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일은 당연히 누구에게나 좋은 일이다. 일상과 세상에 대한 이런저런 명상을 구체적으로 하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고, 또 자신의 논지를 정당화하려는 과정에서 공부를 상당히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에게는 칼럼을 준비하고 쓰는 시간이 주로 즐거웠다.
시험에 대한 집착은 자연스럽게 과도한 경쟁으로 이어진다. 하디도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된 동기를 이야기하면서 “다른 아이들을 시험에서 이기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따라서 교수들은 누가 누구보다 똑똑한가를 알게 모르게 의식하며 사는 분위기다.
아티야는 큰 문화권의 분열을 몸으로 느꼈을 것이고 그 분열이 초래한 여러 분쟁의 아픔을 공감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어린 시절 경험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국경과 지역의 구분이 영원하지 않을뿐더러 대체로 그다지 오래되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양과 질 사이의 갈등이 별 현실성이 없는 담론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질이 뛰어난 논문을 쓰는 학자는 대체로 생산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점은 학문의 발전 과정이 효율적일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좋은 결과가 하나 나오기까지 학자는 많은 습작을 창출하고 오류를 여러 번 범하며 상당한 시간을 ‘낭비’하기도 한다.
먼 미래에는 시간을 얼마나 정확하게 측정하고 또 인식하게 될까? 오차는 완전히 사라질까? 모든 사람이 분 단위까지 자기 나이를 측정해야 할 필요가 있고, 그것을 쉽게 인식할 수 있는 기술이 일상화되고, 우주여행 때문에 일어나는 시간의 차이를 어떻게든 다뤄야 할 수도 있다. 그것은 굉장히 삭막한 세상일 것이라고 걱정하는 사람도 물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변화는 익숙해지기 나름 아닐까.
어릴 때 대회에서 많이 우승하는 학생일수록 뛰어난 성인 선수가 되지 못하는 일이 꽤 많다고 한다. 어린 선수들의 경기일수록 실수를 안 하려는 조심스러운 스타일이 승산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환경에서 이기는 전략에 집중하다 보면 자연히 모험적인 플레이가 줄어들고 이기더라도 위축되는 테니스가 몸에 배어버린다는 것이다.
“수학자는 뛰어날수록 잘못된 증명을 많이 한다”는 농담 섞인 격언이 있다. 이 말은 다른 이들에게 실수가 발견되려면 학자의 영향력이 우선 커야 한다는 지적이지만 뛰어난 수학자는 모험적인 사고를 자주 한다는 관찰이기도 하다.
뛰어난 소설이 세상에 대해서 가르쳐주는 바는 무엇인가? 뉴턴 역학 같은 정량적 정확성은 당연히 없다. 그러나 위대한 소설이 우리의 지혜를 한없이 깊고 넓게 만들어준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 문학적 이해는 과학 이론 못지않게 인류의 지적 발전에 필수 불가결하다.
수학을 공부하면서 이해하지 못하는 경험을 불협화음과 비교하는 것이 큰 무리는 아닌 것 같다. 단지 긴장과 그 해소의 과정이 음악을 들을 때보다 훨씬 과격할 때가 많아서 고통과 희열로 표현하는 것이 더 타당할 수도 있다. 어려운 논리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은 어린 학생에게나 수학자에게나 마찬가지다.
‘수학적 사고력’은 타고나는가? 내가 알기로는 유전적 효과에 대한 연구를 한다고 해도 믿을 만한 결과가 나온 경우는 지금까지 없다. 물론 편견에 따라서 특정한 방향으로 근거를 모으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비판적 시각에서 캐물었을 때 살아남는 이론은 아직 없다.
수학자. 에든버러대학교 위터커 석좌교수 및 국제수리과학 연구소장, 전 옥스퍼드대학교 수학과 교수 및 서울대학교 초빙 석좌교수. 첨단 위상수학, 양자장론, 고전 정수론을 융합하는 혁신적인 이론을 개발하여 세계적 수학자의 반열에 올랐고 2012년 호암과학상을 수상했다. 국내외를 오가며 수학 대중화에도 힘쓰고 있다. 저서로 《내일 음악이 사라진다면》(공저) 《수학이 필요한 순간》 《삶이라는 우주를 건너는 너에게》 《어서 오세요, 이야기 수학 클럽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