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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교수의 역작, 《다산의 일기장》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

2024.12.23 #다산#기자간담회
수많은 저서를 펴낸 국학 연구의 대가 정민 교수,
신작 《다산의 일기장》을 선보이다!

2024년 12월 3일 오전 서울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진행된 기자간담회에서 오간 질문과 답변을 정리했습니다. 





김윤경 

안녕하세요. 김영사 김윤경입니다. 이렇게 추운 날 함께 해주신 기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개인적으로 오늘 같은 날이 올 줄 몰랐는데요. 정민 교수님은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고전학자로, 지금까지 80여 권의 저서와 역서를 내셨음에도 기자간담회는 처음 마련하는 것 같습니다. 우선 이 자리를 허락해 주신 교수님께 감사 말씀을 드립니다. 

교수님을 모시기 전에 저자 소개를 간략히 드리겠습니다. 정민 교수님의 크고 다채로운 궤적을 짧은 몇 문장으로 요약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학계는 물론 대중들에게 널리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인문학자로 저술하신 명저가 참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교수님은 조선 최고의 문장가 연암 박지원과 대학자 다산 정약용을 세상에 알린 연구자이십니다. 다산과 관련된 연구는 조선 후기 사회를 관통한 서학으로 이어집니다. 조선에 서학 열풍을 불러온 천주교 수양서 《칠극》을 번역해 소개하셨고, 한국 초기 교회사를 새로 쓴 역작 《서학, 조선을 관통하다》를 내셨습니다. 이 저작들은 서학 연구를 넘어서 18세기 조선의 정치·사회·문화사 연구의 지평을 넓힌 책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교수님의 연구와 저술에는 ‘최초’ 또는 ‘입체적 복원’, ‘독보적 저작’이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이번에 출간한 신작 《다산의 일기장》도 우리가 아는 위대한 실학자 다산이 아닌 서학 문제로 절박하고 아슬아슬했던 30대 다산의 내면과 그 시대를 입체적으로 복원한 역작입니다. 이 부분은 보는 시각에 따라 논쟁적일 수 있으나, 그럼에도 정면 돌파하겠다고 서문에 쓰셨습니다. 지금부터 정민 교수님께 이 책의 집필 배경과 과정, 주요 메시지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우선 교수님께서 인사 말씀 부탁드립니다.


정민 

반갑습니다. 이렇게 귀한 걸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번에 《다산의 일기장》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새로 쓰게 됐습니다. 제가 2006년에 《다산 선생 지식 경영법》을 김영사에서 펴내면서 본격적으로 다산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기 때문에, 올해로 20년 가까이 다산에 몰두해 왔습니다. 이 연구의 과정에서 정말 놀랐던 것은, 계속 새로운 자료가 튀어나오고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자료들이 현장을 가면 계속, 이제 (다산의) 후손가나 제자의 후손가나 이런 쪽에서 끊임없이 계속 나와서, 그동안 문집을 통해서만 연구되었던, 밝혀지지 않았던 이면들이 계속 저한테 포착이 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자료가 자료를 부르고 해석이 해석을 낳으면서 제가 알고 있던 다산에 대한 생각도 여러 번 바뀌게 되고, 잘 드러나지 않던 진실들이 계속 조금씩 벗겨지는 느낌이 들어서 그것과 관련된 작업을 계속해 왔습니다.
처음에는 강진 시절의 다산에 몰두를 하다가, 최근 들어서는 젊은 시절에 다산을 눈길을 주면서 천주교 문제가 전경화가 되고 이 문제가 우리 조선 후기 지성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이 문제에 관한 모든 문서가 거의 검열을 거친 상태로 남아있습니다. 다산의 문집도 다 검열이 되어 있고 관련 기록들도 검열이 되어 있기 때문에 이 검열의 행간에 대한 면밀한 독법을 통해서만 그 시대의 진실에 조금 더 다가갈 수 있고 다산의 진심에 조금 더 접근할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됐고 그것이 이번 책에서 집중해서 밝히고 싶었던 내용입니다.


김윤경

교수님 말씀에 이어서 책 소개를 부탁드리려고 합니다.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여러 저술을 통해서 다산의 다사다난한 삶을 되살려 오셨는데요. 이번 신간 《다산의 일기장》도 역시 퍼즐을 맞추듯 100개의 질문과 100개의 답을 통해 다산 정약용이 30대에 쓴 4편의 일기의 행간에 감춘 진실을 찾아 탐구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 일기들은 유난히 독해가 어려워 처음 존재가 알려진 1974년 이후 반세기 동안 학계에서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교수님께 이번에 출간하신 《다산의 일기장》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 부탁드리겠습니다.


정민 

일기는 사실은 전체 번역을 하면 한 300매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몇 월 며칠 몇 리를 가서 어디서 잤다', '누구와 만났다', '누가 편지를 보냈는데 내용은 이렇다', 아주 무미건조한 팩트의 나열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제가 2019년에 다산의 젊은 시절을 다룬 《파란》이라는 두 권 분량의 책을 간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전에는 강진 시절의 다산만 연구했는데요. 젊은 시절의 다산을 보면서 생각이 참 많아졌습니다. 

그 시절의 기록들이 전부 검열을 거친 기록들이라 읽어보면 뭔가 여운이 남는 기록들이 많아요. ‘이건 뭔가 있다, 분명히 뭔가 있다.’ 그런데 터치가 되어 있는 그런 기록들이었죠. 그래서 그 행간을 하나하나, 다른 기록하고 퍼즐을 맞춰보면 ‘뭔가 좀 이상하다.’ 하는 것은 전부 천주교와 관련된 부분이었던 거죠. 그래서 이 문맥을 정확하게 채워 놓지 않으면 다산의 정체성과 관련된 논란들이 계속 겉돌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국학계에서는 다산이 한때 천주교에 미쳤지만 자기 손으로 털고 나왔으니까 이 이상 다산을 천주교와 엮으려는 시도는 불순한 의도로 받아들이겠다, 그리고 만일 이걸 그런 식으로 끌고 간다는 것은 다산의 국학에 대한 모독이다. 이런 식의 시선을 가지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다산의 순수성과 다산의 국학자로서의, 실학자로서의 정체성을 천주교가 훼손한다고 생각을 하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일종의 불경죄 비슷한 분위기가 있습니다. 저는 제가 이런 진실을 밝히면 천주교계에서는 좀 좋아할 줄 알았는데, 그쪽에서는 또 다산은 배교자니까 성인이 될 수도 없고 복자가 될 수도 없어요. 그렇다고 해서 다산의 삶의 질량 속에서 천주교의 문제가 그렇게 가볍게 처리할 수 있는 부분이 절대로 아닌데 (천주교계에서는) ‘배교자니까 관심 없다’라고 말하고 저쪽(국학계)에서는 이렇게 ‘배교했으니까 터치하지 마라’ 이렇게 해버리면 그 중간의 진실은 전부 사라져 버리게 되는 거죠.

그런데 조선 후기 사회가 서학을 처음 만났을 때, 조선 후기의 지식인들이 서학의 문제와 만났을 때 어떤 앙금을 남기고 어떤 파장을 일으켰느냐의 문제를 면밀하게 보는데 다산만큼 중요한 케이스가 없습니다. 이것이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고 논쟁을 야기시켰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서 좀 더 면밀하게 검토를 해야 하는데, 양측에서 다 관심 없거나 건드리지 말라고 이야기를 해버리면 이거는 진실이 묻혀버리게 되죠. 그래서 자꾸 제 작업의 의도를 가지고 ‘네가 천주교 신자라 다산을 천주교 신자로 만들고 싶어서 그러니?’ 이런 식의 시각은 저는 굉장히 폭력적인 시각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제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고 사실을 읽다가 해명되지 않는 부분을 들여다보니까 보이지 않던 진실들이 자꾸 드러나니까, 그 부분에 집중해 왔던 것입니다. 

다산이 쓴 여러 가지 글들은 대부분 자기 검열을 거친 글들이기 때문에, 불리한 것은 다 지워버리고 유리한 것은 확대 과장을 해서 쓴 글입니다. 그러니까 그 글을 가지고 '다산의 말을 안 믿고 왜 엉뚱한 악의를 가진 나쁜 놈들의 말을 믿고 다산을 평가하느냐?' 이런 식의 시각은 좀 곤란하죠. 은폐와 과장 속에서 뭔가 중간 지점의 진실에 접근하고 찾아내야지 그 시대의 진실이 나온다는 것이죠.

