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름다운 그림과 함께 다시 태어난, 일본을 대표하는 동화작가 ‘미야자와 겐지’의 단편선.
*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 등 수많은 예술가와 작품의 영감이 된 불멸의 명작들 수록.
* 자연을 노래하고 삶과 죽음, 진정한 행복을 고민한 맑고 투명한 이야기.
* “찬찬히 읽고, 소리 내서 읽고, 며칠 뒤에 다시 읽고, 몇 년이 지난 후에 또다시 읽을 이야기들. _미야자키 하야오(《책으로 가는 문》에서)”
‘자연을 사랑한 문학가’, ‘철학을 품은 동화작가’, ‘아름다움과 슬픔을 아우르는 시인’ 등 수많은 수식어로 설명되는 미야자와 겐지(1896~1933). 동화작가로서는 유일하게 일본이 사랑하는 문학가 10인으로 꼽히는 ‘미야자와 겐지’의 단편 동화집이 주니어김영사에서 출간되었다. 이 세상을 떠난 이들의 슬프고 환상적인 여정을 담은 표제작 〈은하철도의 밤〉을 포함해 삶과 죽음, 동물과 인간, 자연과 문명 세태를 다룬 유의미한 단편 15편을 엄선하여 수록한 작품집이다. 다정한 시선으로 바라본 자연의 풍경, 시기와 질투, 갈등이 그치지 않는 현실 세태, 이 모든 것을 수려하고 단정한 말투로 그려 낸 미야자와 겐지의 깊은 문학 세계를 만나볼 수 있다.
그때 어디선가 “은하 역, 은하 역”이라고 하는 신비한 음성이 들리는가 싶더니 돌연 눈앞이 환하게 밝아졌습니다. (중략)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까부터 조반니를 태운 작은 열차가 덜컹덜컹 덜컹덜컹 달리고 있었습니다. _〈은하철도의 밤〉에서
조반니는 오랫동안 부재중인 아버지를 대신해서 아픈 어머니를 보살피고 집안을 이끌어 가는 소년 가장과 다름없는 아이이다. 낮에는 학교에 가고 수업이 끝나면 인쇄소에서 활자 고르는 일을 하며 집안 형편에 보탬이 되려고 애쓰지만, 아버지 없는 아이를 향한 놀림은 가혹하고 쉴 틈 없는 삶은 고단하기만 하다. 은하 축제가 열리는 날 밤, 조반니는 배달 오지 않은 우유를 가지러 갔다가 자신을 놀리는 친구들을 피해 목장 뒤 검은 언덕에 오른다.
어둠을 밝히는 마을의 불빛, 그 속에서 왁자지껄 울리는 노랫소리와 즐거운 탄성들은 조반니로서는 섞여들 수 없는 환상이나 마찬가지이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쓸쓸함을 느끼며 멍하니 별하늘만 바라보던 조반니가 갑자기 눈앞이 아득해짐을 느낀 순간, 자신이 덜컹거리는 야간열차에 올라타 있음을 알아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함께 탄 친구 캄파넬라와 함께 은하수를 따라 북십자성, 백조자리, 쌍둥이자리, 전갈자리 등 하늘의 별자리 사이를 여행한다.
“내가 하늘의 들판 한가운데에 왔어.” (중략) 덜컹덜컹 덜컹덜컹. 작고 아름다운 열차는 하늘 억새가 바람에 나부끼는 곳, 은하수와 삼각점이 푸르스름하고 은은하게 빛나는 시공간 속을 어디까지고 하염없이 달려 나갔습니다. _〈은하철도의 밤〉에서
물에 젖은 듯한 검은 옷, ‘어머니가 자신의 행동을 용서해 주실지’ 걱정하는 말투, 조반니에게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보는 캄파넬라는 짐작되듯 이미 이 세상을 떠난 자이다. 어디든 갈 수 있는 차표를 지닌 조반니에게는 은하철도의 밤이 찰나의 꿈이었지만 열차에 탄 다른 이들은 모두 하늘나라로 향했을 것이다. 즉, 철로를 따라 흐르는 은하수는 이승과 저승 사이에 놓여 있다는 ‘강’, 사람들이 탄 은하철도는 강을 건너게 해 주는 ‘배’였을 것이다.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온 조반니는 어렴풋했던 캄파넬라의 죽음을 확실히 마주하고 슬픔에 잠기는 동시에, 아버지가 곧 돌아오실 거라는 소식에 기쁨을 느낀다. 그리고 그 소식을 어머니에게 전하러 힘을 내어 다시 달려 나간다.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옳은 일을 행하며 진정한 행복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저는 이 작은 이야기 조각들이 마침내 당신의 맑고 진정한 양식이 되기를 바라 마지않습니다.”
