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을 때까지 기다려
디저트 배는 따로 있잖아. 그렇게 말하며 히히덕거렸지만, 사실은 이대로 헤어지기가 아쉬운 마음도 있었다. 그때는 우리가 조금 더 오래, 혹은 자주 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 그런 날들이 계속될 거라고도 여겼다.
녹을 때까지 기다려 오한기,한유주,박소희,장희원,이지 저자
  • 2024년 09월 02일
  • 216쪽115X180mm비채
  • 978-89-349-1115-9 03810
녹을 때까지 기다려
녹을 때까지 기다려 저자 오한기,한유주,박소희,장희원,이지 2024.09.02
초콜릿, 이스파한, 젤리, 사탕, 슈톨렌
다섯 개의 디저트, 다섯 명의 작가, 다섯 편의 소설
다섯 명의 작가가 다섯 가지 ‘디저트’를 테마로 완성한 단편소설 앤솔러지. 오한기, 한유주, 박소희, 장희원, 이지 작가가 각각 초콜릿, 이스파한, 젤리, 사탕, 슈톨렌을 소재로 쓴 신작을 수록했다. 디저트의 종류가 다양한 만큼 작가들의 작품 역시 다양한 색채를 보여준다. 디저트로 쓴 소설이라니 달기만 할 듯하지만, 달콤하다가도 씁쓸해지고 또 의외의 신맛에 눈물이 찔끔 나기도 한다. 상큼한 맛을 즐기다가도 불현듯 아릿해지는 다채로운 이야기의 세계. 디저트라는 하나의 키워드에서 피어난 다섯 작가의 이야기에 취하다 보면 ‘소설만큼 무한한 글쓰기는 없다’는 새삼스러운 즐거움을 되새길 수 있다.
P.16
아, 맞다. 그 뭐냐…… 후장사실주의자라면서요?
어느 순간 장 원장이 물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걸 어떻게 아냐고 물었다. 장 원장은 여기 오기 전 인터넷에서 내 이름을 검색해봤다고 답했다. 얼마나 개성 있는 소설을 쓰면 후장사실주의자라는 별명이 붙었냐고 너스레를 떨면서.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스스로 붙였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웃음으로 때울 수밖에. 《문장웹진》에 올라가 있는 〈펜팔〉을 읽었다면서 반시대적이지만 그 반시대성이 오히려 시대성을 드러내는 것 같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펜팔〉을 읽고 왜 후장사실주의잔지 알았다니까요. 어떻게 이명박하고 펜팔하는 소설을. 기발한 걸 넘어 불순해 보이기도 하고요. 학부모님들이 작가님 소설을 읽어봤으면 기겁을 하셨을걸요. 그럼 진작 공부방도 망했을 텐데요.
P.58
“당신이 보는 것이 진짜 전생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는 게 아쉬워요.” 정민이 대답했다.
“마흔여섯 평생 스스로를 유물론자라고 여기며 살아왔는데,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다는 게 아이러니예요.” 민형이 말했다.
“제가 무너진 건물 잔해를 보고 있다고 하셨잖아요. 어떤 건물인지도 혹시 보셨나요?” 정민이 물었다.
“잔해뿐이었기에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방송국이나 체육관, 백화점처럼 커다란 종류의 상업 건물이었을 거예요. 당신 주변에 굉장히 많은 사람이 있었고, 카메라도 많았어요. 잔해 밑에도 굉장히 많은 사람이 있었을 거예요.” 민형이 말했다.
