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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

2011.04.14조회:2499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
다산ㆍ추사ㆍ초의가 빚은 아름다운 차의 시대


정민 지음 󰠛 752쪽 󰠛 35,000원




우리 시대의 대표 인문학자 정민 교수, 잊혀진 우리 차 문화의 정신과 역사를 일깨우다!
역사상 가장 풍요로웠던 18, 19세기 조선의 학문ㆍ예술ㆍ문화 교류사를 종횡한 역작!

다산이 마셨던 차는 떡차였을까 잎차였을까? 가야사 5층 석탑에서 발견된 700년 묵은 송나라 때의 용단승설차는 어떻게 고려 땅까지 건너와 탑 속에 봉안되었을까? 절집에서도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던 차 문화의 전통은 누구에 의해 다시 융성했을까? 다산이 초의에게 차를 배웠을까, 초의가 다산에게 차를 배웠을까? 논란이 되고 있는 추사의 「명선」은 진짜일까 가짜일까?
문학을 넘어 문화사 전반으로 글쓰기와 사유의 폭을 넓히고 있는 정민 교수가 조선 시대 차 문화사를 들고 나타났다. 오랜 시간 차곡차곡 쌓은 성과가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김영사 刊) 속에 녹아들어 있다. ‘다산, 초의, 추사가 빚은 아름다운 차의 시대’란 부제처럼, 이 책은 특히 18세기 이후 조선 시대를 풍미한 차 문화의 흐름을 다채롭고 풍성하게 담아냈다.
차에 관해 문외한이었던 정교수는 2006년 가을, 『다산선생 지식경영법』을 펴낼 당시, 자료를 보기 위해 강진을 찾았다가 초의의 『동다송』에 한 구절만 인용되었을 뿐 실물이 전하지 않던 『동다기(東茶記)』를 찾아냈다. 이 일을 계기로 차 문화 연구에 깊이 빠져들었다. 이 책은 그때까지 다산의 저술로 잘못 알려졌고, 그나마 실물도 전하지 않던 상황이었다. 정교수는 『강심』에 실린 이 글이 다산이 지은 것이 아니라 진도에 유배 와 있던 죄인 이덕리(李德履)의 저술임을 밝혀냈다. 차계가 술렁였다.
이 일을 계기로 차에 대한 본격적인 탐색이 시작되었다. 이후 정교수는 우리나라 최초의 다서 『부풍향차보』와 각종 차 관련 저작 및 편지 등 수많은 사료들을 잇달아 발굴하여, 학계 최초로 소개하며 우리 차 문화사를 다시 썼다. 기존 연구 성과를 찬찬히 검토하여 수십 년째 답습 누적되고 있는 오류들을 바로잡았다. 없다고 생각했던 자료가 쏟아져 나왔다. 후손가를 방문해 자료를 열람하고, 소장가를 만나 공개를 요청하고, 문집을 뒤져 감춰져 있던 기록들을 하나하나 검토해 나갔다. 이러한 끈질긴 집념과 정치(精緻)한 문헌 해석, 정확한 의미 부여를 거쳐 은성했던 조선의 차 문화가 풍요롭고 향기롭게 되살아났다. 여러 해 동안 갖은 어려움 끝에 수집한 오리지널 자료 사진이 무려 300여 컷에 달한다. 해외의 자료까지 망라했다. 모든 원문을 수록하고 풀이하여 그간의 오류를 바로잡고, 쟁점과 의문을 낱낱이 파헤쳤다. 원본을 공개하여 향후 학자들이 모두 공유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집필의 과정에서 차 연구가들 사이에서 정민 신드롬이 일어날 정도로 큰 호응이 있었다. 정교수는 『다시 쓰는 조선의 차 문화』를 통해 잊혀졌던 우리 차를 역사 밖으로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 책에서 거둔 성과는 우리 차사의 우뚝한 금자탑이다.


