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성문단 바깥에서 발아한 자유로운 상상력
SF의 다채로운 세계관으로 찬연하게 피어나다
《로드킬》의 작가 아밀(본명 김지현)은 문단이라는 관습적 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폭넓은 문학적 활동을 펼쳐왔다. 아밀이라는 필명으로 ‘환상문학웹진 거울’, ‘공동창작프로젝트 ILN’, ‘브릿G’ 등 다수 지면에 소설을 발표해왔고, 번역가로서는 본명으로 활동하며 《흉가》 《복수해 기억해》 《캐서린 앤 포터》 《조반니의 방》 등 다양한 장르의 영미문학을 우리말로 옮겼다. 충실한 독자이자 번역가로서 쓴 산문집 《생강빵과 진저브레드-소설과 음식 그리고 번역 이야기》를 펴내기도 했다. 또한, 개인 메일링 서비스를 통해 구독자들에게 에세이를 편지처럼 전달하기도 한다.
아밀의 다채로운 세계관은 이처럼 문단 바깥에서 더 활짝 피어났다. 《로드킬》에 수록된 소설 여섯 편은 독립문예지 ‘소녀문학’과 ‘환상문학웹진 거울’ 등에 발표된 소설로, 발표 지면이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만큼 다양한 분량과 소재, 서술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라비〉는 기성문단에서 보기 힘든 중편소설로서 방대한 세계관을 펼쳐나가고, 표제작 〈로드킬〉은 근미래 디스토피아라는 세계관을 단편의 분량에 알맞게 직조한다. 코로나 19 이후의 한국 사회를 여러 인물의 시선을 교차하며 그려낸 〈오세요, 알프스 대공원으로〉, 스릴러의 플롯으로 가스라이팅과 문단 내 성폭력을 다룬 〈외시경〉 등 모든 수록작이 저마다 고유한 호흡으로 완결성을 뽐낸다.
자신과 닮은 영웅을 기다려온 소녀들에게…
방상호 일러스트레이터의 표지로 담아낸 《로드킬》의 신세계
SF의 약진과 페미니즘 문학의 부상은 최근 한국소설의 두드러진 경향이다. 별개의 것으로 보이는 두 현상은 사실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젊은 작가들은 낯선 세계관과 미래의 이야기, 억압을 벗고 나아가는 인물들을 담아내는 도구로 SF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 그릇에 담기는 새로운 인물들은 필연적으로 여성·소수자여야 한다. 그런 면에서 아밀의 소설은 바로 오늘의 독자를 위한 소설이다. 또한, 아밀의 소설에는 고전적 주제의식도 담겨 있다. 저자는 곤경에 빠진 처녀(a damsel in distress)라는 오래된 문학적 테마를 살려 쓰고 싶었다고 스스로 밝힌 바 있다. 이럴 때 신화 속 영웅들은 대개 길을 떠날 것이나, 소녀에게는 모험이 권장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밀의 소녀들은 길을 떠난다. 초인적인 힘도, 대단한 조력자도, 도전적인 완전무결함도 없이. 소녀들은 내면의 순수를 간직한 채 오히려 세상을 신기한 듯 바라본다.
《로드킬》 표지를 장식한 일러스트 역시 작품의 주제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그림을 그린 방상호 일러스트레이터는 BTS의 정규 4집 앨범 ‘Map Of The Soul: 7’과 NCT의 미니앨범 ‘Cherry Bomb’의 자켓을 작업한 바 있는 세계적 아티스트로, 《로드킬》의 표지가 된 일러스트 ‘ego’는 태초의 여성이 날것의 세계를 직면하는 듯한 장면을 보여준다. 사회적 억압과 차별, 혐오 등 《로드킬》은 분명 무거운 주제를 담아냈지만, 그것을 기성세대처럼 엄숙하게만 재현하지는 않는다. 특히 표제작 〈로드킬〉의 말미에 “이 소설을 걸그룹 오마이걸에게 바칩니다”라며 아이돌 문화에 영감을 받았음을 밝히는 헌사는, 아밀의 작품 세계가 동시대성에 바탕했음을 당당히 드러낸다. 그리하여 《로드킬》은 이 시대에도 사회 문제와 맞서는 문학이 쓰이고 있음을, 그것이 기성세대가 “유치하다”고 비난하던 젊은 세대의 손으로 쓰이고 있음을 증명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