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완역, 상세 해설
서학이라는 거대한 체계와 대면한
다산과 18세기 조선을 입체적으로 조명한 역작
다산 정약용의 생애에서 가장 격렬하고 긴장이 높았던 시절의 기록. 위대한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아닌 임금과 천주 사이에서 절박하고 아슬아슬했던 30대 다산이 남긴 일기 4종이 고전학자 정민 교수의 독법과 풀이를 통해 드디어 세상에 공개된다. 18세기 조선 지성사를 깊이 탐구해온 정민 교수는 다산의 ‘건곤일척의 승부’를 담은 일기 〈금정일록(金井日錄)〉 〈죽란일기(竹欄日記)〉 〈규영일기(奎瀛日記)〉 〈함주일록(含珠日錄)〉을 국내 최초로 주석을 붙여 완역하고, 스스로 묻고 답하는 백문백답의 형식을 통해 다산과 그의 시대가 감춘 진실을 추적했다. 일기 본문과 함께 《다산시문집》에 실린 편지·시문, 《정조실록》 《일성록》 《승정원일기》와 각종 상소문 및 척사 기록, 족보 등을 종합 검토함으로써 역사적 사실과 일기 속 정황을 교차 검증하고, 다산이 언표하지 못한 의도와 속내를 실증적으로 파헤친다. 이 세밀한 독법으로 “봉폐된 한 시대와 뜨거운 질문으로 맞섰던 한 위대한 영혼의 내면을 훑고 지나간 진실”이 마침내 드러난다.
“이 4종 일기는 모두 다산의 천주교 신앙 문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관이 있다. 당시에는 피차 건곤일척의 승부였기에 말 한 마디에 가문의 명운과 죽고 사는 문제가 걸려 있었다. 때문에 이 시절의 다산의 일기에는 세밀한 독법이 필요하다. 일기 속의 무심해 보이는 기사 하나하나에 모두 숨은 행간이 있다는 뜻이다.” _서문에서
이 4종의 일기는 다산의 문집에는 모두 누락되고 없다. 이 일기들은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을 천주교와 관련된 사학삼흉(邪學三凶)으로 지목해 조정에서 처벌 논의가 치열하고 뜨거웠던 시기의 기록들이다. 〈금정일록〉은 1795년 주문모 신부 실포 사건에 연루된 33세의 다산이 충청도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었던 시기를, 〈죽란일기〉는 1796년 금정에서 겨우 상경한 뒤 실직 상태에 있던 명례방 시절을, 〈규영일기〉는 같은 해 규영부 교서관으로 복귀했을 당시를, 〈함주일록〉은 이듬해인 1797년 외직인 황해도 곡산부사로 밀려나기 직전까지를 담은 기록이다. 특히 분량이 가장 많은 〈금정일록〉은 다산의 75년 생애에서 밀도와 긴장이 가장 높았던 5개월을 다룬다.
다산은 왜 이러한 일기를 남겼으며, 무슨 이유로 문집에서 빠졌을까? 일기에 감춰둔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그 의미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정민 교수는 신간 《다산의 일기장》에서 다산이 말하고 싶었지만 말하지 못하고 행간에 숨겨두었던 다산과 천주교에 얽힌 속내를 찾아 추적한다. 그리고 ‘정면돌파’ 끝에 마침내 한 ‘진실’에 가닿는다.
“다산의 완결성과 순정성에 바치는 경배는 지금까지의 학술적 성과만으로도 충분하다. 다산이 모든 면에서 위대하다고 외치는 작업은 그동안 너나없이 해왔다. 더 이상 무결점의 위인전은 필요치 않다. 이제는 다산과 그의 시대를 더욱 객관적이고 인간적으로 대면할 때가 되었다. 나는 그와 그의 시대를 육성으로 만나고 싶다.” _서문에서
100개의 질문과 100개의 답변으로 만나는
학자이자 정치가, 신자이자 배교자였던 ‘인간 다산’의 진실
거대한 진실은 수면 아래 심층부에 숨어 있다
오랜 시간 다산을 연구해온 정민 교수는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다산의 재발견》 《파란》 등을 저술해 역사적·문화적·개인적 맥락에서 다산의 복잡다단한 면모를 되살려왔다. 이어 《서학, 조선을 관통하다》 등 조선 후기 서학 연구에 매진하면서 다산이 초기 천주교회의 신부였으며, 주문모 신부를 탈출시킨 장본인이자 교회 지도자 이존창을 검거한 당사자였다는 사실을 실증했다.
