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는 어떻게 역사를 기록하고, 어떤 오류를 범하며,
그럼에도 역사는 어떻게 믿을 만해지는가?
할리우드 영화 <300>부터 조선왕조실록,
헤로도토스의 ≪역사≫부터 유지기의 ≪사통(史通)≫까지
건강한 역사적 사고를 위한 오항녕 교수의 역사 문해력 특강
역사가도 틀린다
사소하게는 글자를 잘못 읽어서, 때로는 무의식적인 편견 때문에, 드물게는 역사기록을 바로잡는다면서 엉뚱하게 고치는 바람에 역사가도 틀린다. 역사는 어떻게 만들어지고, 누가 쓰며, 역사가는 어떤 오류들을 범할까? ≪역사의 오류를 읽는 방법≫은 한국의 대표적인 조선사 연구자이자 기록학자 오항녕 교수가 동서고금의 역사가들이 실수했던 사례를 유쾌하게 해설한 역사 교양서이다. 역사기록, 서술, 해석의 각 과정에서 나타나는 오류와 실수들을 역사학의 주요 개념들과 함께 테마별로 엮었다. 오랫동안 강단과 저술 활동을 통해 연구하고, 논쟁하고, 가르치면서 모은 흥미로운 사례들이다.
저자가 참고하고 인용하는 문헌들도 폭넓다. 동서양 역사학을 대표하는 두 거목인 헤로도토스와 사마천의 저술(≪역사≫, ≪사기≫)이 빠질 수 없고, 인류 최초의 역사학개론서인 ≪사통(史通)≫부터 우리 기록문화를 대표하는 <조선왕조실록>까지 중요한 역사 문헌들이 비중 있게 실렸다. 영화 <300>, 뮤지컬 <레미제라블> 등 대중문화, 스포츠를 통한 적절한 비유와, 강의시간에 학생들에게 내준 시험문제와 본인의 일기까지 인용하면서 교양 독자의 눈높이에 맞춰 해설한다. 특히 한국 역사학의 논쟁적 이슈를 역사 오류의 사례로 적극적으로 끌어와 비평하는데,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의 사료 문제, 광해군과 사도세자에 대한 인물평, 실학/허학 논쟁,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둘러싼 논란 등 한국사의 중요한 쟁점들이 두루 담겼다. 역사에 대해 막연히 어렵고 부담을 느끼는 일반인들이라면 역사 읽기의 깊은 맛을 느끼고, 역사를 업으로 삼으려는 역사학도라면 사료를 읽고, 해석하고, 비평할 때 경계해야 할 유용한 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역사의 오류를 읽는 방법
책의 제목은 좀 특이하다. ‘역사를 읽는 법’이 아니라 ‘역사의 오류를 읽는 법’이라니, ‘역사도 잘 모르는데… 그 오류까지 시시콜콜 알 필요가 있을까’ 하고 시큰둥해할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저자는 역사학을 다른 모든 학문을 건강하게 유지해주는 ‘음식’에 비유한다. 영양이 풍부하고 건강한 음식을 먹는다면 우리의 몸(지적 토대)도 튼튼해지겠지만, 영양분이 부실하고 상한 음식을 먹으면 다른 모든 학문도 위태로워진다. 역사학은 “(과학사, 철학사, 심지어 역사학사 등) 모든 학문의 형식이자 학문의 성격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역사의 오류’를 줄이고, 예방하는 것은 우리 학문의 근간을 지키는 일과 진배없다. 또한 어떤 분야든 실패 사례가 성공의 비밀을 알려주는 길잡이가 되며, 역사가의 실수담만큼 역사공부에 더 요긴한 교재도 찾기 힘들다. ‘역사의 오류’라는 주제는 역사를 더 쉽게 설명하기 위해 저자가 고민하면서 채택한 방법론이기도 하다.