또 문제가 뭐냐 하면, 천주교에 관한 여러 가지 행보에서 다산의 말이나 행동들이 계속 자기모순의 파열음을 일으킵니다. 자기는 분명히 배교를 했다고 하는데 사실 주문모 신부를 도망시킨 장본인이 다산이거든요. 그것도 잘 안 밝혀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정조가 다산을 금정찰방으로 내려보내면서 “너 천주교하고 손절할 기회를 주겠다, 그러니까 이번 기회에 네가 확실하게 너의 적들에게 니가 천주교하고 손을 끊었다는 것을 입증하고 오너라. 그럼 내가 너를 깨끗하게 씻겨 가지고 다시 쓰겠다.” 이거였거든요.

다산이 내려간 금정찰방이 어디냐 하면 바로 채제공 고향집 바로 옆 옆 동네예요. 걸어서도 한 시간도 안 걸리는 그런 거립니다. 채제공이 나고 자란 곳 바로 옆에다가 뒀는데, 거기가 천주교 소굴이었거든요. 다산이 거기 내려가 있는 동안 채제공의 사촌도 찾아오고 칠촌도 찾아오고 계속 도움을 줍니다. 채제공의 오더를 받은 행동이죠. 그러니까 이런 것들이 왜 그랬냐 하면, 정조의 입장에서는 노론 벽파들의 대항마로 그 당시 남인의 채제공 그룹을 계속 올리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이 대항마를 올리는데 이들의 핵심 참모들, 이가환, 정약용 이런 그룹들에서 계속 천주교 문제가 파열음을 일으키고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정조의 입장에서는 채제공의 오른팔 왼팔을 자르지 않으면서 그 시스템을 밀고 자기의 정국 구도를 끌고 가야 하는데, 얘들이 자꾸 문제를 일으키니까 이거(천주교)를 깨끗하게 손절시켜 놓고 그 팀을 밀고 나가야 하는 상황이죠.

그런 상황에서 재기의 기회를 준 것이 그 시절의 이야긴데, 그러니까 다산은 정조의 뜻도 알고 남인의 위치도 알고, 그렇기 때문에 천주교를 배교했다는 대외적인 선언과 함께 그 안에서 천주교 박해에 관한 일련의 행동을 하는데 그 행동을 가만히 보면 시쳇말로 '짜고 치는 고스톱'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 당시 충청도 관찰사나 홍주 목사가 몇 년 동안 잡으려고 해도 못 잡은 천주교 신자를 다산이 가서 보름 만에 자수시켜요. 최고 지도자였던 이존창은 4년 동안 검거에 실패하고 있었는데, (다산이) 내려가는 날 첫날 수원에 도착했을 때, 조심태라는 수원 유수가 정조의 심복이었거든요. 이 사람이 ‘너 그거 가서 사람 잡고 하는 거 쉬운 거 아니야, 너무 심하게 하지 마’ 이렇게 말했을 정도로 잡기가 어려워서 홍주 목사도 못 잡고 충청도 관찰사도 못 잡아 애를 먹던 일인데, 그 최고의 지도자를 다산이 포졸을 하나 데리고 가서 그냥 잡아 와요. 잡아 오는데 잡아 온 게 아니고 거의 자수시킨 것과 똑같습니다. 다산은 ‘난 그것들(천주교) 싫어합니다. 완전히 손 끊었습니다’라고 언급하지만, 그쪽의 어떤 커넥션이 계속 작동하고 있는 흔적들이 보이거든요. 근데 금정역에서 검거된 사람들은 바로 다짐장 받고 풀어줘요. 천주교 지도자들인데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자수하고 면죄부 받고 풀려나서 다시 신앙 활동을 합니다. 그러니까 아무도 손해 나는 게 아니에요. 다산은 천주교 검거에 공을 얻었고, 이 사람들은 배교하겠다고 해놓고 풀려나서 종교 활동을 계속 했고, 임금은 검거의 명분을 얻어서 이 석방의 명분을 줬으니까... 뭔가 석연치 않은 거죠.

정말 증오로 저것들을 죽여야 한다고 하는 게 아니고, ‘자수해 그러면 이렇게 할 테니까 ’ 뭐 그런 느낌을 계속 주는 거죠. 근데 이제 이런 것들이 다른 사람들의 기록, 반대파들의 기록에서도 계속 입증이 된다는 겁니다. 저 자식 저거 짜고 치는 고스톱인데 우리가 왜 그걸 받아주느냐 계속 이런 언급들이 끝없이 나오거든요. 그런 반복의 행간은 굉장히 좀 의미심장하게 좀 봐야 된다, 그냥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이 일기 속에 나오는 수많은 등장인물이 있는데 이걸 보면 그냥 지나가다 들러서 우연히 만난 것처럼 썼지만 이 사람들 찾아가지고 족보를 뒤져보면 전부 관련이 있어요. 너무나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절대로 허투루 찾아간 사람들이 없어요. 전부 자기한테 우호 세력을 만들기 위한 일종의 정략적 접근인 것이 명백하게 드러나거든요. 그러니까 그냥 지나가던 고을에 꽤 유명한 선비가 있다고 해서 만난 것처럼 일기에는 써 있지만, 그 수십 명의 사람이 전부 그런 행간과 맥락을 가지고 자기에게 유리한 입장을 만들기 위해서, 설득을 위해서 만난 사람들이거든요. 제가 처음 일기를 읽으면서 ‘이거 가지고 뭘 써?’ 이렇게 생각했다가, 족보 뒤지고 다른 관련 기록하고 문집을 찾아보고 했을 때 정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거는 정말 계속 뒤통수를 맞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하나만 좀 더 이야기하면, 다산이 그 시절에 썼던 저술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서암강학기》라는 책이고 또 하나는 《도산사숙록》이라는 책, 또 하나가 《자명소》(또는 《변방소》)입니다. 《서암강학기》는 뭐냐 하면 쉽게 말해서 그 당시 그 지역의 유생들을, 성호 학파들을 다 모아가지고 절에 봉곡사라는 절에 들어가서 9박 10일 동안 ‘성호 학술대회’를 연 겁니다. 성호의 책이 굉장히 어지러운 난필 상태였거든요. 어지러운 초고를 모아가지고 우리가 완전한 버전으로 편집하자는 것이었는데, 이걸 할 때 그 지역 사림들이 어마어마하게 반대를 했습니다. 

다산의 입장에서는 그 모임을 성사시켜서 성호 선생의 유저를 정리하는 책임을 자기가 맡았다는 명분을 갖는 게 중요했어요. 왜냐하면 성호의 본류로 내가 복귀했다는 것을 선언하는 아주 굉장히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 반서학의 입장에 있었던 성호 우파들이 "우리가 왜 그 자식 면죄부를 주는데 멍석을 깔아주느냐?" 해가지고, 성호의 종손이었던 이삼환이 그 당시 좌장이었거든요. 이 사람한테 가서 어마어마하게 항의를 합니다. 절대로 안 된다고. 일기 속에 그 격렬한 반대의 과정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서암강학기》는 겉으로 볼 때는 성호 본류로의 복귀를 선언하면서 성호의 유저를 정리한 대단한 작업처럼 보이지만 그 내용을 보면 실상은 반대를 무릅쓰고 어거지로 성사시킨 면죄부, 반성문 쓰기 작업에 불과했던 거죠.

《도산사숙록》은 ‘퇴계 선생으로 나는 돌아왔습니다. 퇴계 선생을 통해서 반성합니다.’ 해가지고 도산을 통해서 사숙을 해가지고 ‘천주교를 버리고 다시 유학으로 본류로 돌아옵니다’라고 말했던 그런 책이거든요. 그 퇴계의 편지를 한 토막 읽고 반성문 쓰고 퇴계의 편지를 한 토막 읽고 반성문을 쓴 책입니다. 매일 하나씩 썼어요. 그걸 《도산사숙록》이라고 썼는데 그 내용을 읽어보면 사실은 퇴계를 빌려서 자기 반성문 쓴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죠. 율곡이 젊었을 때 불교를 믿었는데 나중에 (퇴계를) 만났을 때 “제가 한때 불교에 빠졌지만 지금은 돌아왔어요.” 이렇게 말하는 대목이 나와요. 그러니까 그 대목을 싹 인용해 놓고 퇴계가 뭐라 그랬냐면 ‘얘는 한때 불교에 빠졌는데도 솔직하게 그거를 인정하고 반성해서 돌아왔으니까 이제는 이 사람한테는 죄가 없다 우리는 받아들여야 된다.’ 요 대목을 딱 인용해 놓고 ‘야, 퇴계가 이런 말을 해서 정말 대학자의 금도를 알 수 있다.’ 이렇게 짧게 써놓거든요. 그건 결국은 뭐냐 하면 나도 천주교를 한때 믿었는데 돌아왔으니까 퇴계식으로 말하면 “얘도 이제는 문제를 삼아서는 안 된다, 똑같이 받아들여 주십시오”라고 하는 자기 발언이거든요. 그러니까 “저 한때 문제 있었어요.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율곡처럼. 그러니 봐주세요. 예쁘게 봐주세요.” 그런 것이거든요. 