P.124
아마 어떤 젤리는 다른 젤리와 뒤섞여 오랜 시간을 박스 안에서 기다릴 것이다. 또 어떤 젤리는 꺼지지 않는 편의점의 환한 불빛 속에 있을 것이다. 어떤 젤리는 마트를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다, 자신을 호기심 어리게 바라보고 손가락으로 눌러보기도 하는 어린아이를 만나기도 할 것이다. 어떤 젤리는 다른 누군가에게 나눠주려는 기대에 찬 손에 쥐이기도 한다. 어떤 젤리는 한 노인을 만나 돌보며 함께 살아가고, 어떤 젤리는 여행을 다니고, 어떤 젤리는 열기에 녹아 형체를 잃고 다른 젤리들과 엉겨 붙는다. 어떤 젤리는 정체를 들키고 오랫동안 괴롭힘을 당한다. 어떤 젤리는 유통기한이 지나서 봉지째 쓰레기통에 버려지고, 어떤 젤리는 방 어딘가에서 영원히 잊히고, 어떤 젤리는 다른 젤리들에게 계속 말을 걸지만 아무 대답도 듣지 못한다. 어떤 젤리는 그 사람을 찾아가고, 어떤 젤리는 자신의 삶을 살고, 어떤 젤리는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인다.
P.148
“예전에는 단 게 좋다고 했잖아.”
나는 한때 자주 단것을 먹자고 했던 선영과 연주를 떠올렸다. 을지로에 숨겨진 작은 카페나 빵집에 가서 혀가 무감각해질 정도로 단 과자나 아이스크림, 커피를 마시기도 했었다. 단맛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지만, 함께 밥을 먹은 후 디저트를 먹기 위해 그런 장소들을 찾아다니던 게 즐거울 때도 있었다. 디저트 배는 따로 있잖아. 그렇게 말하며 히히덕거렸지만, 사실은 이대로 헤어지기가 아쉬운 마음도 있었다. 그때는 우리가 조금 더 오래, 혹은 자주 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 그런 날들이 계속될 거라고도 여겼다.
P.182
나는 어땠을까. 루니와 나는 침묵하는 시간이 길었다. 같은 드라마를 보면서도 다른 생각을 했을 것이다. 넘치는 열정으로 국경을 넘을 때만 우리는 잠시 아름다웠던 것 같다. 아니 그것도 모르겠다. 호르몬의 일이 타인에게 아름다울지는.
나는 십 년 전 조카, 그러니까 이부 언니의 딸에게서 애인을 빼앗았다. 하지만, 사람이든 사랑이든 뺏는다는 게 실제로 가능한가? 그러므로 나는 그것에 일말의 죄책감이 없었다. 무엇보다 죄책감이란 죄를 짓고 난 이후, 여유가 생긴 어느 미래에 비로소 생기는 건데 내게는 그런 시간이 오지 않았으므로 불가능했다. 언니와 나는 나이 차가 컸고, 조카와는 자매 같았다. 나는 그때 그런 짓을 벌이면서도 이 모든 일의 근원에는 어머니가 있다고 생각했다. 누가 이런 가정을 만들라고 했나. 누가 셋을 자매처럼 자기 근거리에 가둬놓으래. 누가, 누가. 다 이건 어머니가 원인이다, 라고.
오한기 〈민트초코 브라우니〉 - ‘초콜릿’
곤경에 처한 작가가 있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글쓰기 공부방을 운영하던 중, 지역 인터넷 커뮤니티에 그의 사상을 의심하는 글이 올라온다. 작가는 누구보다 ‘정상적이고 건전한’ 소설을 써서 자신을 증명하기로 한다.