이 책에는 다양한 역사 오류 사례가 제시된다. 공자의 경우, 그의 어린 시절을 기록한 ≪예기≫를 후대 학자들이 표점(구두점)을 엉뚱한 데 찍어서 읽는 바람에 공자는 오랫동안 아버지 무덤도 모르는 사람으로 알려졌고, 중국의 5천 년 문명은 동양에 편견을 품은 영국인이 찍은 사진(왕웨이친 처형 사진) 한 장 때문에 야만의 대명사로 전락했다. 어떤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는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한 토막을 제시하며 박지원 자신의 중화 관념과 정반대되는 내용으로 소제목을 삼기도 했다. 물론 이런 오류는 이 책의 저자도 예외일 수 없는데, 그 역시 ≪자치통감≫ 연구자인 원나라 호삼성의 말을 잘못 해석하는 바람에 낭패를 봤다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이처럼 역사학자의 논문이나 저술도, 중고등학교의 교과서도, 조선시대 왕릉의 안내문도, 심지어 동아시아에서 존경받는 유학의 대가들도 틀릴 수 있다. 역사를 기록하고, 전달하고, 해석하는 주체가 사람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오류의 사례들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된다. 1부 ‘사실의 오류’에서는, 기록을 남기며 발생하는 오류, 어떤 선입견이나 편견을 가지고 사실에 접근하면서 생기는 오류를 다룬다. 특히 문자, 언어의 무지나 착각에서 생기는 오류를 설명한다. 2부 ‘서술의 오류’에서는, 사실을 적고 전달하고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류를 다룬다. 가령 우리가 일상에서 별 고민 없이 던지는 ‘이순신 장군이 없었으면 조선은 망했을까?’와 같은 가상의 질문들도 여기서 검토한다. 왜 이런 질문을 역사학에 함부로 끌어들이면 안 되는지를 설명한다. 3부 ‘비판의 오류’에서는 역사를 둘러싼 논쟁에서 발견될 수 있는 오류를 다룬다. ‘네 말은 믿을 수 없어!’ 하는 식으로 논제와 사람을 혼동하는 오류, 자신의 오류를 감추려고 편싸움을 유도하는 오류 등이다. 재밌는 사례로 역사학자들의 흔한 과장법을 주의하라는 지적이 있는데, “역사학자들도 설득력을 높이려다 보면, ‘때때로’ 대신 ‘항상’, ‘가끔’ 대신 ‘때때로’, ‘드물게’ 대신 ‘가끔’의 표현을 사용한다. 그래서 어떤 역사학자가 ‘확실히’라고 말하면 ‘아마도’로 알아들어야 하고, ‘아마도’라고 말하면 ‘혹시’ 정도로 알아들어야 하며, ‘혹시’라고 말하면 ‘추정컨대’ 정도로 알아들어야 한다는 농담을 하기도 한다.” 이 책에서 실린 오류의 사례 중 대표적인 개념 몇 가지만 소개한다.
허구 질문의 오류
일어나지 않은 가정에 기반하여 가상의 질문을 던지는 것을 말한다. 미국의 경제사가 로버트 W. 포겔은 ≪철도와 경제 성장≫에서 19세기 미국 경제의 발전에서 고속도로와 운하로도 충분했고, 철도는 없어도 되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각종 통계자료를 분석한 결론인데, 사실 그 통계는 이미 철도가 이미 존재하는 세상에서 뽑아낸 것이다. 쉬운 예로 “이순신 장군이 없었다면 우리는 임진왜란에서 졌을까?”라는 익숙한 질문이 있다. 이순신 장군을 추앙하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그가 없었다면 왜군에게 졌을 것이라고 장담하지만, 사실 그런 판단의 근거는 이미 이순신이 실제로 활약했던 시대 상황에서 뽑아낸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없을 때 그 자리를 대체할 인물이나 새로운 변수에 대해 우리는 전혀 데이터가 없다. 그러니까 이런 가상의 질문에 대해 역사학이 답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을 설명해줄 사료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역사학은 ‘사료’를 읽는 데서 시작한다.
허수아비의 오류
역사 독자라면 뚜렷한 증거도 없이 어떤 사건을 특정한 적의 탓으로 돌리는 역사가를 경계해야 한다. 일종의 허수아비를 내세우는 것인데, “송나라 때 간신 한탁주는 명장이자 충신 악비를 무함할 때, ‘막수유(莫須有)’의 논리를 내세웠다. ‘드러난 것은 없지만 틀림없다’는 말이다.” 과거 군사정권 등에서 추정과 가정에 의해 ‘적’을 만든 사례와 비슷하다. 필자는 ‘실학’이라는 용어를 내세워 실(實)과 허(虛)를 대립시킴으로써 성리학을 ‘허학(虛學)’으로 규정하는 경우도 허수아비 오류의 실례라고 덧붙인다.