두 번째는 그겁니다. 《자명소》라는 건 자기 해명하는 상소입니다. 근데 이게 1797년에 발표가 되는데 쓴 건 1795년에 썼습니다. 미리 써놨습니다. 이거를 여기에 보면 자기 해명을 하는데 내가 천주교를 어떻게 때려잡았고 한때 천주교에 내가 왜 미쳤고 어떻게 미쳤고 그 다음에 어떻게 벗어나서 어떻게 천주교도를 검거하는 데 내가 앞장을 공을 세웠다, 이거를 해명한 겁니다. 그러니까 나한테 다시는 천주교라는 꼬리표를 붙이지 말아 주기 바란다는 것이 《자명소》에 해당됩니다. 이 세 편의 글이 다 그때 쓰여진 거거든요. 근데 이 《자명소》도 행간을 읽어보면 전부 자기 모순에 빠져 있어요. 그러니까 천주교를 배격했다는데 그 내용이 배격은 과장돼 있고 믿게 된 부분은 축소시켜 놨고 그냥 뭐, '그 당시 젊은 애들이 서학 공부는 그냥 교양으로 안 볼 수가 없어서 봤던 겁니다.' 이런 식으로 자기 신앙에 대해서는 굉장히 감춰 놓고, 배교한 거에 대해서는 굉장히 뻥튀기해놔서 그것도 눈금 조정을 해서 읽어야 그 드러나는 거죠.

그러니까 이 세 편의 글이 전부 지금까지는 다산이 천주교에서 벗어난 가장 중요한 증거고 핵심 기록이라고 이제 믿어왔는데 《금정일록》를 꼼꼼히 읽으면서 이 세 편의 글을 새롭게 읽었을 때는 이 세 편의 글이 일종의 ‘페이크’에 가까운 그런 글의 성격을 띤다는 거죠. 그러니까 이것은 표면적 진실과 이면적 진실이 따로 있는 글이니까 꼼꼼히 읽기를 통해서 좀 복원시켜 보겠다. 이것이 이번 책에서 가장 역점을 두어서 이야기한 것입니다. 너무 말이 길었죠. 죄송합니다. (웃음)


김윤경 

책이 600쪽이 넘는데, 주요 요지를 이렇게 잘 설명해 주신 것 같습니다.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서문을 보면 다산의 75년이라는 생애 중에서 이 일기가 쓰여진 이 시기가 가장 다산의 생애에서 절실하고 아슬아슬했던 시기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에 쓰여진 일기가 다산이 그 언표하지 못했던 그런 속내를 맥락에 담았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현장에서 질의 질문하기 전에 모두가 궁금해하실 것 같은 질문을 몇 가지 드리고 시작하겠습니다.앞에서 잠시 언급하셨는데, 교수님께서 이전에는 조선 시대 시와 산문을 중심으로 연구하셨는데 어떻게 서학 연구로 나아가셨는지, 그리고 조선 후기 서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배경이 무엇인지, 그리고 다시 다산으로 돌아온 계기를 여쭙고 싶습니다.


정민 

저도 처음 연구 당시에는 다산을 자꾸 천주교하고 결부하는 시선이 굉장히 불편했어요. 국학도의 일반적인 생각으로 불편했고, 다산과 천주교라는 걸 특별전을 할 때도 ‘아 왜 이런 짓을 하지?’ 한 10여 년 전에 이런 생각을 했었거든요. 그동안 외면하다가…. 다산의 젊은 시절을 들여다보니까 이건 보통 복잡한 문제가 아니에요. 그리고 굉장히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는데 천주교 코드를 들이대면 이해가 되는 그런 부분들이 계속 있었습니다.

사실 다산의 만년도 천주교 문제하고 굉장히 밀접하게 걸려 있습니다. 해배(解配) 이후의 삶은 지금 거의 거론되지 않고 있거든요. 천주교 쪽의 기록에 의하면 1867년에 썼던 달레(Claude Charles Dallet)의 《한국천주교회사》는 ‘다산이 《조선복음전래사》라는 책을 썼고 그 책을 기초로 해서 앞부분의 모든 기록을 자기가 《한국천주교회사》를 썼다. 그런데 다산의 이 기록은 분량이 많지는 않지만 너무나 정확하고, 자기한테 불리한 이야기까지 다 써놨기 때문에 이 글의 진실성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100프로 믿는다. 그래서 이 기록을 바탕으로 자기가 앞부분에 조선 초기 교회사의 부분을 쓰게 됐다.' 라고 하는 이야기도 남아있거든요.

그리고 마지막에 다산이 종부성사를 어떻게 받고 죽었고 만년의 회개 생활이 어땠다는 것을 아주 자세하게 써놨습니다. 그 당시인 1800년대 중반에. 그런데 이제 그 부분을 아무도 믿지 않는 거죠. 국학계에서는 ‘아, 지들 유리하게 쓴 거를 우리가 그걸 왜 믿어?’ 이렇게 말하니까 그 부분을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자료를 찾다 보니까 이 천주교 문제는 출발점과 종착점의 문제에 다 걸려 있어요. 강진 시절은 살짝 빗겨 있고. 그런데 그러니까 숨겨진 것이 너무 많아서 어느 순간에 ‘아, 이거는 내가 좀 밝혀봐야겠다.’ (싶었죠). 《파란》에서는 다산만 중심에서 봤고 《파란》을 보다 보니까 관련 기록에서 또 행간이 있는데 그 당시에 다산을 비껴간 문제는 제가 감당이 안 되어서 손을 안 대다가 지난번에 냈던 《서학, 조선을 관통하다》라는 책에서 천주교의 시각에서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보게 됐던 것이죠. 그러고 나서 이번에 《파란》에서 사실은 이 일기 부분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은 나옵니다. 근데 그때는 너무 맥락 없이 겉핥기로 지나가기 때문에 이번에는 아예 일기만 집중해서 끝장을 봐야겠다, 이런 생각으로 썼던 것이죠.  다산이 모순적 인간으로 그려지는 상황이 되는데, 이 모순적 상황이 결국은 다산의 정체성과 맞물려 있고 그 시대가 말하자면 유학과 서학의 접점이 만들어지는 시대가 만들어낸 모순적 상황이니까 좀 더 거시적이고 심층적인 시각에서 봐야지, 표면적으로 “그래서 다산이 배교자라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이런 식의 흑백 논리로 이 문제에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젊은 시절을 보다가 서학에 관심을 갖게 됐고 서학을 더 집중적으로 보고 나니까 다산을 좀 더 세밀하게 분절해보고 싶은 생각이 이번 책으로 이어졌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김윤경 

이어서 두 번째 질문드리겠습니다. 당시 사회의 기득권층이라고 할 수 있는 다산 같은 유학자가 왜 서학, 천주교에 빠지게 되었는지 그 이유는 무엇이었다고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서학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요?


정민 

18세기 들어오면서 중국과의 접촉이 더 활발해지고 중국에서는 이때 이미 지식 시장에 빅뱅이 일어납니다. 유리창(琉璃廠) 거리를 가 보면 수십 개의 서점에서 몇만 권씩의 책들이 쌓여 있으니까. 그 당시에 조선은 서점 하나 없던 나라였거든요. 전부 그냥 주머니에 넣고 팔고 영업사원들이 돌아다니면서 팔던 그런 서적 시장이었는데 사람들이 가서 어마어마한 책을 보고 또 천주당에 가서 천주교 교리서들을 선물로 받아오던 게 17세기부터 계속 쌓였죠. 