한유주 〈세계의 절반〉 - ‘이스파한’
치과의사가 어느 날부터 타인의 전생을 볼 수 있게 된다. 자신은 태어나지도 않은 시대의 짤막한 장면들. 주변 사람들의 전생, 자꾸 떠오르는 무너진 건물, 알 수 없는 일상에서의 패턴들……. 여기에 무슨 의미가 담긴 걸까?

박소희 〈모든 당신의 젤리〉 - ‘젤리’
곰 모양 젤리를 먹던 중 젤리 하나가 말을 걸어온다. 자신은 원래 사람이었고, 생전 기억을 지닌 채로 젤리가 되었다는 이야기. 젤리는 젤라틴으로 된 팔을 흔들며 자신의 소원을 하나만 들어달라고 한다.

장희원 〈박하사탕〉 - ‘사탕’
오랫동안 연락 없이 만나지도 않고 지낸 친구들. 두 사람은 함께 가까이 지내던 친구의 부고를 듣는다. 어쩌면 오늘이 지나면 다시 만나지 않을 수도 있다. 두 사람은 화장터 근처 추모 공원에서 미묘한 산책을 시작한다.

이지 〈라이프 피버〉 - ‘슈톨렌’
집을 떠나 해외에서 살다, 십 년 만에 돌아온 엄마의 집. 나의 방이 에어비앤비로 쓰일 뿐, 가족들과의 까끌까끌한 관계는 변하지 않은 듯하다. 그들은 독일의 크리스마스 빵, 슈톨렌을 나눠 먹으며 오랜만에 대화를 나눈다.
작가이미지
저자 오한기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2012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의인법》 《바게트 소년병》, 장편소설 《홍학이 된 사나이》 《나는 자급자족한다》 《가정법》, 중편소설 《인간만세》 《산책하기 좋은 날》 등을 썼다. 제7회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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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한유주
2003년 단편소설 〈달로〉로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달로》 《얼음의 책》 《나의 왼손은 왕, 오른손은 왕의 필경사》 《연대기》, 장편소설 《불가능한 동화》가 있다. 한국일보문학상, 김현문학패를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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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박소희
제14회 대산대학문학상에 〈스물세 번의 로베르또 미란다〉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2017년 한국예술창작아카데미 차세대 예술가로 선정됐다.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사창작과 전문사 과정을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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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장희원
201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우리의 환대》가 있다. 제11회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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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지
201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얼룩, 주머니, 수염〉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담배를 든 루스》로 제7회 중앙장편문학상을 수상, 소설집으로 《나이트 러닝》이 있다. 두 고양이 토란, 살구와 함께 살고 있다.
다섯 가지 디저트에서 피어난 다섯 가지 세계
일상 밖으로 질주하는 소설적 상상력의 향연
디저트란 무엇일까. 당연히 아는 것 같지만 막상 한마디로 정의하려면 어렵다. 식사 후에 먹는 것? 그렇다면 쓰고 떫은 것도, 맵고 짠 것도, 뭐든지 디저트가 될 수 있을까?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있다. 디저트는 배를 채우기보다 마음을 채워준다는 것, 지난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게 해준다는 것. 《녹을 때까지 기다려》는 다섯 명의 작가가 각자 하나씩의 디저트를 소재로 쓴 단편소설 앤솔러지다. 오한기, 한유주, 박소희, 장희원, 이지― 일상적 질서를 받아들이기보다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쌓아온 작가들은 각각 초콜릿, 이스파한, 젤리, 사탕, 슈톨렌에서 영감을 받아 형형색색의 세계관을, 평범한 일상 밖의 소설적 상상력을 펼쳐 보인다.
 
관습을 비틀면서 새로운 세계를 구축해온 오한기는 신작 〈민트초코 브라우니〉에서 아이들 대상 공부방을 운영하고자 누구보다 ‘멀쩡한’ 소설을 써내야 하는 작가의 이야기를 선보인다. 독보적인 스타일로 문학적 실험을 거듭하는 한유주의 〈세계의 절반〉에는 다른 사람들의 전생을 보게 된 치과의사가 등장한다. 특유의 이지적이고 섬세한 문체를 만장일치로 상찬받으며 데뷔한 박소희의 〈모든 당신의 젤리〉에는 말하는 젤리가 등장해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기를 부탁한다. 관계가 부서지는 지점을 사려 깊게 들여다보는 장희원은 〈박하사탕〉에서 절교한 친구들이 오랜만에 만나 걷는 산책길로 독자의 손을 잡아 이끈다. 상처 입은 이들의 세계를 환상성과 유머로 보듬어온 이지는 〈라이프 피버〉에서 십 년 만에 재회한 엄마와 빵을 나눠 먹는 풍경을 그린다.

독서 감정 흐름을 고려한 독자 중심적 구성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아름다운 만듦새
저자 이름 가나다순으로 작품 배열하는 일반적 방식과 다르게, 《녹을 때까지 기다려》는 독자의 감정 흐름을 고려해 작품 수록 순서를 정했다. 한 장의 음반을 듣는 것처럼 소설을 한 편씩 순서대로 읽어가면 독자는 기쁨에서 초조함으로, 미소에서 눈물로, 염려에서 통쾌함으로 여러 감정을 차례로 통과하게 된다. 작품 간 경계는 희미해지고 소설로 세공한 상상력의 세계가 형성된다. 그러나 사실 어느 작품을 먼저 읽어도 좋다. 다섯 작가의 소설은 모두 자기만의 방식으로 매력적이므로, 취향대로 디저트를 골라 먹듯이 원하는 순서대로 읽어도 색다른 감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세련된 디자인과 부담 없는 판형은 《녹을 때까지 기다려》의 만듦새를 한층 높여준다. 트렌디한 화풍으로 음반 재킷과 문학 도서 표지를 다수 작업하며 주목받는 권서영 그림작가의 일러스트로 표지와 내지를 단장했다. 어느 가방에도 들어갈 수 있는 판형은 소장욕을 자극한다. 어디든 가져갈 수 있는, 한 손에 들어오는 비일상의 틈. 비채는 한국 작가들과 함께하는 앤솔러지를 앞으로도 이어나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