이 책의 의의

첫째, 조선 후기 차 문화사의 종합적 전망을 제시했다. 18, 19세기 이후 새롭게 발흥한 조선의 차 문화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구체적 실상의 제시 없이 단순히 민족주의적 감성에 호소하던 이전 차 문화사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실제 자료에 입각하여 차 문화의 비전을 제시했다.
둘째, 수많은 1차 자료의 발굴과 소개로, 차 문화의 깊이와 너비를 획기적으로 확장했다. 『부풍향차보』, 『동다기』, 『다법수칙』 등 최초로 발굴한 1차 자료가 풍부하고, 서간문과 논설문 등 최초로 소개되는 내용이 대부분일 정도로, 풍성한 새 자료의 발굴과 소개가 이루어졌다.
셋째, 그간 차계의 수많은 오류를 바로잡아, 바른 안목을 제시했다. 그간 오역과 오독으로 점철된 읽기의 오류가 차 문화에 대한 심각한 왜곡과 편견을 낳았다. 이를 바로 잡아 차인들이 조선의 차 문화에 대해 바른 인식을 갖게끔 안내했다.
넷째, 다산, 추사, 초의로 이어지는 조선 후기 지성사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그간 알려진 것보다 훨씬 방대한 자료 섭렵과 발굴을 통해, 이 세 사람을 중심에 두고, 신위와 박영보, 홍현주, 신헌 등 당대 지식인의 차를 통한 네트워크를 밝혀냈다. 지성사와 문화사의 지평을 넓힌 쾌거다.
다섯째, 추사의 다반향초론 및 「명선」 관련 논의 등 여러 민감한 쟁점을 통쾌한 논거를 들어 마무리 지었다.
여섯째, 모든 발굴 자료를 원본 그대로 공개하여 만인이 공유할 수 있도록 했다. 그간 차계의 폐단 중 하나는 자료를 폐쇄적으로 활용할 뿐 공유하지 않아, 연구자들의 접근이 어려웠다는 점을 든다. 이 책에서는 모든 자료를 투명하게 공유해서 더 깊은 후속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는 물꼬를 터놓았다. 한국과 중국의 각종 차 그림 명작들도 책을 보는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차향처럼 은은하고 정교하게 빚어낸
조선 후기 차 문화의 모든 것!

신라와 고려 때 흥성했던 우리 차 문화는 조선조로 접어들며 거의 멸절의 수준으로 내몰렸다. 차는 배탈이 났을 때 먹는 상비약이었을 뿐, 기호음료와는 애초에 거리가 멀었다. 역대 문집 속에 차에 관한 시문이 실려 있긴 해도, 연행 길에 사온 중국차를 마시는 호사 취미에 지나지 않았다. 공물로 바쳐지는 차는 일반에게 차례가 돌아올 만큼 생산되지 않았다.
조선의 차 문화는 다산과 초의, 추사에 의해 다시 일어났다.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는 이 세 사람을 중심에 두고 집필되었다. 대부분의 기록은 다산에서 출발하여 초의로 수렴된다. 그 사이에 추사의 존재가 없었다면 초의차의 명성은 그다지 높아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의 탁월한 안목과 실천이 명맥이 다 끊어진 차 문화의 불씨를 되지펴놓았다.

1. 까맣게 잊혀진 차 문화의 재발견을 알리는 신호탄, 『부풍향차보』와 『동다기』
잊혀졌던 차 문화는 18세기로 접어들며 비로소 새롭게 되살아났다. 그 시작은 우연한 계기에서였다. 부안현감 이운해는 고창 선운사 차밭의 존재를 알고서, 이곳의 찻잎을 따와 7종향차를 만들었다. 그러고는 그 방법을 『부풍향차보』란 기록으로 남겼다. 하지만 이것은 고창 사람 황윤석의 일기에 잠깐 기록되고 말았을 뿐 이어지지 못한 채 그대로 잊혀졌다. 그로부터 40년 뒤, 진도로 귀양 온 죄인 이덕리가 『동다기』를 지었다. 그는 역모에 관련된 죄인이었으므로, 저술을 남기고도 자기 이름 석 자조차 떳떳하게 밝히지 못했다. 이후 이 책은 오랫동안 다산 정약용의 저술로 잘못 알려져 실물도 없이 고전이 되었다.
조선 후기 차 문화의 출발점은 『부풍향차보』에서『동다기』에 이르는 시기로 꼽는다. 이 두 저술의 존재는 까맣게 잊혀진 차 문화의 재발견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조선 후기 백과전서적 지식 경영의 열기는 웰빙의 흐름을 타고 차에 관한 관심을 고조시켰다. 여기에 다시 디딤돌을 놓아 차 문화의 꽃을 활짝 피운 이가 다산 정약용이었다.