처음에 천주교 선교사들이 윤리적인 문제로 접근해서 유학과 서학이 본질적으로는 다를 게 없다, 윤리성의 문제에서. 이런 것으로 설득을 하는 책들을 많이 내거든요. 제가 예전에 번역했던 《칠극》이나 이런 책들이 그렇습니다. 죄악에 대한 7가지 극복의 경로를 제시한 《칠극》과 같은 책을 성호 이익을 비롯해서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이 읽었는데요. 성호도 그 책에 대해 격찬을 했습니다. 근데 이게 사단 칠정의 칠정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의 문제하고 똑같아요, 《칠극》의 문제가. 그러니까 그 책을 읽고는 《칠극》은 윤리서로 쓴 것이지 종교서로 쓴 게 아니거든요. 이런 책을 읽으면서 ‘이야 이건 뭐지?’ 서양의 스콜라 철학도 노출되고 그리스 로마 철학도 노출되면서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글들이 끝없이 이어지니까 이거를 읽다가 어쩌면 서학의 윤리와 유학의 논리를 만나게 해주는 접점이 가능할지도 몰라,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성호가 바로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외부 문화와의 접촉이 처음에는 있었고 이 접촉은 어느 순간 접속으로 넘어갑니다. 접촉은 ‘어 그런 게 있어?’ 이 단계고, 접속은 ‘그래서 이게 우리하고 어떻게 되는 거지?’ 이 문제로 넘어가면 이제 접속의 단계로 넘어가게 되죠. 그러니까 이게 이제 서학이 유학과의 접점을 찾자는 것인데 여기서 네 가지 태도가 나옵니다.유학을 서학 쪽으로 끌고 갈지, 서학을 유학 쪽으로 끌고 올지 아니면, 서학만 믿고 유학을 배제할지, 서학을 배제하고 유학만 남길지 이 네 가지 태도가 발생하면서 싸우게 되죠. 싸움이 벌어지게 되는 것인데 다산의 입장은 오히려 서학의 논리와 유학의 논리는 접점이 있는데 계속 왔다 갔다 하면서 재고 있었던 정도의 입장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근데 대부분은 유학만 남겨놓고 서학은 이단으로 몰아서 끝장을 내는 주장이었고, 순교자들은 서학만 남겨놓고 유학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주장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이런 것이 미묘하게 엇갈리는 지점입니다. 그 당시 지성사의 풍경이죠. 다산은 전부도 전무도 아니고 중간입니다. 이것과 저것이 서학을 유학으로 끌어올까 유학을 서학으로 끌어올까, 그때마다 입장에 따라서 조금씩 바뀌며 진동을 하고 있었던 것인데 그 진동 자체가 없어지고 전부냐, 전무냐만 남게 되니까 이것은 심각한 오히려 왜곡이 일어나는데, 문제는 남아있는 팩트가 검열된 팩트이기 때문에 검열의 행간을 뒤져봐야 한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 중간 지점에 대한 면밀한 독법이 어느 때보다도 요긴하고 필요하고 중요하다, 이것이 제 생각입니다.


김윤경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검열된 일기라고 하셨는데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이런 일기를 남긴다는 것이 현대인의 시선으로는 특이하기도 합니다. 다산은 누가 이 일기를 볼 것이라고 상정했을지 궁금합니다.


정민 

아, 지금도 그렇죠. 일기는 자신을 독자로 상정하고 쓴 글입니다. 훗날의 비망록 같은 거죠. 아 그때 이런 일이 있었구나, 그때 내가 이런 생각을 했구나. 그런데 조선 시대 일기는 좀 달라요. 조선 시대의 일기는 자기감정의 독백이 거의 사라지고 팩트만 남긴 일기가 더 많아요. 훨씬 많습니다. 

예를 들어 율곡이 〈석담일기〉를 썼는데요. 〈석담일기〉는 그 시대에 조정에 들락거리면서 자기가 듣고 본 견문을 자세히 썼는데 오늘 조정에 가서 누가 이런 말을 했는데 그거는 이런 사람인데 참 가증스럽다 뭐 이런 식의 팩트에 대한 이야기만 썼습니다. '임금이 오늘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전에는 이런 말을 하더니 오늘은 이런 말을 했다' 이렇게만 썼지 ‘사람이 이상해졌어’ 이런 말은 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석담일기〉를 천천히 읽으면서 따라가면 결과적으로 그 일기를 보면 선조에 대한 기대가, 말하자면 선조를 통해서 이 시대의 개혁을 이룰 수 있겠다던 기대가 점점 실망으로 바뀌고 그 실망이 마지막엔 절망이 되어가지고 완전히 기대를 꺾는 과정에 대한 일기입니다. 다른 면으로 읽으면. 그런데 실망스럽다던가 정신 나갔다든가 이런 식의 표현은 한 번도 쓰지 않고 팩트로만 전달합니다. 이것이 이제 일종의 춘추필법 같은 거죠. 사실을 통해서 진실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직접 코멘트 하지 않아도 독자들이 알게 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산의 이 글쓰기도 절대로 단순한 기억 환기용이 아니라 훗날의 독자를 염두에 둔 글쓰기에 해당하는 것이죠. 독자에게 남기고 싶은 진실의 행간이 계속 드러납니다. 일종의 증언 혹은 증거 수집, 그다음에 “너희들, 그때 이렇게 말했어.” 이렇게 말하고 결과적으로 “이런 행동을 했는데 부끄럽지 않니?” 이런 식의 경고들이 계속 나오는 것이죠.그러니까 이거는 그 당시에 자기 기록으로 오늘 조정에 갔더니 이조판서가 나한테 이렇게 말했다. 오늘 심환지를 만났더니 심환지가 이렇게 말했다. 영의정이 나한테 이렇게 말했다. 심지어는 이러거든요. 심환지가 노론 벽파의 두목인데 노론 벽파의 수장이었던 심환지가 계속 다산을 두둔해줘요, 이상하게. 적의 적인데 적중의 적인데 이걸 두둔해 주니까 다산이 나중에 결국은 곡산부사로 몰려 쫓겨나면서, 천주교 때문에 자명소에도 불구하고 쫓겨나면서 심환지를 찾아가서 묻습니다. “왜 저를 그렇게 위해 주셨습니까?” 하고 묻죠. “너무 감사합니다. 근데 왜 그렇게 계속 저를 두둔해 주셨습니까?”라고 물으니까 심환지가 대답을 할 수가 없어요. 계속 끙끙거리면서 딴청을 부리는 그 일기가 계속 뒤쪽에 나오거든요. 딴청을 부려요. 왜 딴청을 부리냐 심환지는 다산을 위해서 말한 게 아니고 정조의 오더에 의해서 말한 거예요.정조가 비밀 편지를 해가지고 계속 심환지한테 보낸 몇백 통의 편지가 나오지 않았습니까? 정조의 비밀 편지에 ‘너 내일 아침에 조정에 와서 이런 이야기해. 그럼 내가 이걸 받아가지고 이렇게 말할게’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산을 가지고 노론에서 하도 말하니까 “당신이 내일 나와서 걔 좀 좋은 말 한마디만 좀 해주면 노론에서도 이렇게 말하는데 남인 내부에서도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으니까 그거 막을라면 당신이 조금 중간에서 한 번 훈수 넣어줘” 이런 맥락에서 나온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다산은 그거를 심환지 입으로 확인하고 싶었는데 심환지는 그 말을 할 수가 없죠. 계속 딴청을 부립니다. 그래서 맨 마지막에 그 일기 뒤쪽에 보면 다산이 자기 상소문에 대한 칭찬이 아주 늘어져요. 이야 이거 낯도 안 뜨거운가, 자기 칭찬을 이렇게 할까. 그러니까 누가 이렇게 말했고 누가 이렇게 말했고 천고의 명문이고 야 나는 네 글을 내 손자한테 읽힐 거야, 뭐 판서가 이렇게 말했고 호조 판서는 이렇게 말했고 이 칭찬 퍼레이드를 낯 뜨겁게 써놨거든요.

이게 결국은 전부 뭐냐 이렇게 말하고 너희들이 내 뒤통수를 쳐? 지금 그 증언으로 남겨놓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읽지 않으면 이거를 심환지가 왜 다산을 도와줬을까? 또 정조가 어떤 액션을 취했을 때 김종수가 다음 날 금강산 여행 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노론의 수장이었죠. 금강산 여행을 가는데 왜 갑자기 금강산 여행은 자기 일기하고 아무 상관이 없잖아요. 김종수가 금강산 여행을 갔다 한 줄 딱 써놨어요. 왜 그랬습니까? 정조가 한 행동이 노론에 대한 굉장히 적대적인 선전 포고 같은 거였고 남인들한테는 굉장히 유리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김종수가 말하자면 파업하고 간 거예요. “나 안 해” 하고 현직 판서가 금강산 여행을 떠나버리는 그런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정국(政局)의 행간이 끼어든 거죠.