신간 《다산의 일기장》에서 저자는 책략가 다산을 발견한다. 일기 속 다산은 예민한 대목에서 말을 얼버무렸고, 어떤 때에는 말할 만한 내용조차 침묵했으며, 대체 왜 들어갔는지 종잡을 수 없는 내용들을 끼워넣었다. 일기 4종은 고도로 계산된 정치적인 텍스트로서, 서학과 관련한 처벌 논의와 상소 공방이 거셌던 당시 정국의 시대적 맥락을 이해하고, 치밀하고 세밀한 독법으로 접근해야만 다산의 속내와 그의 시대를 들여다볼 수 있다. 저자는 다산이 지방 말단 관리로 내쳐진 이유와 그를 좌천시킨 정조의 본심, 천주교도를 검거해 비방에서 벗어나려 했던 다산의 노력과 속마음, 같은 남인과 날을 세우면서까지 성호 이익의 유저(遺著)를 정리한 젊은 날 다산의 강파르고 직선적인 성정 등 다산이 스스로 검열하고 은폐한 행간까지 찾아내 생생하고 정교하게 한 인물을 복원한다. 이 시기에 다산이 남긴 〈서암강학기〉 〈도산사숙록〉 〈변방소〉의 저술 배경과 의미 또한 새롭게 밝힌다.
“다산은 젊은 날뿐 아니라 생애를 통틀어 천주교 문제를 배제하고는 그 정체성을 올바로 파악할 수 없다. 따라서 이 문제는 정면돌파해야 한다는 것이 작업에 임한 필자의 기본 입장이다. 미리 정해둔 의도가 있을 수 없고, 있을 리 없다. 팩트로 제시해도 사람들은 통념으로 굳어진 허상에만 신뢰를 보낸다. 나는 그동안 그런 허상들과 줄곧 싸워왔다. 앞에서의 싸늘한 눈빛과 뒤에서 떠드는 이야기에는 개의치 않겠다. 내가 가닿고 싶은 지점은 진실일 뿐이기 때문이다.” _서문에서
정민 교수는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무결한 위인 다산이 아니라 뾰족하고 거침없으며 모순적인 젊은 날의 다산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다산이 천주교인인지, 배교했는지를 밝히고자 하지 않았다. 그는 문헌을 연구하는 고전학자로서 다산이 남긴 글을 읽고 그 안에 가려진 진실을 찾아낼 뿐이다. 이로써 우리는 마침내 다산 자신의 목소리로 그의 시대를 더 깊이, 더 정직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다산에게 일기는 어떤 의미였는가? 다산이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는가?
다산의 일기는 일상의 단상이나 개인적 소회 대신 객관적 사실로만 이루어져 있다. 어느 날 받은 편지 한 통, 무심하게 언급한 조정 소식 등은 특별한 주제로 귀결시키기도 어렵다. 여기에는 천주교 문제로 좌천당한 다산의 정치적·정략적 의도가 숨어 있다. 그는 천주교 혐의를 벗고 결백을 입증할 알리바이를 마련하고자 했다. 그래서 객관적 동선과 대화, 주고받은 문서를 기록으로 남겨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훗날을 위한 증언으로 삼았다. 다산이 하고 싶은 말은 오히려 중간에 인용된 상대의 편지나 시문 속에 담겨 있는 경우가 많다. 즉 다산의 의도는 그가 이런 팩트들을 선별하고 배열하는 시선을 통해서만 포착된다. 치밀하고 세밀한 독법으로 일기의 이 같은 전략적 배치와 계산된 글쓰기를 파악해야 다산 스스로 검열하고 은폐한 행간에서 천주교 배교에 대한 이면과 그의 복잡한 내면 갈등을 읽어낼 수 있다.
“결과적으로 그는 글에서 굳이 개인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는 성과를 거뒀다. 반대로 읽는 이의 입장에서는 아는 만큼만 행간이 보이는 독서여서 글쓴이의 속마음에 가닿기가 쉽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일기를 읽는 내내 한 시대를 온전히 이해하고 한 인간의 내면을 깊이 살피는 일이 참으로 쉽지 않음을 절감했다. 마치 곳곳에 비밀 기관을 매설하고 암기(暗器)를 감춰둔 캄캄한 지하 갱도를 통과하는 기분이었다.” _서문에서
금정으로 쫓겨난 후 천주교 지도자 검거에 앞장서기까지 했지만 아무도 다산의 진실성을 믿어주지 않았고,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 보여야만 했다. 다산의 일기는 이러한 안간힘의 결과라는 점에서 모순덩어리다. 천주와 임금 사이에서 엇갈리는 다산의 행보는 그의 우유부단함에 대한 징표가 아니라, 서학이라는 거대한 체계와 대면한 18세기 조선의 어정쩡한 스탠스를 보여준다. 즉 다산의 모순은 시대의 모순과 다르지 않다. 다산의 일기를 통해 다산과 18세기 조선을 더욱 객관적이고 인간적으로 대면할 수 있는 책이다.
마침내 다산 자신의 목소리로 그의 시대를
더 깊이, 더 정직하게 만난다
■ 다산을 지방 말단 관리로 내친 정조의 본심은 무엇이었는가?