37년의 짧은 생, 그리고 나와 너, 우리와 우주가 펜 끝에서 흘러나와 꾸려진 이야기 타래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들은 그의 삶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어린 시절부터 꾸준했던 자연과 생물을 향한 관심, 고등학생 때 크게 감명받았던 법화경과 불교 사상,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제국주의가 만연했던 시기의 세태, 친밀했던 여동생을 떠나보낸 후 깨달은 삶과 죽음의 의미 등 작가가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이 그만의 언어로 작품 속에 녹아들어 있다.
- 차가운 계곡 밑으로 푸른 라무네(일본의 탄산음료로 레모네이드가 와전된 이름_옮긴이)병 색깔의 달빛이 가득 비쳐 들었습니다. 천장에서는 물결이 희푸른 불을 껐다 피웠다 하는 듯했고 사방은 고요하여 아주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물결 소리가 울릴 따름이었습니다. _〈돌배〉에서
- 오쓰벨은 얼굴이 잔뜩 주름지고 새빨개질 만큼 기뻐하며 말했어. 알겠지? 그렇게 코끼리는 오쓰벨의 재산이 된 거야. 두고 보라고. 오쓰벨은 흰 코끼리를 부려 먹든 서커스단에 팔아먹든 1만 엔 이상은 벌 테니까. _〈오쓰벨과 코끼리〉에서
- 삼나무 숲속 어디를 걸어도 가로수 길을 걷는 것만 같았습니다. 초록색 옷을 입은 삼나무도 가지런히 줄 맞춰 걷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아이들은 더할 나위 없이 기뻤습니다. 얼굴이 새빨개진 아이들은 때까치처럼 소리를 지르며 삼나무 대열 사이를 걸었습니다. _〈겐주 공원 숲〉에서
미야자와 겐지는 시집 〈봄과 아수라〉를 펴내며 ‘심상 스케치’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즉, 머리나 마음속에 떠오른 순간의 인상을 그림 그리듯 글로 풀어낸 것이다. 내린 눈이 꽁꽁 어는 달밤에 열린 환등회가 배경인 〈눈길 건너기〉, 아기 게들이 계곡 바닥에서 바라본 여름과 겨울의 모습을 담은 〈돌배〉,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열매가 후드득 떨어지는 가을의 정취가 느껴지는 〈은행나무 열매〉 등에서는 계절에 따른 고요하고 맑은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지며 작가 고유의 글쓰기 방식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한편 〈오쓰벨과 코끼리〉, 〈고양이 사무소〉, 〈쳇 쥐〉, 〈주문이 많은 요리점〉 등을 통해 자연을 경시하거나 서로를 배려할 줄 모르는 인간들의 모습을 풍자하면서도 〈겐주 공원 숲〉, 〈첼로 켜는 고슈〉, 〈나메토코산의 곰〉의 이야기로 자연과 인간이 서로를 존중하며 함께 어우러지는 세상을 꿈꾸기도 한다.
무엇보다 미야자와 겐지의 작품들에는 다른 생명을 소중히 하지 않았던 과거를 반성하고, 다른 이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도 좋다고 여기는 이타심과 희생정신이 눈에 띄게 도드라진다.
- 아아, 나는 매일 밤 장수풍뎅이와 수많은 날벌레를 죽이고 있구나. 그리고 이번에는 매가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나를 죽인다. 그것이 이토록 괴롭구나. _〈쏙독새의 별〉에서
- 부디 하루빨리 미워할 수 없는 적을 죽이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오게 해 주십시오. 그런 세상을 위해서라면 제 몸 같은 몇 갈래로 찢어져도 상관없습니다. _〈까마귀의 북두칠성〉에서
미야자와 겐지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가업을 이어받는 대신 불안정한 작가의 길을 택했다. 살아생전 400여 편의 시와 100여 편의 동화를 썼음에도 세상에 나온 책은 동화 《주문이 많은 요리점》과 시집 《봄과 아수라》 두 권뿐인 데다가 글을 써서 받은 돈도 5엔이 고작이었으니 그 고단한 삶을 짐작할 만하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농민들의 삶에 직접 뛰어들어 세계 대전, 자연재해, 경제 공황 등 나라 안팎으로 고통받는 소시민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직접 지켜보았고, 낮은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작은 것 하나에도 만족하고 온 마음을 기울이려고 노력했다. 죽는 순간까지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던 작가의 의지는 작품 속에 고스란히 남아 결국 그를 국민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았으며 후손들에게는 두고 두고 곱씹을 만한 명작을 남겨 주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우면서도 다행인 일이다.
고요하고 서정적인 그림으로 글의 멋을 살려 준 구사카 아키라의 삽화와 함께 미야자와 겐지가 《주문이 많은 요리점》 머리말에서 말한 것처럼 ‘숲과 들판과 철로에서, 무지개나 달빛에서 받아온’ 이 이야기 조각들이 독자들 각자에게 가닿아 ‘맑고 진정한 양식’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