그러니까 다산이 판서가 금강산 여행 간 거를 한가롭게 쓰고 앉았느냐? 그런 정국적인 맥락이 있기 때문에 글을 쓴 것이죠. 그래서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양단 간에 결판 지을 수 없는 진실들이 참 많다. 천주교 문제도 그렇죠. 그러니까 둘 다 진실이 아닐 수도 있고 둘 다 진실일 수도 있는 문제들이 있다는 거죠. 다산이 천주교를 배교한 것도 진실이고, 천주교를 배교하지 않은 것도 진실입니다. 근데 이것이 계속 자기모순을 일으키고 계속 파열음을 일으키는데, 다산도 이 시기가 자기 생애에서 가장 부끄럽고 곤혹스러웠던 시기일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이해해야지 새로운 문제의 출발점에 설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어느 한쪽으로 결판내는 대신에 다산은 천주교 신자였어, 아니었어? 배교자야, 아니야? 둘 중에 하나를 결판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왜 이렇게 다산은 이 시절에 앞뒤 없는 말을 하고 겉 다르고 속 다른 행동을 계속 했을까, 이 문제를 섬세하게 들여다보는 것이 다산의 온전한 실상을 회복하고 그 시대의 온전한 고민을 회복하는 데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이 생각입니다.




김윤경

다산께서 200년이 지나 교수님 같은 학자가 남긴 당신이 남긴 일기를 이렇게 읽고 해석해 주시라는 것을 미리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지금 지금부터 기자님들의 질의응답을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연합뉴스 

1974년에 김영호 선생님이 〈여유당전서〉 제2책에 수록을 했다고 되어 있는데, 반세기 동안 존재가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번역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여기 내용을 보면 필체가 다산의 필체가 아니다, 이런 부분도 좀 영향을 줬을지 궁금합니다.

또 교수님께서 거의 300매에 가까운 일기를 보셨을 때 평소에 가지고 있던 생각과 달라 놀랐다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무엇인지 궁금하고요.

마지막으로 지금 얘기하시는 걸 종합을 하면 다산은 천주교 교인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천주교 교인이 아니다 그러니까 배교를 했다라고도 이렇게 명확하게 구분 짓는 것보다 그 사이에서, 천주교와 유학 그 사이에서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끝없이 고민하고 그에 따라 행동과 말을 바꾸는, 그냥 그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모습을 좀 강조하시잖아요. 근데 그런데도 많은 논란이 있을 것 같거든요, 양쪽의 입장이 워낙 첨예하다보니까. 이번 책이 어떤 역할을 했으면 하는지 말씀해 주세요.


정민 

네, 일기가 영인되어 공간(公刊)이 된 지가 50년이 지났습니다. 74년에 나왔으니까 딱 50년이 됐는데 이 일기에 관한 그런 논문은 한 편도 없거든요. 왜냐하면, 아까 말씀드렸듯이 일기 자체는 ‘몇 월 며칠 어디 가서 누구와 만났다.’ 이런 무미건조한 팩트의 행진이에요. ‘김종수가 금강산에 갔다.’라고 하면 ‘그거를 왜 네가 쓰냐?’ 이렇게 되는 그런 맥락이거든요. 그러니까 이거는 압축을 풀어야만 의미가 나오는 것인데, 압축을 풀기가 쉽지가 않다는 거죠. 천주교에 대한 정보도 충분히 있어야 하고, 당시 다산의 상황에 대한 맥락도 있어야 하는데요. 제 책이 이렇게 두꺼워진 것은 뭐냐 하면, 어떤 시점에 쓰인 편지 같은 다산의 문집 속에 있던 것들을 제가 다 그 날짜에 끼워 넣었거든요. 이 사람이 편지를 받았다고 했는데, 이 사람한테 보낸 답장은 다산의 문집 속에 실려 있습니다. 일기에는 없어요. 그러니까 그 일기에 실려 있는 것과 문집에 실려 있는 것을 교합을 해서 보면 아 얘가 이런 식으로 편지를 보냈고 다산이 이런 식으로 답장을 한 거였구나, 하는 맥락이 드러나거든요.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걸 뒤져보니까 아니 왜 금정 시절 5개월 동안에 쓴 편지가 이렇게 문집에 많이 실렸지? 진짜 깜짝 놀랐어요. 강진 시절 18년 동안 쓴 편지보다 더 많아요. 그래서 그 당시가 초긴장의 상태였고 절체절명의 순간이었구나, 라는 것을 이제야 안 거죠. 이 복원이 안 되면 이 일기는 아무 의미가 없는 정보의 나열입니다. 그래서 논문이 안 됐던 거고요. 

그다음에 (일기를) 읽었을 때 처음에는 이제 다산을 이렇게 쭉 그 제가 보던 다산하고 정말 다르고 제가 알던 사실과 다른 것들이 많았어요. 저는 《서암강학기》 처음에 순수하게 보고 그거 가지고 논문 한 편 써야지 이렇게 생각했거든요. 그다음에 《도산사숙록》도 그거에 대한 논문이 지금 한 10편 가까이 나와 있습니다. 근데 그 모든 논문이 ‘다산이 얼마나 퇴계를 존경했나?’ 이걸 이야기했거든요. 다산이 정조한테 《중용강의》에 대한 답을 올렸을 때 모든 사람이 퇴계의 학설을 찬양했는데 다산만 율곡의 학설을 찬양해서 그걸로 다산이 일등을 해요. 

근데 그 일등 때문에 말이 많았습니다, 조정에서. ‘퇴계를 밀치고 율곡을 세웠는데 이걸 어떻게 일등을 줍니까?’라는 반발이 굉장히 컸거든요. 사실은 다산은 율곡을 퇴계보다 더 높이 생각했어요. 다산은 사실은 성호를 우습게 봤어요. 그런데 글 속에서 성호는 최고의 학자고 퇴계는 최고의 모범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사실은 다산의 속마음은 달라요.

다산은 자기 편지에서 정확하게 그렇게 썼습니다. 성호가 죽은 다음에 그 책 정리하라고 후손한테 보내면서 뭐라고 했냐면 자기 형님한테 보낸 편지에서 그랬어요. “《성호사설》은 제가 읽어보니까 열 개 중에 두세 개도 건질 게 없습니다. 저한테 정리하라고 하면 그냥 한두 권 책이면 끝날 것 같아요.” 이렇게 말했거든요. 왜냐하면 성호는 학술적 태도가 모호하다는 거예요. 그다음에 이것저것 잡다하다는 겁니다. 이거 정리하고 간추려서 자기 이야기만 건질 것만 건지면 열에 한둘 정도만 건질 수 있겠다, 이렇게 자기 형님한테 개인적으로 쓴 편지에는 그렇게 쓰지만 공식적인 언어에서의 성호는 “성호 선생이야말로 내가 오늘의 내가 있게 만든 은인이다.” 이렇게 쓰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이제 속마음하고 좀 다르죠. 《도산사숙록》, 《서암강학기》 전부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을 읽었을 때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했던 혹은 추상적으로 생각했던 다산은 좀 다르다, 특히 젊은 날의 다산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돌격대장이었고 다혈질이었어요. 수틀리면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나중에 하도 다산하고 이가환하고 천주교 문제로 논란이 되니까 채제공이 정조하고 상의해서 ‘저 얘들 손절할래요,’ 하는 차자문(箚子文)을 올리려고 작성을 했어요. 
그 소문이 다산한테 들어갔어요. 내일 올린다더라. 그날 밤에 다산이 채제공 아들 채홍원을 찾아갑니다. 찾아가서 뭐라고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야, 너희 아버지가 우리 세 사람을 죽이려고 하신다는데, 손을 떼라고 하신다는데. 너 혹시 이런 말 들어봤니? 사람이 물에 빠지면 그 옆에 있는 사람 손도 같이 끌고 들어간대. 우리가 죽으면 너는 무사할 것 같으냐?” 이렇게 협박을 해요. 협박을 해가지고 그날 밤에 얘가 놀라가지고 그다음 날 아침에 이제 자기 아버지한테 와 가지고 어제 다산이 와서 저한테 이런 이야기하고 갔어요, 아버지. 이렇게 말하니까 채제공이 그 기록에 보면 《눌암기략》의 기록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젓가락을 밥상 위에다 탕탕 치면서, 화가 나 가지고, 공갈 협박을 하니까 딱 쳐가지고 숟가락이 밥상을 찍는 소리가 그냥 바깥에까지 쾅쾅 들렸다는 거예요. 그러고 나서는 밑에 놔뒀던 그 차자문을 찢어가지고 불태웠다는 겁니다. 그런 식의 모습이 굉장히 많이 나와요. 다른 기록을 보면 젊은 날의 다산은 절대로 만만치 않습니다. 정면 돌파하고 각개격파하고 들이받는 그런 다산이었죠.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림 속의 만고 성인 같은 다산의 모습하고는 상당히 차이가 있어요. 