1795년 초 다산은 정3품 관리로서 정조의 화성 행차를 모시는 등 왕의 측근으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돌연 정조는 다산이 성인을 비방하는 글을 읽었으며 기이한 문장을 추구하고 글씨체를 고치지 않았다며, 그를 충청도 금정의 역참을 관리하는 금정찰방으로 좌천시킨다. 이는 사실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다산을 잠시 지방으로 보낸 것이었음을 일기의 면면을 살피면 알 수 있다. 당시 주문모 신부를 검거하는 데 실패한 후 천주교 세력의 배후를 처벌하라는 상소가 잇달았는데, 이때 정약용이 표적이 되었다. 정조는 문체와 서체를 이유로 다산을 견책함으로써 그가 천주교 서적을 가까이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학죄인은 아님을 분명히 하고, 그를 보호하고자 한 것이다. 남해나 함경도 오지가 아닌 충청도로 보낸 것 또한 다산의 좌천이 일종의 여론 무마용이었음을 방증한다.
■ 금정으로 좌천된 다산이 천주교도를 적극적으로 잡아들인 이유는?
찰방의 주된 직무는 역참 시설과 그곳의 마필을 관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산이 금정으로 떠나며 쓴 시와 도착하자마자 받은, 일기에 실린 편지 등을 보면 정조가 그에게 내린 실제 임무는 천주교도 교화와 검거였음이 확인된다. 실제로 다산은 부임 18일 만에 인근 천주교 세력의 중간 리더인 김복성을 체포했고, 이어서 지도자 이존창을 검거하는 데 성공했다. 주문모 실포 사건에 연루되어 금정까지 내쫓긴 다산으로서는 천주교 관련 혐의를 벗을 결정적인 성과가 필요했고, 정조에게는 그를 다시 중앙으로 불러들일 명분이 필요했다. 즉 천주교도 검거는 정조가 다산에게 내린 첫 번째 숙제였으며, 다산은 하루라도 배교를 입증하고 임금 곁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것이다.
■ 다산은 왜 같은 남인과 날선 공방을 주고받으면서까지 성호 이익의 유저(遺著)를 정리했는가?
금정에 내려간 다산이 성호 이익이 남긴 초고 상태의 저서를 정리하는 강학회를 열고자 했을 때 성호우파 남인 일부는 강하게 반발했다. 성호의 종손인 이삼환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고, 명망 높은 선비인 이도명은 날선 편지를 보내며 강학회를 반대했다. 같은 남인인데 그들은 왜 다산의 행보를 못마땅해했을까? 다산이 자신들을 이용해 천주교 혐의에 대한 면죄부를 받으려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다산은 어렵게 이삼환 등을 설득해 강학회를 열어 〈서암강학기〉를 정리했고, 이어서 퇴계 이황의 편지를 읽고 감상을 적은 〈도산사숙록〉을 썼다. 저자는 이 두 저술이 다산 스스로 서학을 버리고 정학(正學)으로 회귀했음을 공언하기 위한 글이었다고 말한다. 천주교도 검거에 이어 사실상 정조에게 제출하는 반성문이었던 것이다.
■ 중앙 복귀가 눈앞이었는데 다산은 무엇 때문에 관직을 거부했는가?
1795년 말, 천주교 지도자 이존창을 체포한 공로로 마침내 상경 명령이 떨어졌다. 그런데 다산은 이를 복귀의 명분으로 삼기를 강력하게 거부했다. 정조의 명을 받은 관찰사가 여러 차례 설득하는데도 다산은 강경했다. 실상 몇 년간 애를 써도 찾지 못한 이존창을 다산이 불과 한 달 만에 체포할 수 있었던 것은 이존창이 자수에 가깝게 붙잡혔기 때문이었다. 다산이 천주교 비선을 통해 이존창과 접촉한 후 주문모 신부에게 쏠린 관심을 돌리기 위해서라도 희생양이 필요하다며 그를 설득했으리라고 저자는 추측한다. 사실 이존창과 다산은 한때 교계에서 함께 활동했던 사이라 서로를 잘 알았다. 그러니까 다산은 이존창 검거를 자신의 복귀와 맞바꾸는 데 부끄러움을 느꼈던 것이다. 저자가 다산의 마음속에 일말의 신앙이 남아 있었다고 보는 이유다.
■ 정조와 자신을 비방하는 대신들 사이에서 다산이 올린 상소문은 어떤 결과를 낳았는가?
다산은 금정 좌천 후 2년여 뒤에야 동부승지로 제수되었다. 이때 다산은 관직을 사직하는 상소문 〈변방소〉를 올렸다. 이 글은 서학의 원죄 때문에 벼슬에 나아갈 수 없다는 내용으로, 사실상 천주교와 결별했음을 천명하려는 의도였다. 이에 대한 조정의 반응은 매우 뜨거웠다. 명문이라는 칭찬이 이어지는 한편 다산의 파직을 청하는 등 반발도 심했다. 결국 정조는 논란을 이기지 못하고 다산을 황해도 곡산부사로 떠나보냈다.
일기에는 〈변방소〉에 관한 조정 대신들의 반응이 녹취록처럼 기록되어 있다. 칭찬을 그대로 옮김으로써 조정의 여론이 자신에게 우호적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몇몇 비난에 대해서는 자신을 두둔한 다른 대신의 말을 빌려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이처럼 다산은 객관적 사실만을 기술하면서도 일기의 행간에 자신이 하고 싶은 말과 의도를 숨겨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