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킬
“우리 도망치자, 더 위험한 곳으로.” 스스로 구원이 된 소녀들의 이야기. 2018, 2020 SF어워드 수상작 수록!
#SF#단편집
로드킬 아밀 저자
  • 2021년 07월 07일
  • 292쪽131X204mm무선김영사
  • 978-89-349-8873-1 03810
로드킬
로드킬 저자 아밀 2021.07.07
“우리 도망치자, 더 위험한 곳으로.”
스스로 구원이 된 소녀들의 이야기
2018, 2020 SF어워드 수상작 수록!

‘환상문학웹진 거울’, ‘공동창작프로젝트 ILN’, ‘브릿G’ 등 기성문단 바깥 플랫폼에서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해온 소설가 아밀의 첫 SF 소설집. 2018 SF어워드 중·단편소설 부문 우수작 〈로드킬〉, 2020 SF어워드 중·단편소설 부문 대상 〈라비〉를 포함하여 총 여섯 편의 소설이 수록되었다.

아밀의 작품에는 거의 매번 소녀들이 등장한다. 아직 세상을 알지 못하는 이 소녀들에게 세상은 소년들에게 하듯 문을 열고 나오라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늘 희귀하고 신비로운 존재였다’는 표제작 〈로드킬〉의 문장이 말해주듯, 아밀의 소녀들은 사회의 규범 속 박제된 존재들이다. 《로드킬》의 내용은 이 박제된 존재들이 저마다의 방법으로 문을 열고 나와 세상과 마주하는 과정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미래 사회 보호소에서 양육되며 결혼하기를 기다려야 하는 소녀들(〈로드킬〉), 현대문명에 둘러싸인 소수민족 거주지의 마지막 샤먼(〈라비〉), 미세먼지 청정지역과 그 밖으로 거주 계급이 나뉜 근미래 한국(〈오세요, 알프스 대공원으로〉)……. 독자들은 억압에 맞서 한 걸음씩 내딛는 주인공들을 숨죽인 채 지켜본다. 그리고 정교한 플롯을 따라간 끝에 그들이 자신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깨닫는다. 《로드킬》은 아밀의 오랜 독자는 물론, 아밀을 처음 만나는 이들에게도 세계가 확장되는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다.
P.13
정부에서는 우리를 소수인종이라고 부른다. 정확한 공식 분류는 ‘1급 보호대상 소수인종’으로, 인류 문명 전체의 공익을 위해서 반드시 보호해야 하는 인종이라는 뜻이다. 즉 머지않은 미래에 멸종해버릴 거라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진화에서 도태되었다. 개나 다람쥐나 고라니가 그랬듯, 참새나 꿩이나 까마귀가 그랬듯, 점진적이고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감소했다. 아무도 우리가 도태되어 사라질 지경에 이르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너무 흔하고 너무 많았으니까. 이제 와서는 믿을 수 없는 전설처럼 들리지만, 한때 우리는 전 세계 인구 절반을 차지했었다. 그때만 해도 우리는 그저 ‘인간 여자’였고, 지구의 아무 데서나 터전을 꾸리고 살았다고 한다.
P.66
라비는 열여섯 살 때까지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 동안 할머니가 죽기를 빌었다.
라비는 할머니의 양육 방침을 견딜 수 없었다. 할머니는 라비가 공용어를 쓰지 못하게 금지했다. 자신 외에는 아무도 쓰지 않는 옛말만을 가르쳤고, 라비가 이웃들에게서 주워들은 공용어를 떠듬떠듬 입에 올리는 것을 들으면 호되게 야단을 쳤다. 라비는 다른 아이들처럼 학교에 갈 수도 없었다. 라비의 교사는 할머니뿐이었고, 라비의 학교는 마을에서 가장 호젓한 곳에 자리한 방 두 칸짜리 집과 거기에 딸린 뒷마당, 그리고 그 뒤에 펼쳐진 숲과 연못뿐이었다. 그곳에서 라비는 옛날이야기와 노래, 미신, 민간요법 따위를 배웠다. 나무껍질을 얼기설기 짜서 엮은 옷을 걸치고 얼굴을 무시무시한 색깔로 칠하고 춤을 추는 법. 식물의 열매를 짓이기거나 뿌리를 태우거나 기름을 짜내는 법. 야자의 속을 파내거나 가루를 내고 죽을 쑤는 법. 뒷마당에서 할머니가 키우는 닭과 꿩의 고기를 가지고 질릴 대로 질린 음식을 질리도록 만드는 법.
P.140
두 아들 모두 아주 성에 차지는 않아도 그럭저럭 봐줄 만한 여자에게 장가를 들였다. 죽을 때까지 먹고살 걱정은 없을뿐더러 자식들에게 물려줄 집도 있고 이 집은 계속해서 가격이 오를 것이다. 유일한 불만이라면 너무 빨리 하늘나라로 가버린 남편의 빈자리였다. 경숙은 남편이 지금 자신과 함께 세상을 보고 있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하다. 대기질이 삶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척도가 되고, 정부에서 감염병 관리를 위해 인구를 분산시키려는 목적으로 저개발 지역에 우선적으로 공기청정탑을 세우고, 결국 그 지역들의 집값이 껑충 뛴 이 세상.