그거는 저는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가문의 명운이 걸렸고 자기 정파의 운명이 걸려 있는 문젠데 정면 돌파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정치가로서의 다산은 그랬습니다. 이 일기도 그 시절의 일기에요. 그러니까 그 시절의 다산을 제대로 복원해 줘야지, ‘강진 시절의 위대한 학자’, ‘전무후무한 실학자로서의 다산’, ‘애민과 청렴의 다산’만 가지고 이 모든 코드를 해석하려고 하면 부정합이 생기는 건 당연하죠. 


한겨레 

선생님 서문에 보면 갑갑증에 기가 넘어가고 벌떡 일어나고 연구실을 왔다 갔다 하고 교정을 한 바퀴 돌아다니셨다 돌아다니셨다, 이런 말이 나오는데 어떤 부분에서 그런 어떤 대목에서 그런 느낌을 받으셨는지 궁금하고요. 또 다산이 배교를 했다고 할 때 혹시 검거나 이런 게 짜고 치는 고스톱이긴 했지만 그 외에 혹시 실제로 천주교에 피해를 준 대목이 있었는지 좀 궁금하고, 이승훈의 체포나 이런 게 영향이 있었는지 이런 게 좀 궁금합니다. 또 ‘혈기왕성한 다산’을 공언하신 셈인데 그 지금의 혹시 인물을 본다면 정치인이나 외국의 정치인이나 뭐 영화에 그려진 가상인물이나 어떤 게 비슷할까, 뭐 이런 게 좀 궁금합니다.


정민 

이게 처음에는 그냥 두꺼운 해제 한 2, 300매 정도 쓰고 말려고 했는데 이렇게 해서는 이게 입체적인 접근이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포기하고 체제를 완전히 다시 흩어가지고 이제 백문 백답을 만들어서 분절해서 보자, 이렇게 했는데 분절해서 보면 어떤 문제가 생기냐 하면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분석하면 이제 누구를 만났다 그러면 그 사람 족보 뒤지고 문집 뒤지고 관련 글이 다산 문집에 있나, 이걸 다 뒤져야 되거든요.

그걸 다 뒤져가지고 그 문제를 하나 해결하고 그다음 문제로 그 다음 사람으로 넘어가면 그건 또 이제 완전히 새로운 문제가 시작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할 때마다 한 고개 넘으면 또 한 고개 넘어야 되고 이런 상황이 반복이 됩니다.

예를 들면 중간에 다산이 윤취협이라는 사람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나오고, 그다음에 윤취협에게 보낸 편지가 하나 실려 있어요. 그런데 그 편지에 보면 좌명이라는 놈이 어떤 놈이길래 그 자식이 나한테 이렇게 흉악한 말을 하느냐? 한번 여기 오게 해 가지고 우리 둘이 ‘맞짱’ 토론 한 번 뜨게 해다오, 이런 편지가 나옵니다. 짤막한 편지예요. 도대체 참을 수가 없다. 나한테 왜 이렇게 비방을 하는지 모르겠다. 서암강학이 끝난 직후 이야기입니다. 계속 비방을 하니까, 이제 윤취협한테 보낸 편지에 그랬습니다.

그래서 좌명이 누구냐를 이제 찾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좌명을 찾는데 좌명이 안 나와요. 근데 문집에 보니까 좌명 이야기가 나옵니다. 근데 얘가 진사 시험에 수석 합격한 그 지역의 굉장히 유명한 인재예요. 그래서 뭐가 이상하다, 제가 찾아보니까 윤 씨 족보를 찾았습니다. 윤취협의 족보를 찾았어요. 윤취협은 별로 알려진 사람이 아니니까 그 사람 족보를 찾아서 딱 뒤져보니까 좌명이라는 사람이 윤취협 손자예요. 그러니까 할아버지한테 협박한 겁니다. 네 손자가 자꾸 나한테 이런 식의 책동을 하는데 가만 안 둔다. 나한테 와서 해명하든지 나에 대한 비방을 멈추든지 둘 중에 하나 하도록 당신이 지도하시오 이렇게 보낸 편지였어요.

그러고 나서 다산의 문집에 보면 윤기환인데요, 이 사람이. 편지에 보면 윤기환이 서울에 있을 때 과거 붙자고 와서 까불다가 술이 취해가지고 채제공에 대해서 아주 극렬한 비방을 퍼붓다가 남인들한테 완전히 생매장을 당해 가지고 그 당시에 쫓겨와 있었어요. 자기 고향으로 쫓겨와 있었습니다. 5, 6년 째 폐인 생활을 하고 있었던 상황입니다. 그런데 문집에 실려 있는 편지에 보면 윤기환 좀 살려줘라라고 하는 탄원서예요. 강이원이라고 하는 자기 친구한테 보내가지고 내가 와서 만나보니까 걔 진짜 똑똑하고 평판도 좋고 괜찮은 애더라. 술 먹고 한때 실수한 걸 가지고 자꾸 그렇게 하면 안 되고 좀 받아주는 게 어떻겠니? 하고 편 들어준 겁니다. 이상하잖아요.맞짱 토론하자, 그 미친놈이 나한테 그렇게 말하니 이렇게 말하는 편지가 문집에는 실려 일기에는 실려 있는데 이쪽에는 ‘걔 착하고 똑똑한 애니까 봐줘라’라는 편지를 서울 친구한테 탄원을 하고 있으니까 이 둘 사이에 뭔가 모순이 발생하게 되죠. 그러니까 결국은 제가 판단하는 해석은 뭐냐 하면 다산이 딜을 한 겁니다.

‘내가 네 손자 서울에 부탁해서 그런 문제 불이익받는 거 해제시켜 줄 테니까 나에 대한 비방을 멈추게 해다오.’라고 하는 일종의 딜이 있었다고 그 두 개의 편지를 보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편지의 모순을 이해할 수가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죠. 이게 일기가 보여주는 행간의 한 측면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이런 거 하나 찾으면 시원하고 못 찾으면 이게 왜 그러지 뭐지 하고 이제 갑갑증이 나는 거죠. 그랬던 상황입니다.

다산이 누구에게 해당되느냐 그 말씀은 제가 드리기가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비슷한 사람이 딱 떠오르지는 않아요. 근데 다산은 정말 놀라운 참모였고 정조의 입장에서는 얘한테 맡기면 모든 문제가 선명하고 아주 스마트하게 해결이 됩니다. 심지어 화성 건설 설계 도면을 몇 달 만에 만들어내요. 건축학과 나온 것도 아닌데. 심지어는 필요한 장비까지 다 발명까지 해가면서 만드는데 그런 프로세스를 보면 정말 탁월하죠. 그러니까 정조의 입장에서는 다산은 "너는 내 간에 맞는 신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신하니까, 정조는 천주교에 대한 흠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산을 어떻게든 안고 가려고 했던 것이고, 또 막상 천주교에 대한 정조의 태도는 그렇게 극단적이지 않았습니다. 약간의 오픈 마인드가 있었어요. 그 시절이 워낙 그러니까 대놓고 편들 수 없었을 뿐이죠.

(실제로 배교를 해서 피해를 본 것은) 별로 없어요. 그러니까 배교라는 것은, 말하자면 이존창 검거라든가 천주교 세력들을 억압하거나 또 어떤 기록에 보면 천주교 신자들 검거하는 방법을 알려줬다 노하우를 알려줬다, 이런 공초 기록도 나오거든요. 그래가지고 이제 여러 가지 했다는 건데 그중에 말하자면 치명적인 것보다는 오히려 주문모 신부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있을 때 달려가 가지고 구해준 것도 다산이었고 오히려. 그러니까 겉으로는 아닌 척하고 겉으로는 탄압하는 척 하지만 속으로는 오히려 도와주는 측면이 더 있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일종의 '페이크'적인 측면도 없지 않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배교를 공언하고 있던 순간조차도.

