드 스퀘어》 등 전작에서도 드러나듯 안드레 애치먼은 소설 속에서 클래식 음악, 미술, 흑백영화 등 고전적 예술을 키워드로 활용한다. 《여덟 밤》에서 인물들은 매일 에릭 로메르 영화를 관람하는데, 소설 자체의 장면과 대사도 그 영화들을 모티프로 삼아 창의적으로 오마주한다. 또한, ‘Eight White Nights’라는 원제에서 암시되었듯 도스토옙스키의 〈백야〉를 연상시키는 구성과 문체, 서술 방식은 《여덟 밤》에 고전문학과 궤를 함께하는 고아한 면모를 갖추어준다. 파티에서 만난 두 사람, 휴대전화를 붙들고 메시지를 보낼지 말지 고민하는 순간……. 《여덟 밤》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현대의 사랑을 고전적 기법으로 그려내면서 전에 본 적 없는 깊고 우아한 연애소설을 완성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