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디 정해진 길, 그런 길은 없다.
가면 열리는 길, 그런 길은 있다.”
이런 스님, 이런 어른을 기다렸다!
지식인이 사랑하는 문장가 법인 스님,
우리가 잊고 사는 것을 되돌아본다
역병 재난의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할까. 온갖 폭력이 도사린 사회를 밝게 만들 해결책은 없을까. 왜 괴롭고 외롭고 화가 나는 것일까. 주어진 길을 따라가지 않고 주체적으로 살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이런 물음에 답을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 전하는 단 하나의 키워드, 중심.
《중심》의 저자 법인 스님은 중학교 3학년이던 1976년 출가하여 46년간 수행길을 걸으며 농사를 짓는 농민, 귀촌한 가족, 위안부 할머니 등 여러 사람을 두루 만나며 “세상사에 무관심”(294쪽)하지 않고, 승속을 넘어선 혜안을 키웠다. 산중 수행자로서 문학과 인문학을 넘나들며 공부를 멈추지 않았고, 대표적인 시민단체인 참여연대 공동대표로서 낮고 연약한 목소리들에 귀를 기울이며 법석이는 현장에서 중심을 지켰다. 그래서 황지우 시인은 “이 책의 제목 《중심》은 어쩌면 당신의 위치이기도 하다”(5쪽)라고 말했다.
법인 스님은 말한다. 꿈쩍 않는 고집불통 같은 중심이 아닌, 사유하고 받아들이며 단단해지는 중심이 필요하다고. 승자 독식의 사회에서 “움켜쥔 손 다시 털어버리”(52쪽)고 힘든 이들과 나누며 살 때 세상의 중심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스님이 맑은 글들을 죽 따라 읽다보면 망망대해 같은 인생길의 방향이 잡히고, 어느새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에 당도한다.
감은 눈을 뜨게 하는 글이 절실할 때마다 여러 매체에서 법인 스님을 찾았다. 지식인들 사이에서 소위 ‘글 잘 쓰는 스님’으로 불리는 문장가 법인 스님. 때로는 흐트러진 일상을 바로 잡는 죽비 같은 글, 때로는 가슴 먹먹하게 심금을 울리는 글을 써온 스님이 오랜 수행과 만남에서 길어올린 사유를 만나보자.
구심점을 잃은 환난의 시대에
나를 바로 세우기 위한
사는 일, 세상일, 닦는 일
이 책 《중심》은 2015년 5월부터 2021년 1월까지 법인 스님이 일간지와 월간지에 연재한 칼럼 그리고 미발표 원고를 모아 엮은 산문집이다. 지난 6년여간 수행자의 소임을 다하면서 혼란의 연속인 우리 사회의 면면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1부 ‘사는 일’은 삶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행복에 이를 수 있는가에 대해 법인 스님이 사유한 글들을 모았다. 산중 템플스테이에서 나눈 대화부터 산문山門을 열고 세상 사람들과 호흡하며 나눈 이야기까지 가득하다. 고 정주영 회장에게 들은 절밥에 얽힌 이야기가 구의역에서 사고를 당한 청년이 남긴 갈색 가방 속 컵라면에 대한 단상으로 이어지며, 밥이란 무엇이고 인간은 어떻게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가를 되새겨본다. 초등학생 자녀를 둔 아빠가 아들과 딸의 손목에 풀꽃 시계를 만들어준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는 소중한 것들이 참 많다”(39쪽)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특히 스님은 벗들과 차담을 나누기를 좋아하는데, 차를 앞에 두고 지인들과 나눈 담소는 옹글어 인생의 시선을 넓혀준다.
우리에게 행복은 무엇인가?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행복은 거창하거나 멀리 있지 않다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돈을 많이 벌고 호화로운 집을 소유하고 명품을 소비하는 일이 아니라고.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복이 아니라 스스로 가슴으로 느끼는 행복이 진짜다. _58쪽
2부 ‘세상일’은 요동치는 세상에서 중심을 잡고자 고군분투했던 참여적 주제의 글들을 모았다.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등 뼈아픈 슬픔을 직시하고 어루만지며, 세월호 참사, 촛불시민혁명 등 정의가 바로 서지 못한 사회 풍경을 조명하고 공생의 길에 주목한다. 카뮈의 소설 《페스트》 속 상황을 비추어 팬데믹 시대에 잠복한 부조리를 성찰한다. 또 고용 불안, 청년 실업 등 입에 풀칠도 못 하고 사는 사람에 대한 연민과 애정 어린 시선도 잊지 않는다. 슬픔을 외면하지 않고 슬픔에 가까이 다가가는 법인 스님의 성정은, 청년 시절 5․18민주화운동을 겪으면서 인간과 종교의 역할에 대해 생각했고, 이순에 가까워지기까지 시를 비롯한 문학을 사랑한 데에서 비롯한 것일 터이다.