시대착오의 오류
역사가가 어떤 사건이 실제 일어난 시기(시대)가 아닌 다른 시기에 일어난 것처럼 묘사, 분석,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트랙터를 사용하는 현재 농촌의 관점에서 호미와 쟁기를 사용하던 고려, 조선의 농업을 해석하는 것이다. 한편 시간 단위가 다른 문명을 한쪽 기준으로 해석하는 사례도 있다. 그레고리우스력이라고 부르는 서력(西曆) 기원은 조선의 경우 갑오경장 이후에 사용된 역법이다. 그전에는 아예 이런 연도 구분이 존재하지 않았고, 갑자(60년)나 왕의 재위 연대가 기준이었다. 최근 지방자치단체에서 율곡 이이나 다산 정약용 등 조선시대 인물의 탄생을 백 년 단위, 오십 년 단위로 끊어서 기념하곤 하는데, 현재 우리의 기준일 뿐이다. 조선시대에는 3갑자, 4갑자가 더 기억할 만한 시간 단위였을 것이다.
‘다 알다시피’의 오류
다수의 의견을 끌어와서 근거로 삼는 오류로, 연구자의 지적 게으름이 동반되어 있다. 필자에 따르면 “한때 조선시대 논문에서는, 서론에 ‘조선 후기에는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고 신분제가 동요하면서…’라고 시작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조선 후기만 해도 300년인데, 그 300년이란 시간을 ‘다 안다고 치고’ 한마디로 정리해버린 것이다. 필자에 따르면, 실제 조선 사회가 ‘상품화폐경제’에 우호적이지 않았고, 신분제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지만 그것을 두고 ‘300년의 동요’라고 말할 만한 증거는 빈곤했다. 이런 오류를 피하려면 기존 연구자들의 주장을 맹목적으로 따르기보다 자신의 공부를 바탕으로 그들의 주장을 재검토할 수 있는 성실함과 용기를 길러야 한다.
책임과 원인을 혼동하는 오류
윤리적인 책임의 문제를 수행자의 문제와 혼동하는 경우를 말한다. 예를 들어 전쟁이 일어나면 그 원인이 무엇이든 위정자는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경우, 당시 위정자였던 인조는 전쟁에 대해 무한 책임을 진다. 그렇다고 왕이나 왕의 정책이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다. 주요 원인은 왜군과 후금(청)의 침략이다.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가?”라는 질문과, “누가 비판받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전혀 다른 것이다. 둘을 혼동하면 곤란하다.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
우리에게 익숙한 오류인데, 역사학자들이 독자들을 기죽게 하고 자신의 빈약한 주장을 감추기 위해 곧잘 쓰는 방법이다. ‘무슨무슨 상을 탄 과학자가 말하기를’, ‘공자님(부처님,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등으로 시작하는 논법이 여기에 속한다. 변종으로는 이런 것들도 있다. 과도한 참고문헌 나열, 수많은 인용문 위주의 서술, 기가 질릴 만큼의 엄청난 분량(아널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는 국내에서 1974년에 14권으로 출간되었는데, 많은 독자들이 기념비적인 저술의 분량 때문에 설득되지 않았을까?), 수학 공식을 남발하면서 상대방의 입을 아예 막아버리기.
풍요롭고 건강한 역사공부를 위하여
역사탐구가 어려운 것은 시대와 상황을 온전히 담아내는 기록이란 애초에 불가능하고, 기록의 주체 역시 불완전한 기억을 지닌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역사의 빈틈과 오류의 한계를 거꾸로 우리 역사공부의 출발점으로 삼자고 제안한다. 텍스트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합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눈을 키움으로써, 역사학을 둘러싼 막연한 불신과 냉소를 물리치자는 것. 그렇게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독자라면, ‘역사의 오류’를 찾는 데서 시작한 우리의 여정이 진실에 다가서기 위해 분투했던 앞선 역사가들의 ‘숭고한 영정’과 맞닿아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역사학의 진정한 힘은 자기 교정 능력에서 나온다. 오류마저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역사학이고, 역사학자의 일이기 때문이다. “속였으면 속였다고 적고, 속인 듯하면 속인 듯하다고 적고, 그런 정황이 없으면 오류만 밝히면 그뿐이다.” 그렇다고 오류에 대한 지나친 강박 때문에 역사가의 창조적 사유가 위축되어서는 곤란하다. 오류를 줄이는 것이 역사학의 목표는 아니며, 풍요롭고 건강한 역사학을 위한 방편일 따름이다. “오류가 없는 사유만 건강한 사유는 아니다. 명제만 있는 사유는 골동품이다. 질문하는 사유, 의심하는 사유, 창조하는 사유가 얼마나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가. 오류를 피하려고 풍요로움의 가능성을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저자의 이런 당부, 역사를 가르치는 사람도 공부하는 사람도 숙고해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