P.151
요즘 ‘강시병’ 때문에 한창 뉴스가 시끄럽기는 하다. 가난한 집 애들이 곧잘 걸리는, 얼굴이 푸르스름해지고 부자연스러운 몸짓으로 강시처럼 발작을 하는 병 말이다. 성규의 과에도 그런 애가 한 명 있는데, 강의 중에 발작을 일으키는 바람에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 애는 자기가 음영지대 출신이라는 티를 조금도 내지 않았고 언제나 비싼 옷을 입고 다녔기에 더욱 충격적인 일이었다. 하여간 없는 집에서 자란 애들이 더 허세가 심하다. 형편이 좀 나아지니 그 사실을 어떻게든 과시하고 싶어서 안달을 하지만, 가난했던 과거는 어떻게든 들통이 나게 되어 있다.
P.184
“그 집은 빈집이야. 그리고 지금은 겨울이고.”
남편은 지극히 과학적인 사실을 말하듯 선언한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나는 남편에게 어쩐지 화가 난다. 하지만 내 감정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남편이 조금 누그러진 표정으로 말한다.
“자다가 꿈꾼 거 아니야?”
“그런 것 같지는 않아요.”
“어제 약 안 먹었지?”
나는 고개를 저으려다 멈칫한다. 기억을 돌이켜본다. 어제 저녁 약을 빠뜨렸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 걸 보면 그런 듯하다.
“약통에 약이 그대로 있더라고. 그러면 안 돼. 약을 잘 먹어야지. 그래야 잠도 잘 자고.”
“……환각 증상은 아직 겪어본 적 없어요.”
“알아, 알아. 내 말은, 네가 환각을 봤다는 게 아니라, 비몽사몽 간에 착각한 것 같다는 얘기야. 꿈자리도 사납고. 새집이라 어수선하고. 그렇잖아.”
P.245
나도 몇 번이고 다시 싸우려고 해. 내 말들이 아무리 조악할지라도, 모조리 훔쳐온 단어들뿐일지라도, 언젠가는 다 잊힌다 해도…… 단 한 순간이라도 당신을 만나 입을 맞출 수만 있다면.
그래서 지금 나는 당신을 부르고 있어. 이름 없는 당신을 부르는 것이 당신에게 다다르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지라도. 내가 이렇게 함으로써 당신을 영영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이 나를 두렵게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당신을 부르고 있어.
P.253
마을 전체가 처녀를 감시하고 있다. 처녀는 바깥세상이 어떤지 알지 못하며, 그런 세상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온다 하더라도 그것은 가상이고 소문이며 옛날이야기일 뿐이다. 사실상 처녀에게 허락되는 자유는 천에 무엇을 수놓을 것인가밖에 없다. 바다와 섬 외에는 아무것도 내다보이지 않는 창문 앞, 볕이 잘 드는 자리에 처녀는 수틀을 매고 앉아서, 마을 사람들이 아낌없이 마련해주는 비단을 두고 곰곰이 상상한다. 가본 적 없는 초록빛의 초원을, 눈이 하얗게 덮인 산봉우리를, 바람에 물결치는 황금빛의 보리밭을, 도성의 으리으리한 궁궐과 정원을, 떠들썩한 시장 좌판의 사람들을, 매화와 수련과 개나리와 작약과 또 이름 모를 무수한 꽃들의 자욱한 향기를, 머나먼 이국의 코끼리와 원숭이와 살갗이 검은 여인들을, 자신을 팔아넘긴 어머니와 아버지의 얼굴을, 꿈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낭군의 얼굴을. 그리고 마음속에 떠오른 밑그림을 먹으로 옮긴 다음 그 위에 색색의 명주실로 한 땀 한 땀 수를 놓는다. 처녀의 세계는 수틀 위에서 형체와 색채를 한 겹 한 겹 덧입고 마침내 생명을 얻는다.

로드킬

라비

오세요, 알프스 대공원으로

외시경

몽타주

공희

 

작가의 말

작가이미지
저자 아밀
소설가이자 번역가, 에세이스트. ‘아밀’이라는 필명으로 소설을 발표하고, ‘김지현’이라는 본명으로 영미문학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창작과 번역 사이, 현실과 환상 사이,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문학적인 담화를 만들고 확장하는 작가이고자 한다. 단편소설 〈반드시 만화가만을 원해라〉로 대산청소년문학상 동상을 수상했으며, 단편소설 〈로드킬〉로 2018 SF어워드 중·단편소설 부문 우수상을, 중편소설 〈라비〉로 2020 SF어워드 중·단편소설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쓴 책으로 산문집 《생강빵과 진저브레드―소설과 음식 그리고 번역 이야기》가 있으며, 《끝내주는 괴물들》 《흉가》 《복수해 기억해》 《캐서린 앤 포터》 《조반니의 방》 등의 작품을 우리말로 옮겼다.