그러니까 한 3년 전에 윤지충, 권상연의 묘가 발굴이 됐어요. 전주에서 윤지충은 최초의 순교자 아닙니까? 신주단지를 불태워 가지고 목 잘려서 죽은 사람인데 목 잘린 그 시신이 그대로 뼈가 나왔어요. 전주에서 나왔는데 팔다리가 없습니다. 무릎 이하로는 아예 뼈도 없어요. 팔도 팔뚝 이하로는 없는 참시 당한 시신의 뼈가 그대로 나온 거예요. 그 (무덤) 안에 있던 사발에 이 사람의 인적 사항이 적혀 있었는데 그 글씨가 다산 글씨였어요. 다산의 친필이었습니다.

그거는 제가 예전에 글로 써가지고 한번 발칵 뒤집힌 적이 있었는데, 이런 걸 보면 그때도 다산은 천주교 배교했다고, 《자명소》에서 "나는 이 시기는 완전히 배교했었어요." 이렇게 말하는 시기에도 그런 것들이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이 진실을 어디까지의 진실인지를 확정하기가 참 쉽지가 않죠. 근데 다산이 실제적으로 천주교에 해를 끼친 것보다는 천주교에 공이 더 많다고 저는 생각해요. 왜냐하면 나중에 초기 교회사에 대한 증언을 남긴 것도 다산이었고, 그게 실물로 남아있지는 않지만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 그 골격이 그대로 남아있다고 하고, 그 내용을 보면 다산이 아니고는 알 수 없는 내용들이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중앙일보 

이 일기는 30대 다산이 쓴 것들인데, 다산은 그 이후에도 계속 일기를 썼나요? 아니면 이 시기의 일기가 남은 것은 일기를 썼을 만한 어떤 특별한 상황이나 이유가 있는 지가 궁금하고요. 또, 교수님께서는 서학과 유학 사이에서 서학에 유학을 끌어올까, 유학을 중심으로 서학을 끌어올까 하면서 다산이 이쪽으로 갔다 저쪽으로 갔다 그런 고민을 했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이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는지, 아니면 다산의 그런 입장이 굉장히 소수인지가 궁금합니다.


정민 

제 생각에 다산은 이런 종류의 일기를 계속 썼을 것 같습니다. 김영호 선생의 서문에 보면 이것 말고도 한 두 종쯤 더 있는 걸로, 그런데 '소장자가 섭외가 안 돼서 도저히 못 실었다, 다음에 싣겠다.' 라고 하는 대목이 나온 걸로 봐서는 분명히 곡산부사 시절의 글도 있고 자기 인생의 중요한 국면마다 이런 종류의 비망록을 계속 남겼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근데 현재 남아있는 것이 이거니까 이걸 가지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데, 왜 하필 이것만 남았느냐? 이것은 천주교 문제가 굉장히 첨예하고 정교하게 걸려 있는 시점이고 이 부분에 대한 증언은 아무래도 좀 남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이것이 기록화된 것은, 그러니까 최종 현재본으로 정리된 것은 강진 귀양이 한 10년 더 지난 시점에서 정리된 책입니다. 그러니까 다산이 제자를 통해서 정리를 시킨 거죠. 다산 친필은 아니라는 것은 그런 뜻입니다. 그런 뜻이고요.

유학과 서학의 절충을 이렇게 진자처럼 왔다 갔다 했다 그러는데 이 시기에 서학으로 완전히 경도되었던 사람들은 다 순교했으니까 그 세력이 만만치가 않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그룹들이 존재하고 있었고 거기에 비해서는 다산은 한 발을 뺀 거죠. 완전히 풍덩 빠졌다가 물가에 나와 가지고 옷 젖은 상태로 있는 것이 다산의 상황인데 이 상황에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말하자면 현실 즉 임금이라는 하늘과 천주라는 두 하늘 사이에서 고민이 없을 수 없었던 그런 것이 다산의 입장이었고, 극렬하게 서학은 우리 사회의 독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은 또 완고하게 있었던 것이죠.

근데 이게 숫자로 놓고 보면 다산과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이게 대부분 내면화가 되어 있으니까 겉으로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겉으로 그걸 언표화시키는 것은 아니고 다산은 문제의 중심에 섰기 때문에 자기 해명이 필요했던 글을 남긴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도 그걸 언표화 시키지 않으니까 이거는 익명의 그늘 속에 숨어 있는 거죠. 그러니까 이런 세력이 그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비중이었느냐는 입증하기가 좀 어려운 측면이 있어요. 그러나 완전히 긍정 쪽에 섰던 사람들은 다 죽음을 당했고 회색 쪽의 입장에, 진동했던 사람들은 기록을 안 남겼고 극단적인 반대 세력들은 저것들 죽여라 하고 그런 기록을 많이 남겼고 그런 것이죠. 그러니까 진실은 죽은 사람과 죽여라 했던 사람들, 그 기록과 이 사람들의 회색적인 기록을 다 교합할 때 비교적 지워진 부분들이 복구될 수 있다, 이런 생각이고 제 최근의 작업들은 그것에 대한 일종의 복구 작업 정도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절대로 다산을 천주교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이 책을 쓰는 게 아닙니다. 다산이 순수한 유학자였다고 그걸 주장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다산의 정체성은 그 중간에 있었고 그 중간을 정확하게 들여다 볼 때 시대의 진실이 드러나니까 이것을 우리는 주목하자. 그동안 아무도 안 봤고 보려고도 하지 않았으니까. 근데 보면 생각지 않은 정보들이 포착이 되고 전혀 몰랐던 면모들이 드러나니까 이것에 우리가 눈길을 줘야 되겠다, 뭐 이런 생각입니다.


뉴스원 

교수님께서 20년간 다산을 연구해 오시면서도 여전히 궁금하신 점이 많으실 것 같아요. 만약에 다산을 직접 만나실 수 있다면 뭘 가장 물어보고 싶으신지요? 그리고 두 번째는 신간을 내주긴 했지만 자료가 계속 교수님 앞으로 배달된다고 했는데요. 향후 다산에 대해서 또 다른 책을 생각하신다면 어떤 주제로 쓰고 싶으신지 궁금합니다.


정민

다산이... 그러니까 제가 다산을 만난다면 다산이 좀 묘한 표정을 지을 것 같아요. 내가 너 때문에 참 성가시다라는 생각 하나하고 그래도 네가 내 속을 좀 알아주니 고맙다라는 생각이 그 두 가지 중간에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그때 왜 그랬어요?’라는 질문도 가능하겠지만 오히려 제가 어떤 말을 듣게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좀 해 봅니다. 다산이 오히려 네가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알았냐 뭐 이런 말씀, 혹은 어쨌든 내가 말하고 싶었던 행간을 네가 이렇게 밝혀주고 이런 것들이 담론화 될 수 있는 장을 만들어 준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뭐 그런 정도의 말씀을 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뭐 제가 다산에 대해서 뭔가 따지거나 이런 것보다는 그냥 다산과 공감하고 공유하면서 그런 말을 듣고 싶다는 말씀을 좀 드리고 싶고. 

저는 사실 제일 좋아하는 작가가 연암 박지원이거든요. 그래서 지금 연암에 대해서 처음에 한 10여 년 작업을 하다가 제가 그때 왜 이걸로 돌아섰냐 하면 그 당시 뉴밀레니엄 시대에 디지털 혁명이니 정보 빅뱅이니 이런 사회로 가면서 18세기가 바로 정보화 사회가 시작된 지점이니까 18세기 사회를 통해서 그 당시 뉴밀레니엄 시대의 어떤 비전을 우리가 얻어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강하게 하게 됐어요.
그러면서 정보의 편집 문제가 관심이 됐고 정보 편집의 끝판왕은 다산이니까 그래서 제가 《다산선생 지식경영법》을 썼던 것은 다산이 정보를 어떤 식으로 콘트롤 했고 자기화했는가를 그 메커니즘을 밝히자는 거였거든요.