감정을 앞세우지 않고 사유를 드러내 우리를 반성하게 하는 스님의 글은 품격 있다. 갑질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던 대기업 회장님에게 보내는 편지는 학교 폭력, 가정 폭력, 성폭력 등으로 파문을 일으킨 사람들뿐만 아니라 잘못을 저지른 뒤 회피하기에 바쁜 이들에게 진정한 반성의 의미를 되짚게 한다.
회장님! (…) 불가에서는 자신의 행위를 진심으로 뉘우치는 ‘이참理懺’과 피해를 준 사람들에게 정직한 고백을 하고 보상을 해주는 ‘사참事懺’이라는 참회의 방식이 있습니다. 사참이 없는 참회는 이참도 인정받지 못합니다. 묻습니다. 당신은 왜 지금 진정한 사참을 하지 않습니까? _108~109쪽
3부 ‘닦는 일’은 ‘괴로움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고통을 다스려야 하는가’ ‘말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말그릇을 깨끗하게 만들 수 있는가’ ‘공부란 무엇이며 어떻게 마음을 닦아야 하는가’ 등 ‘몸과 마음을 갈고 닦는 수행’에 관한 글들을 모았다. 법인 스님은 “책을 읽고 틈틈이 농사일을 돕고”(116쪽), 노스님과 밤샘 토론을 하는 등 온몸으로 수행하면서, “세간에 살아가는 시민의 수행은 특별한 명상과 기도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생각과 언행을 바꾸고 삶의 방식을 바꾸는 일도 수행”(293쪽)이라고 전한다.
고요한 시간에 정직하게 자신을 응시해본다면 자기 내면에 도사린 화를 알 수 있다. (…) 화가 나고 불안하고 고립감을 느낄 때는 멈춰야 한다. 왜 멈추는지 묻는다면, 살피기 위해 멈춰야 한다고 답하겠다. 그리고 내면에 깃든 어둠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어두운 여러 모습이 나에게 깃들어 있음을 고백해야 한다. 멈추면 보이고 바라보면 사라진다. 어두운 모습이 사라진 자리에 평온과 기쁨이 찾아온다. 그래서 ‘텅 빈 충만’이라고 하지 않는가. _210~211쪽
화려한 꽃이 소박한 야생화를
깔보지 않는 세상을 위하여
나를 올곧게 지켜내며 참여하고 연대한다
법인 스님의 글은 불교라는 종교에 국한되지 않고 ”어느 누구도 주눅 들지 않는 꽃들이 어우러진 꽃밭“(295쪽), 즉 화엄華嚴을 보여준다. 신부님, 목사님 등 여타 종교인과 경계를 두지 않고 소통하며 청년들, 농민들, 노동자들과 더불어 살고 있으니 글의 품이 넉넉한 건 당연한 이치겠다. 소위 “장가도 안 간 스님이 어떻게 세상일을 속속들이 아느냐고”(294쪽) 묻곤 하는데, 이에 대해 법인 스님은 “산과 강에서 흘러나오는 온갖 백천 지류의 물들이 바다에 모이듯, 여러 사람과 사연이 모여드는 곳이 절집이다. (…) 여러 사연과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절집엔 늘 잡설의 꽃이 핀다. 잡설이 모이면 경전이 된다”라고 답하며, 사람 사는 내음을 품되 강골 있는 언어로 참여와 연대의 길로 우리를 안내한다.
우리가 참여하고 연대할 때 소홀해서는 안 될 것들이 있다. 부당한 세상에 맞서면서도 ‘나’를 올곧게 지켜내는 일이다. 왜냐면 저마다의 ‘나’가 확장하여 관계를 맺으면서 세상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_100쪽
법인 스님은 잠깐 편해지는 위로를 건네지 않는다. 오래 곱씹게 되는 일침을 전한다. 어쩌면 이 책 《중심》은 스님의 반성문이자 소리 없는 분투기에 가깝다. 무균실과 같은 세상은 없다. 너무 맑은 물에는 물고기가 살 수 없는 법이다. 하지만 물이 조금만 탁해져도 물고기는 아가미를 여닫을 수 없다. 물이 오염되면 물고기는 숨을 거두게 된다. 물이 세상이라면 물고기는 사람이다. 티끌 하나 없는 물은 있을 수 없지만, 오염물이 넘쳐 흐르는 세상을 정화할 필요는 있다. 이런 세상에서 새삼 다시 《중심》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내가 서 있어야 할 ‘바탕’에 내가 서 있고/ 내가 가야 할 ‘방향’으로 내가 길을 가면/ 그곳이 바로 ‘중심’이다.// 천길 벼랑 끝의 나뭇가지 붙잡고 있는 그대, 당장 그 손을 놓으시라./ 천길 벼랑 끝에 서 있는 그대, 당장 한 걸음 내딛어라.// 지금 여기, 머뭇거릴 이유 없네. _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