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의 늦여름
기억은 돌아오는데 정작 그림이 떠오르지 않았다. 당시에도 제대로 들여다보지는 않았던 것이리라. 컴퓨터 앞에 앉아 나유타를 검색했다. 화면에 뜬 그림을 보고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해부된 인간의 몸. 더욱이 그림의 범주를 뛰어넘는 압도적 묘사력.
제로의 늦여름 零の晩夏 이와이 슌지 저자 홍은주 역자
  • 2024년 09월 30일
  • 404쪽133X191mm비채
  • 979-11-943-3048-6
제로의 늦여름
제로의 늦여름 零の晩夏 저자 이와이 슌지 2024.09.30
<러브레터><하나와 앨리스><립반윙클의 신부>의 감독
이와이 슌지가 직조한 감각적 아트 미스터리 소설
눈 덮인 겨울 풍경과 “오겐키데스카”라는 외침으로 기억되는 아름다운 영화 <러브레터>, 두 여고생의 첫사랑 연애 대작전을 그린 <하나와 앨리스>, 행복 가득한 인터넷 세상과 그늘진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청춘을 담아낸 <립반윙클의 신부>…… 풋풋하지만 서툰 청춘의 흔들리는 초상을 섬세한 시선으로 포착해온 감독 이와이 슌지. 소설가로서도 차곡차곡 또 하나의 필모그래피를 쌓아온 그가 신작 장편소설 《제로의 늦여름》으로 한국 독자를 찾는다. ‘사신(死神)’이라 불리며 도시전설의 주인공이 된 어느 천재 복면 화가의 이야기를 쫓는 아트 미스터리로, 작가의 첫 도전 장르라지만 미술에 대한 깊은 이해와 특유의 감각적인 필치가 독자를 금세 이야기의 한복판으로 안내한다. 출간과 동시에 일본 최대 포털사이트 ‘야후 재팬’에 ‘제로의 늦여름 영화화’라는 자동완성 검색어가 등장하는 등 독자들의 뜨거운 성원과 함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표지 재킷에는 작가가 실제로 소설을 집필하는 데 모티프가 된 미에노 케이의 하이퍼리얼리즘 회화를 실었다. 작가는 출간 기념 인터뷰에서 “마주하는 순간 무언가 와락 전해지는 그런 그림과 같은 소설을 쓰고 싶었다”라고 귀띔했다.
P.82-83
나는 갑자기 스마트폰을 꺼내 가세에게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제로의 <늦여름>이다.
 “이거 좀 봐봐. 얘, 나 닮았어?”
 “네? 아…… 음. 듣고 보니.”
 “<늦여름>이라는 작품이야. 이거 보러 갔었거든. 올 3월에. 뭐지. 보니까 눈물이 났어. 왠지는 몰라도. 역시 그림이란 좋구나, 했지. 그쪽 방면에서 일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아는 분이 지금 
다니는 출판사를 소개해줬어. 면접 때 이 작품이 얼마나 훌륭한지 역설하다 그만 울음이 터지는 바람에…… 어, 왜 이래, 또 눈물 난다.”
 “그래서, 채용됐나요?”
 “응. 뭐 결과적으로는. 그래도 굉장하지? 너보다 잘 그리는 거 아냐? 
 “무슨, 저는 어림도 없는데요.”
 “처음엔 그림으로 안 보였어. 알았어? 그림인 거?”
 “아뇨, 몰랐어요.”
 “사진인 줄 알았지?”
 “네.”
P.85-86
 “오오!” 편집장의 입에서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네즈 씬데, 허락 떨어졌다, 나유타 특집!”
뭐가 그리 기쁠 일인지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뭐야, 나유타 몰라? ‘나유타의 사신(死神) 전설’.”
가까이 있던 다무라 씨가 설명해준다.
 “얼굴도 이력도 공개하지 않는 수수께끼의 화가.”
 “뱅크시(영국을 거점으로 활약하는 신원불명의 아티스트)처럼.” 야지 씨가 옆에
서 거든다.
 “뱅크시하고는 좀 달라.” 다무라 씨가 말했다. “나유타가 그린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얘기가 인터넷에 떠돌거든.”
야지 씨까지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살짝 분했다. 편집장의 가차 없는 지적이 뒤따랐다.
 “일반인들은 알 사람만 안다 쳐도, 이 업계에 있으면서 모른다면 좀 창피한 거거든.”
 “그러고 보니 뭔가 그런 얘기가 있었던 것 같네요.” 하고 되받았는데, 천연덕스럽게 들리지만 거짓말은 아니었다. 한때 인터넷에서 화제였던 소동이 어렴풋이 떠올랐던 것이다.
 “아, 네, 슬슬 기억나네요.” 내가 말했다. 
 “진짜요?” 야지 씨가 짓궂게 말했다. 
기억은 돌아오는데 정작 그림이 떠오르지 않았다. 당시에도 제대로 들여다보지는 않았던 것이리라. 컴퓨터 앞에 앉아 나유타를 검색했다. 화면에 뜬 그림을 보고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해부된 인간의 몸. 더욱이 그림의 범주를 뛰어넘는 압도적 묘사력. 
 “뭐예요, 이거! 사진 아니에요?”
 “유화.” 다무라 씨가 말했다.
 “이게요? 아니, 아무리 봐도 사진인데요…….”
 “상당히 튀는 작가이긴 해. 그래도 난 이 사람은 진짜라고 봐. 
언젠가 평가받을 날이 올 거야. 그걸 우리가 선점하고 싶다고.”
편집장이 저런 말을 할 정도라면. 호기심이 약간 일었다.
1  그림  7    
2  오필리아  17        
3  모습은 닮기 어렵고  26                
4  그림과 시와 노래  41            
5  화가들  60            
6  재회  76        
7  나유타  85            
8  반려  98            
9  까마귀 공원  109            
10 헌체  130        
11 아마라  159            
12 꽃의    거리  185            
13  벽화  214        
14  가나에 일기  223        
15  항하사(恒河沙)  252        
16  쓰미코의 이야기  264        
17  코로보쿠르의 뼈  277        
18  트릭  300        
19  스케치북  318        
20  인터뷰  333        
21  악령  344        
22  창고에서 꺼내기  361        
23  사신(死神)  378        
24  그림  396    
작가이미지
저자 이와이 슌지 (岩井 俊二)
1963년에 태어나 대학에서는 미술을 공부했다. 1988년에 뮤직비디오 업계에 발을 들인 이래 활동 영역을 확장, 1993년에는 TV드라마 〈쏘아올린 불꽃, 아래에서 볼까? 옆에서 볼까?〉를 연출, TV제작물로는 드물게 일본영화 감독협회 신인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1995년에는 첫 장편영화 〈러브레터〉를 발표, 일본은 물론 국경을 넘어 한국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얻으며 이와이 슌지라는 이름을 대대적으로 각인했다. 이후 〈스왈로테일 버터플라이〉〈피크닉〉〈4월 이야기〉〈하나와 앨리스〉〈라스트레터〉〈키리에의 노래〉 등 공개하는 영화마다 독특한 영상미를 자랑하며 ‘이와이 미학’을 펼치고 있다.

