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자는 죽어야 한다
나는 책상 조명을 켜고 메모지를 펼쳤다. 내가 아니라 이미 이 세상을 떠난 고인 앞으로 남긴 메모였다. 올라오는지 내려가는지 모를,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망령 같은 발소리가 건물 계단 어딘가에서 울려 퍼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리석은 자는 죽어야 한다 하라 료 저자 권일영 역자
  • 2018년 06월 05일
  • 408쪽137X197mm무선비채
  • 978-89-349-8095-7 03830
어리석은 자는 죽어야 한다
어리석은 자는 죽어야 한다 저자 하라 료 2018.06.05

일본 하드보일드의 거장, 하라 료.

10년 만에 선보이는, 새로운 ‘탐정 사와자키 시리즈’

장편소설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 《내가 죽인 소녀》 《안녕, 긴 잠이여》부터 단편집 《천사들의 탐정》까지, 단 네 권의 책으로 일본 하드보일드의 역사를 완전히 새로 쓴 하라 료가 ‘탐정 사와자키 시리즈’ 시즌 2의 개막을 알리며 귀환했다. 

시즌 2의 첫 작품이자 10년의 세월이 응축된 작품답게 《어리석은 자는 죽어야 한다》는 전작의 장점을 오롯이 계승하면서도, 한층 단단해진 스토리라인과 하드보일드다운 건조한 감성을 뽐낸다. 특히 겹겹의 음모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낭만 마초’ 사와자키의 매력이 한겨울 도쿄의 메마른 정경과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읽는 맛’을 더한다.

P.7-8
병원이 인간 생명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지만, 가장 잘하는 일은 생명에 가격표를 매기는 짓이다. 가격표가 붙으면 보험사 직원도 나타나고 사기꾼도 등장한다. 머지않아 탐정도 얼굴을 내민다. 그뿐이다.
오전 10시가 조금 지났지만 블라인드를 내린 실내는 어두컴컴했다. 나는 책상 조명을 켜고 메모지를 펼쳤다. 내가 아니라 이미 이 세상을 떠난 고인 앞으로 남긴 메모였다. 올라오는지 내려가는지 모를,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망령 같은 발소리가 건물 계단 어딘가에서 울려 퍼지는 기분이 들었다.
P.46-47
문득 생각이 나서 나는 수사1과 니시고리 경부에 대해 쓰쓰미 과장에게 물어볼까 했다. 이부키 게이코에게 말한, 나를 목덜미로 기어들어온 송충이나 벌레처럼 싫어하는 형사다. 나뿐 아니라 죽은 와타나베와도 인연이 깊은 신주쿠 경찰서의 터줏대감 같은 사람이었다. 니시고리는 비번일까? 다른 경찰서로 옮겼나? 퇴직했을까? 잘렸나? 아니면 죽었을까? 서에 있는데 내게 얼굴을 보이지 않을 리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묻지 않기로 했다. 나는 아직 경찰서 안에 있고, 공연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질문은 끝났어.” 나는 그렇게 말하고 발아래 있던 가방을 들었다.
(…) 아무도 내게 주목하지 않는 신주쿠 경찰서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갔다. 정직한 탐정의 표본이었다.
P.186
신주쿠 역 구내와 플랫폼에는 볼꼴 사나운 교복에서 해방된 아이들이 유난히 많았다. 겨울방학도 이제 곧 끝날 즈음이었다. 즐거운 시간은 오래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게 인생의 첫걸음이지만, 괴로운 시간 역시 마찬가지라는 사실은 인생이 끝나갈 때가 다 되어서도 알기 어렵다. 나는 소부 선으로 스이도바시까지 가서 도영 지하철 미타 선으로 갈아타고 바로 다음 역인 가스가 역에서 내렸다.
어리석은 자는 죽어야 한다

작가 후기
맺는말을 대신하여 : 세상을 비추는 거울
작가이미지
저자 하라 료 (原 尞)
1946년 사가 현 도스 시에서 태어났다. 규슈 대학교 문학부 미학미술사학과에서 공부하고 졸업 후에는 상경하여 재즈피아니스트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후 도쿄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에 돌아가 글쓰기에 매진하여 1988년, 신인 작가로는 다소 늦은 나이인 마흔세 살에 정식으로 문단에 발을 들였다. 데뷔작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는 중년의 사립탐정 ‘사와자키’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하드보일드 소설로, 일본 문단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키며 제2회 야마모토슈고로상 후보에 올랐다. 이듬해 발표한 시리즈 두 번째 작품 《내가 죽인 소녀》로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에 오르고 제102회 나오키상을 수상하는 등 단 두 권의 장편소설로 일본 하드보일드 문학의 대표 기수로 우뚝 섰다. 특히 하라 료의 수상을 계기로 미스터리 소설이 나오키상에 시민권을 얻게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탐정 사와자키의 활약상은 장편소설 《안녕, 긴 잠이여》 《어리석은 자는 죽어야 한다》 《지금부터의 내일》, 단편집 《천사들의 탐정》으로 이어졌다. 발표하는 작품마다 복잡한 플롯, 매력적인 등장인물, 철저하게 계산된 대화, 현실감 있는 전개 등 정통 하드보일드 스타일의 매력을 오롯이 담았다는 호평을 받으며 각종 미스터리 차트를 석권한 것은 물론이다. 작가가 평소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을 즐겨 읽은 만큼, 탐정 사와자키는 챈들러의 히어로 ‘필립 말로’에 비견되며 탄생 이래 일본을 대표하는 ‘낭만 마초’로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다. 2023년 5월 타계했다. 

사진 Hayakawa Publishing, Inc. ⒸKunihiko Sugano
'출판사 리뷰'는 준비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