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니 알게 되었다”
발리의 시골 섬에서 배운 삶의 가치들
추운 겨울, 두꺼운 패딩을 껴입고 몸을 떨며 지내다 보면 ‘따뜻한 나라에서 살고 싶다’는 꿈을 한 번쯤은 꾸게 된다. 《발리에서 생긴 일》은 그 바람을 실현한 사람의 이야기다. 안정된 서울에서의 삶을 뒤로하고 돌연 발리로 떠난 데는 삶을 바꿔보겠다는 대단한 계획이나 결심이 있었던 게 아니다. 그저 ‘추워서’, 생애 한 번쯤은 겨울을 피해 남국으로 긴 여행을 떠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영화나 책을 보면 다른 나라 작가들은 날씨 좋고 풍경 좋은 외국 호텔로 몇 달씩 집필 여행을 잘만 가는데, 나라고 그러지 말란 법은 없지.’ 그러나 십수 년째 오를 기미 없는 빤한 원고료로 먹고사는 프리랜서 작가 처지에 물가 비싼 나라의 호텔을 그것도 몇 달씩 턱턱 잡을 수는 없었다. 따뜻하고 물가 싼 나라의, 앉아서 글을 쓸 책상 있는 숙소 목록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도착한 곳이 발리였다. 그때까지도 발리에 눌러앉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끔찍한 서울 물가를 벗어나 월 20만 원으로도 사람다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는 데에 안도감과 편안함을 느꼈지만 그 이상의 감정은 없었다. 그런데 발리에서 책 한 권을 쓰며 5개월을 보내고 서울로 돌아가자 문득 외계 행성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동남아시아의 노동자들이 백 년 일해도 모을까 말까 한 돈을 전셋집에 깔고 앉아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살면서 웬만큼 생활 수준을 유지하려면 몇억은 더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앞으로 사는 내내 듣고 또 하면서, 매 순간 남들은 어떻게 살고 또 뭘 더 가졌나 재고 따지면서 살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대도시의 삶을 뒤로하고 발리의 시골 섬 누사프니다로 향했다. 일 년 내내 여름이 계속되는 곳, 전기와 수도가 하루에 한 번씩 끊기는 곳, 호기심 많고 친구 사귀기를 좋아하는 인도네시아 현지인 틈바구니에서 영원한 이방인으로 살아야 하는 곳에서 저자는 삶을 사는 방법을 온전히 새로 배우기 시작했다. 물자와 자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최소한의 물건으로 일상을 꾸리고, 정전과 단수로 생긴 멈춤의 시간에 느긋함과 여유를 찾는 법을 터득했다. 인터넷으로 사진 한 장 보내는 데만 몇 시간이 걸리는 환경에서 비로소 일과 휴식의 균형을 찾았다. 현지 이웃의 이유 없는 선의를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호기심 어린 시선에 친절로 답하는 법을 익혔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새로 찾는 과정이었다.
발리가 모두에게 천국은 아닐 것이다
어딘가에는 각자의 낙원이 있다
작가가 정착한 발리의 시골 섬에는 많은 불편을 감내하면서도 살 만한 이유가 가득하다. 아름다운 자연, 타인을 존중하는 자유로운 분위기, 현지인의 밝은 표정과 관대한 태도, 시골 사람들 특유의 정과 인심, 인기 여행지로 막 부상하기 시작한 지역 특유의 활기…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제대로 누리고 또 이웃들과 섞여 살아가려면 ‘인도네시아’, 그중에서도 ‘발리’, 그 안에서도 ‘시골 섬’이라는 지역의 고유성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공부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잠시라도 느슨해지면 ‘이래서 개도국 (사람들)은 안 돼…’ 하는 오류와 편견에 빠지기 십상이다. 작가는 그 점을 명확히 한다. 이주민을 향한 원주민의 경계심에 익숙해지는 동시에, 최선을 다해 그들과 친밀감을 쌓아야 한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경제와 인구 규모가 아예 다른 별세계에서 온, 이 작은 열대 섬에 젠트리피케이션을 일으키는 데 일조하는 이방인으로서 완전히 다른 문화적, 역사적, 종교적 배경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과 나이 마흔 넘어 섞여 살기가 그리 녹록할 리 없다. 하지만 마음만 달리 먹는다면, 그리고 특히 그곳이 인기 휴양지라면 그 과정이 또 다른 배움의 즐거움이 될 수도 있다.
황무지 같은 외국 섬에서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도, 거기 돈을 대는 친구도, 그들을 견제하고 이용하며 실속을 챙기는 현지인도, 내게는 모두 경이롭다. 그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드럼 세탁기 속 빨래가 된 기분이다. 평범한 도시 직장인에게서 느낄 수 없는 생생한 활력, 모험심, 결단력 따위에 압도당한다. 그들 덕분에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볼거리, 놀 거리가 생긴다. (158쪽)
또한 작가는 떠나기만 하면 모든 것이 깨끗이 해결될 것이라는 무조건적인 낙관도 경계한다. 지금 내가 안고 있는 걱정거리는 어느 나라를 가든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될 것이다. 남들만큼 성공하지 못했다는 패배감,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싶은 미래를 향한 초조함, 노후에 대한 불안감 등은 눈앞에 회색 빌딩과 아스팔트 대신 야자수와 에메랄드빛 바다가 펼쳐진다고 해서 눈 녹듯 사라지지 않는다. 직접 경험해 본 사람의 뼈아픈 직언이다.
그럼에도 지금 당장 이 나라에서의 삶이 괴롭다면, 상황과 여건이 허락하는 한 외국으로 떠나 일하며 사는 걸 시도해 보기를 권한다. 묶여 있던 땅 밖으로 나가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고, 안에 있을 때는 절대 볼 수 없는 것들이 분명히 있다고 말이다. 그러면서 실제로 동남아시아 국가 등으로의 이민이나 장기 여행 혹은 체류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현실적인 조언도 빼놓지 않는다. 장기 거주할 숙소를 어떻게 찾으면 좋을까? 거기서 뭘 해서 먹고살까? 비자나 서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까? 실제로 앞서 떠난 사람들은 어떻게 정착했나? 덕분에 독자들은 모호하기만 했던 ‘다른 삶의 가능성’을 좀더 구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다.
저자는 모두에게 발리가 천국이 될 거라 말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의 삶이 버겁다면, 앞으로 살아갈 앞날이 깜깜하고 답답하게만 느껴진다면 편히 숨 쉴 곳이 이 땅 밖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나가보지 않고서는 결코 모를 일이라고, 그 가능성을 속단하지는 말자고 말한다. 그러니 지레 겁먹고 포기하기보다는 가능한 한 시도해 보자고 말이다. 그러다 보면 지구 어딘가에 있는 나만의 천국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