한편, 안노 히데아키 감독의 영화 〈식일〉에서는 주연배우로 활약하고, 동일본대지진 후 응원곡 ‘꽃은 핀다’의 작사를 맡는 등 시나리오, 작곡, 작사, 다큐멘터리, CM,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특히, 영상 못지않게 책이라는 매체에 대한 열정도 뜨거워 《러브레터》《스왈로테일》《윌리스의 인어》《랄리 슈슈의 모든 것》《뱀파이어》《립반윙클의 신부》《라스트 레터》《키리에의 노래》 등 소설, 《쓰레기통 극장》 등 에세이도 틈틈이 발표하고 있다.

《제로의 늦여름》은 그림 속 모델이 되면 반드시 죽는다고 해서 ‘사신’이라는 별명이 붙은 수수께끼의 화가 ‘나유타’와 그의 실체를 취재하는 기자의 여정을 쫓는 미스터리 장편소설이다. 미술에 대한 깊은 이해와 작가 특유의 섬세한 묘사를 담은 감각적 글쓰기가 독자들을 금세 이야기의 한복판으로 안내한다. 표지는 작가가 실제로 소설을 집필하는 데 모티프가 된 미에노 케이의 하이퍼리얼리즘 회화로 장식했다.
그의 그림 속 모델은 예외 없이 죽음을 맞이한다━━
‘사신’이라 불리는 수수께끼의 화가 나유타
금단의 도시전설을 파헤치는 추적의 드라마가 시작된다

“때로 그림은 일순 보는 사람을 매혹합니다.
뭔가가 마음에 새겨진다고 할까요. 형언하기 어렵죠.
그 감각을 소설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런 무모한 발상에서 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_이와이 슌지(출간 기념 인터뷰에서)
 
미술대학을 졸업한 뒤 광고 회사에 다니던 카논은 상사 등쌀에 질려 퇴사를 감행한다. 이후 지인 소개로 미술잡지 편집부에 수습기자로 들어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정규직 입사 테스트를 겸한 특집기사 작업을 맡게 된다. 기사의 테마는 화제의 화가 ‘나유타’ 심층 탐구. 본명도 얼굴도 알려지지 않은 이 복면 화가는, ‘사신’이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한데. 인터넷상의 소문에 따르면 그의 그림 속 모델은 예외 없이 죽는다고 한다. 과연 그는 저주를 그리는 사신일까?
 
카논은 고교 미술부 후배 가세, 전 직장 후배 하마사키 등의 도움을 받으며 나유타의 정체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조각조각 모은 힌트를 바탕으로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홋카이도 오타루를 찾고, 그가 다녔던 고등학교가 있는 가와사키에서도 탐문에 나선다. 나유타를 기억한다는 친구집을 방문하고, 어느 그림 속 모델의 지인을 찾아내 인터뷰에 성공한다. 그러던 중 나유타의 환상적인 미발표 작품을 눈앞에서 맞닥뜨리는 행운도 경험하면서 카논은 전대미문의 작가 나유타의 매력에 점점 더 깊게 빠져든다.
 
취재가 거듭될수록 카논의 탐색은 단순한 취재를 넘어 나유타와의 불가사의한 연결고리를 발견하는 여정이 되어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