사진 ⓒ 307STUDIO
기성문단 바깥에서 발아한 자유로운 상상력
SF의 다채로운 세계관으로 찬연하게 피어나다
《로드킬》의 작가 아밀(본명 김지현)은 문단이라는 관습적 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폭넓은 문학적 활동을 펼쳐왔다. 아밀이라는 필명으로 ‘환상문학웹진 거울’, ‘공동창작프로젝트 ILN’, ‘브릿G’ 등 다수 지면에 소설을 발표해왔고, 번역가로서는 본명으로 활동하며 《흉가》 《복수해 기억해》 《캐서린 앤 포터》 《조반니의 방》 등 다양한 장르의 영미문학을 우리말로 옮겼다. 충실한 독자이자 번역가로서 쓴 산문집 《생강빵과 진저브레드-소설과 음식 그리고 번역 이야기》를 펴내기도 했다. 또한, 개인 메일링 서비스를 통해 구독자들에게 에세이를 편지처럼 전달하기도 한다.
 
아밀의 다채로운 세계관은 이처럼 문단 바깥에서 더 활짝 피어났다. 《로드킬》에 수록된 소설 여섯 편은 독립문예지 ‘소녀문학’과 ‘환상문학웹진 거울’ 등에 발표된 소설로, 발표 지면이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만큼 다양한 분량과 소재, 서술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라비〉는 기성문단에서 보기 힘든 중편소설로서 방대한 세계관을 펼쳐나가고, 표제작 〈로드킬〉은 근미래 디스토피아라는 세계관을 단편의 분량에 알맞게 직조한다. 코로나 19 이후의 한국 사회를 여러 인물의 시선을 교차하며 그려낸 〈오세요, 알프스 대공원으로〉, 스릴러의 플롯으로 가스라이팅과 문단 내 성폭력을 다룬 〈외시경〉 등 모든 수록작이 저마다 고유한 호흡으로 완결성을 뽐낸다.
 
자신과 닮은 영웅을 기다려온 소녀들에게…
방상호 일러스트레이터의 표지로 담아낸 《로드킬》의 신세계
SF의 약진과 페미니즘 문학의 부상은 최근 한국소설의 두드러진 경향이다. 별개의 것으로 보이는 두 현상은 사실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젊은 작가들은 낯선 세계관과 미래의 이야기, 억압을 벗고 나아가는 인물들을 담아내는 도구로 SF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 그릇에 담기는 새로운 인물들은 필연적으로 여성·소수자여야 한다. 그런 면에서 아밀의 소설은 바로 오늘의 독자를 위한 소설이다. 또한, 아밀의 소설에는 고전적 주제의식도 담겨 있다. 저자는 곤경에 빠진 처녀(a damsel in distress)라는 오래된 문학적 테마를 살려 쓰고 싶었다고 스스로 밝힌 바 있다. 이럴 때 신화 속 영웅들은 대개 길을 떠날 것이나, 소녀에게는 모험이 권장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밀의 소녀들은 길을 떠난다. 초인적인 힘도, 대단한 조력자도, 도전적인 완전무결함도 없이. 소녀들은 내면의 순수를 간직한 채 오히려 세상을 신기한 듯 바라본다.
 
《로드킬》 표지를 장식한 일러스트 역시 작품의 주제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그림을 그린 방상호 일러스트레이터는 BTS의 정규 4집 앨범 ‘Map Of The Soul: 7’과 NCT의 미니앨범 ‘Cherry Bomb’의 자켓을 작업한 바 있는 세계적 아티스트로, 《로드킬》의 표지가 된 일러스트 ‘ego’는 태초의 여성이 날것의 세계를 직면하는 듯한 장면을 보여준다. 사회적 억압과 차별, 혐오 등 《로드킬》은 분명 무거운 주제를 담아냈지만, 그것을 기성세대처럼 엄숙하게만 재현하지는 않는다. 특히 표제작 〈로드킬〉의 말미에 “이 소설을 걸그룹 오마이걸에게 바칩니다”라며 아이돌 문화에 영감을 받았음을 밝히는 헌사는, 아밀의 작품 세계가 동시대성에 바탕했음을 당당히 드러낸다. 그리하여 《로드킬》은 이 시대에도 사회 문제와 맞서는 문학이 쓰이고 있음을, 그것이 기성세대가 “유치하다”고 비난하던 젊은 세대의 손으로 쓰이고 있음을 증명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