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니터보다 정원이 더 많은 세계를 담고 있다”
《피로사회》의 한병철 신작. 한국-독일 동시출간!
사계절 꽃이 피는 정원에서 결실한 ‘땅의 예찬’
정원의 철학자가 전하는 땅을 향한 갈망과 사랑의 노래
겨울에도 꽃을 피우는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겠노라 결심한 한병철은 3년 동안 온몸이 녹초가 될 정도로 땅을 일구며 비밀의 정원을 가꾸었다. 그곳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 모든 계절을 겪는 동안, 디지털 세계에서 잃어가던 현실감, 몸의 느낌이 되돌아오는 것을 경험했다. 정원 일을 하면서 그는, 변화된 공간감각과 시간감각에 대해, 기다림, 인내와 희망에 대해, 색깔과 빛과 향기에 대해, 수국과 옥잠화에 대해,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와 낭만주의에 대해, 삶과 죽음에 대해 철학적으로 명상한다. 그리하여 결실한 것은 때 아닌 ‘땅의 예찬’이다. 정원의 철학자가 건네는 이 책은 오늘의 디지털 사회에 대한 확고한 반대기획이며, 끔찍한 자연재해에 직면한 세계에 보내는 경고인 동시에 약속이다. 땅의 질서, 다가오는 땅에 대한 갈망과 사랑의 노래다.
책 속에서
정원의 시간은 타자의 시간이다. 정원은 내가 멋대로 할 수 없는 저만의 시간을 갖는다. 모든 식물은 저만의 시간을 갖는다. 정원에서는 수많은 저만의 시간들이 교차한다. 가을크로커스와 봄크로커스는 모습은 비슷해도 시간감각이 전혀 다르다. 모든 식물이 매우 뚜렷한 시간의식을 갖는다는 것, 어쩌면 오늘날 어딘지 시간을 잃어버린, 시간이 부족한 인간보다 심지어 더욱 시간의식을 갖는다는 것이 놀랍다. 정원은 강렬한 시간체험을 가능케 한다. 정원에서 일하는 동안 나는 시간이 많아졌다. 누구든 정원에서 일하면 정원은 많은 것을 돌려준다. 내게는 존재와 시간을 준다. 불확실한 기다림, 꼭 필요한 참을성, 느린 성장이 특별한 시간감각을 불러온다. _23-24쪽
눈물에 녹아서 자아는 제 우월함을 내려놓고 제가 자연에 속함을 느낀다. 울면서 땅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아도르노에게 땅은, 스스로를 절대적 위치로 올리는 주체의 대척점이다. 땅은 자아를 저 자신에 갇혀 있는 상태에서 해방시킨다.
자연이 생각에 개입하면 저만 내세우는 자아의 고집을 느슨하게 만든다. “눈물이 흐르고, 대지가 다시 나를 차지한다.” 그 안에서 자아는 정신적으로, 저 자신에 갇혀 있는 상태에서 벗어난다.
정원에서 일하게 된 뒤로 나는 전에 몰랐던, 강하게 몸으로 느끼는 특이한 느낌을 지니게 되었다. 땅의 느낌이라고 할 만한 이것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어쩌면 땅이란 오늘날 우리에게서 점점 멀어져가는 행복과 동의어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땅으로 돌아가기란 행복으로 돌아가기가 된다. 땅은 행복의 원천이다. 오늘날 우리는 주로 세계의 디지털화라는 행진을 하면서 땅을 떠났다. 생명을 살리고 행복하게 하는 땅의 힘을 우리는 더는 느끼지 못한다. 그 힘은 모니터 크기로 줄어들고 만다. _32쪽
원추리 꽃이 화려하게 무성하다. 노랗고 빨간 색으로 빛난다. 그렇다 ‘빛난다(leuchten)’는 말은 꽃피는 원추리를 위한 동사다. 장미는 빛나지 않는다. 장미는 다른 동사를 요구한다. 광채를 내뿜는다(strahlen)고 할 수도 없다. 아네모네나 밀짚꽃은 광채를 내뿜는다. 그럼 장미는? 장미는 반짝이지도(glänzen) 않는다. 약간 멈추어 있기 때문이다. 장미는 뒤로 물러선 자세다. 장미의 화려함의 비밀이 거기 있다. 장미는 장미한다. 장미하다(rosen)가 장미를 위한 동사다. _144쪽
차례
들어가는 말
겨울여행
겨울정원
타자의 시간
땅으로 돌아가기
세계의 낭만화
가을벚나무
겨울바람꽃과 풍년화
미선나무
아네모네
동백
버들강아지
크로커스
옥잠화
행복에 대하여
아름다운 이름들
빅토리아 큰가시연
가을시간너머
정원사의 일기
그림 목록
1959년 서울 출생. 고려대학교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했고, 브라이스가우의 프라이부르크대학교와 뮌헨대학교에서 철학, 독일문학, 가톨릭 신학을 공부했다. 베를린예술대학교 철학·문화학 교수를 지냈다. 전 유럽과 한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피로사회》를 비롯하여 《정보의 지배》 《사물의 소멸》 《리추얼의 종말》 《고통 없는 사회》 《폭력의 위상학》 《땅의 예찬》 《투명사회》 《심리정치》 《타자의 추방》 《시간의 향기》 《에로스의 종말》 《아름다움의 구원》 《선불교의 철학》 《권력이란 무엇인가》 《죽음과 타자성》 《서사의 위기》 등 예리하고 독창적인 사회 비평서와 철학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