그 전까지는 다산은 전부 무슨 공직자의 모범 청렴과 공정, 뭐 이렇게 하니까 어떤 공무원이 와서 저한테 강연을 요청하면서 이렇게 말을 해요. “아니 선생님 저 와서 강연 좀 해주세요.” “전 외부 강연 안 합니다.” 그랬더니 “저거 해주셔야 됩니다.” “안 한다니까요.” 그러니까 그때 하는 말이 아 자기들이 맨날 그저 공직사회에서 다산 특강을 맨날 하는데 특강만 하면 맨날 와서 “청렴해라”, “정직해라”, “백성들을 위해….” 하니까 “아니, 우리가 무슨 도둑놈입니까? 맨날 정직, 청렴해라 이러니까 짜증이 난다.”라는 거예요. 다산도 좋은 이야기도 한두 번이지. 근데 선생님 글 《다산 선생 지식 경영법》을 읽어보니까 야 다산이 어떤 프로젝트를 이런 프로세스로 진행했구나, 이건 자기들이 스터디를 해도 좋겠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거를 알려달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처음 다산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그런 메커니즘이었거든요. 그 시대의 작업에 대한 것. 그래서 저는 연암으로 빨리 가고 싶은데, 최근 한 달 사이에만 다산의 편지가 스물 네 통이 저한테 새로 들어왔어요. 그 두 집안에서 간직하고 있던 그 집안에 온 편지가 24통이나 저한테 새로 들어왔는데 그건 물론 한 번도 공개되지 않은 자료들입니다. 이런 자료들이 계속 제 앞에 산적해 있고, 해야 될 일들이 계속 생겨나는 그런 상황입니다.

그다음에 다산과 불교의 덩어리가 어마어마합니다. 다산은 불교와 관련된 글들을 엄청나게 많이 남겼는데 이거 다 검열해서 문집에 다 빠졌어요. 왜냐하면, 저게 천주교에 빠져가지고 귀양을 보내놨더니 이번엔 중들하고 놀아? 이 소리 듣기 싫어가지고 승려들한테 어마어마하게 많은 글을, (문집에서 다 뺐어요.) 제가 그 번역하면 천 매쯤 될 것 같아요. 문집에 빠진 글이. 거의 친필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 것도 좀 정리해야 되고.

또 하나는 아직 정리를 마무리 짓지 못한 게 다산하고 정약전이 흑산도하고 강진을 오가면서 주고받은 편지가 많아요. 그 편지가 많은데 이게 합이 안 맞아요. 그러니까 다산의 편지는 연도 순서대로 돼 있지 않고 그냥 막 편집돼 있습니다. 형님에게 올림 이런 편지들이 문집에 쭉 실려 있는데 어 정약전이 쓴 편지도 꽤 남아있어요. 따로. 근데 이게 이 편지에 대한 어떤 게 답장인지 이게 안 나와요. 합이 안 맞아요. 연대순으로도 안 돼 있고, 둘 다.

그래서 제가 그걸 다 편지를 꼼꼼하게 읽어가지고 문답의 합을 다 맞췄습니다. 번역도 다 했습니다. 이것도 꽤 두꺼운 책이에요. 책으로 하면 뭐 이 정도(《다산의 일기장》) 분량 정도 가까이 되는 그런 내용입니다. 근데 이것도 사실은 정약전과 다산의 형제들이 어떤 학술 주제로 어떤 태도를 가지고 학문적인 토론을 지속해 왔는지 여기에 보면 별 이야기들이 다 나옵니다. 호남 예찬론도 나와요. 정약전은 흑산도가 최고야 그러면 강진이 더 좋을걸요? 그러면 아니야 흑산도가 더 좋아 그러면서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이런 이야기를 이유로 대고 호남 예찬론도 쓰는, 그런 형제간의 살가운 대화들도 꽤 많거든요. 그런 내용들도 한번 또 따로 입체적으로 다시 한번 문답의 순서에 맞춰서 복원해야지 다산이 자신의 저술을 형한테 어떻게 질문했고 그 질문이 어떤 식의 답으로 돌아왔고 이것이 어떻게 저술에 반영이 됐는지 이런 메커니즘이 드러나거든요.그래서 그런 식으로 저런 식으로 하면 따져볼 것들이 굉장히 많아요. 그다음에 다산과 각각의 인물들에 관한 접근들도 이거 다 책 한 권씩의 분량입니다. 예를 들어서 다산과 아암 혜장 같은 승려들이 있는데 혜장은 당시 대흥사의 일타 강사였습니다. 최고의 학승이었어요. 근데 이 학승이 삼십 대 후반에 다산과 처음 만나가지고 다산이 완전히 얘한테, 주역의 대가였거든요, 다산이 계속 이야기합니다. 너 같은 애가 왜 중 노릇 하고 있니? 과거 시험 봐라. 머리 기르고. 계속 그래가지고 아암이 헛바람이 들어가지고 나중에는 진짜 머리 기르고 승복 벗고 파계했어요. 파계하고 방황하다가 술 먹고 황달병에 걸려 마흔 네살이 죽어버려요.

다산이 굉장히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내가 저 멀쩡한 애를 호남의 그 이론으로 최고의 학승을 저렇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절에서는 얘를 파계시켜버렸죠. 그렇게 죽으니까 다산이 죄책감에 아암을 복원하기 위한 여러 가지 작업을 합니다. 그래가지고 대흥사하고 딜을 하죠. 내가 너희들 역사책 써줄 테니까 아암 복권시켜줘 이래가지고 아암 복권돼 있습니다. 완벽하게 복권돼 있는데 그러다 보니까 대둔사지를 죽은 지 5년 된 아암이 쓴 거 같이 쓴 것처럼 해놨어요. 시작한 게 아암 죽은 몇 년 뒤에 시작한 건데. 

그런 식으로 이렇게 하면서 여러 가지 내용 구성에도 약간 무리가 왔죠. 아암의 중심으로 돋보이게 하느라고 그러니까 이제 대흥사에서는 자기들 역사를 받는 대신 아암을 복권시켜 놓은 겁니다. 이제 그런 이야기는 아암과 다산만 가지고도 사실은 책 한 권 분량이거든요. 그런 자료들이 아... 그래서 제가 이 지뢰밭을 잘못 건드렸구나 하고 좀 그렇게 후회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러다가 언제 연암 가나 이런 생각이 있죠. 



김윤경 

저는 교수님 옆에 앉아서 처음부터 지금까지 뜨거움을 바로 느끼고 있습니다. 바깥 날씨가 추운데도 분위기가 이렇게 훈훈한데, 이제 마무리하면서 교수님께서 이 책을 읽을 독자들께 전하고 싶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정민 

다산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이 필요한 시점이 왔다. 서문에도 썼지만 맨날 완벽하고 완전 무결하고 애민 정신의 화신이 된 그런 다산 말고, 좀 분노할 줄도 알고 자기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투쟁도 하고 뭐 전투적으로 싸우기도 했던 그런 다산도 있었고 그런 다산이 있었기에 후반의 다산, 강진 시절의 다산이 가능했던 것이지, 그리고 강진 시절의 다산은 자신의 젊은 날의 다혈질과 행동들이 빚어냈던 이런 참혹한 결과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좀 결이 뉘어지면서, 들여다보는 시간을 오랫동안 갖게 되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다산의 이미지들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하나도 바뀐 것은 없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다산의 시대보다 200년 어치 더 진보한 것도 아니고 다산의 그때가 우리 지금보다 200년 더 후퇴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화는 항상 변화하지만 발전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똑같이 치열하고 다산의 그때에도 오늘의 우리도 똑같이 치열한 삶을 살아가고 있죠. 그러니까 그런 면에서 옛것을 빌려서 오늘을 읽을 수가 있고 또 이런 격동의 시대에 온몸으로 이것을 맞부딪혔던 그 시대에 다산이 보여준 통찰과 고민과 좌절, 그 극복의 과정을 우리가 살펴서 그 안에 내재된 의미를 우리의 가치로 바꿀 수 있는가의 문제가 결국은 다산을 통해서 우리가 해결해야 될 몫이라고 생각이 되죠. 저는 답까지 말씀드릴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냥 통역사죠. 일반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맥락을 제 전문 지식을 총동원해서 일반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옮겨주는 것이 제 역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을 자기 입장에서 내면화 시키는 것은 결국은 이제 독자들의 몫이겠죠. 그래서 저는 몫을 넘겨드리는 것으로, 연결 지어 주는 역할로. 인문학자로서의 제 역할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김윤경

교수님께서 어느 인터뷰에서 하신 말씀인데 기존에 있는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만드는 학자로 기억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인공지능의 시대에 원전을 읽고 옛 지식인의 사유와 지적 담론을 연구하시는 교수님께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다산의 일기장이 오늘 현대 독자들에게 어떻게 읽힐 것인가는 오늘 참석해 주신 기자님, 그리고 독자에게 남겨진 숙제인 것 같습니다. 18세기 조선이라는 시대를 뜨거운 질문으로 맞섰던 조선의 지식인의 진실을 만나는 책으로 자리매김하기를 바랍니다.

이상으로 기자간담회를 마치겠습니다. 참석해 주신 기자님들 감사합니다.

저자소개

정민
저자,역자 정민 정민 작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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