2. 차 문화 중흥의 기폭제가 된 다산 정약용
귀양지의 척박한 환경에서 다산 정약용은 건강을 많이 상했다. 늘 틀어박혀 공부만 하는 생활은 신체 기능의 저하를 불러왔다. 답답한 현실로 울화가 쌓여 어쩌다 고기 몇 점만 먹어도 체증이 되었다. 부실한 영양 상태로 학질을 달고 살았다. 나중에는 빈혈과 중풍까지 왔다. 차를 마셔야만 해결될 문제였다.
기존의 논의에서 흔히 다산이 초의에게 차를 배웠다거나, 아암 혜장에게서 차를 배웠다고 하지만 그 반대다. 다산은 귀양 오기 전에도 차에 대한 식견이 높았다. 내려와서 병 때문에 차를 찾았다. 1805년 우연히 만덕산 백련사로 놀러 갔다가 주변에 야생 차가 많이 자라는 것을 보고, 아암 혜장 등 백련사 승려들에게 차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아암 혜장과 그 제자 수룡 색성 등이 다산이 일러준 제법에 따라 차를 만들어 다산께 드렸다. 이후 다산의 제다법은 백련사에서 보림사와 대둔사의 승려들에게까지 퍼져 나갔다. 이규경의 「도차변증설」, 이유원이 쓴 장시 「죽로차」와 『임하필기』 중의 「호남사종」 외 여러 기록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된다.
다산이 마셨던 차는 어떤 형태였을까? 오늘날 마시는 녹차와는 전혀 달랐다. 다산차는 일반적으로 떡차였다. 1830년 다산이 제자 이시헌에게 보낸 편지에 떡차 만드는 방법이 자세하게 나온다. 삼증삼쇄, 즉 찻잎을 세 번 찌고 세 번 말려 곱게 빻아 가루를 낸 후, 돌샘물에 반죽해서 진흙처럼 짓이겨 작은 크기의 떡차로 만들었다. 다산은 유배 이전에 지은 시에서 이미 차의 독한 성질을 눅게 하려고 구증구포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구증구포든 삼증삼쇄든 다산차가 찻잎을 쪄서 말리는 과정을 여러 차례 반복해서 차의 독성을 중화시키고, 가는 분말로 빻아 반죽해 말린 떡차였음은 분명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중국 사람처럼 기름기 많은 음식을 선호하지 않는 채식 위주의 담백한 식단이었다. 독한 차를 그대로 마시면 위장에 큰 부담을 주었기 때문에 다산은 차의 독성을 눅여서 우리나라 사람에게 맞게끔 구증구포 또는 삼증삼쇄의 떡차 제조법을 개발했다.

3. 차의 시대를 활짝 연 초의 스님
초의는 다산의 손때 묻은 제자다. 초의가 다산초당을 처음 찾은 것은 1809년이었다. 당시 다산이 48세, 초의가 24세였다. 초의가 차를 배운 것은 물론 다산에게서였다. 선지식을 찾아 참구하고 실망하기를 반복하던 초의가 다산을 만나 급속도로 그 학문과 인품에 빨려들어가는 과정은 초의의 시집 속에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초의가 초당을 드나들 당시, 다산은 이미 차를 만들고 있었으므로 그 제법이 초의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초의차가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진 것은 1830년의 일이다. 그 이전 초의 관련 기록에서는 차와 관련된 언급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초의는 1830년에 스승 완호의 사리탑 기문을 받기 위해 상경했다. 그때 예물로 준비한 것이 보림백모 떡차였다. 우연히 벗을 통해 이 차의 맛을 보게 된 박영보가 「남차병서」시를 지어 사귐을 청하고, 초의가 이에 화답함으로써 초의차가 세상에 처음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그의 스승 신위가 다시 「남차시」를 지어 그 차맛을 격찬하며 전다박사로 추켜세우자, 초의의 명성은 경향 간에 드높게 퍼져나갔다.
홍현주의 요청에 따라 초의가 「동다송」을 지으면서 우리 차는 이론 방면에서도 깊이를 갖추게 되었다. 초의는 이 한 편의 장시에서 차의 역사와 우리 차의 효용, 그리고 차를 마시는 절차와 방법에 이르기까지의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였다.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에서 수없이 인용된 초의차에 관한 여러 사람의 시를 종합하면, 제다 방법뿐 아니라 포장법, 차 이름까지도 선명하게 복원된다.

4. 차에 대한 애호를 예술로 담아 보급시킨 추사 김정희
초의차가 경향 각지에 유명해진 데는 누구보다 추사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초의차를 맛본 추사는 이 차에 깊이 매료되었다.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수십 통의 편지는 차 이야기를 빼고 나면 남는 것이 별로 없을 정도다. 그는 끊임없이 회유하고 협박하고 구슬러서 초의에게서 차를 뺏어냈다. 차를 얻기 위해 글씨를 써주고 그림을 그려주었다. 호들갑스럽기까지 한 그 편지들을 읽다 보면 추사의 차 애호가 어떠했는지 절로 알게 된다. 당대 예단에서 추사가 차지한 비중 때문에 초의차의 명성 또한 덩달아 대단해졌다. 추사는 초의뿐 아니라 그의 제자 향훈과 지리산의 여러 승려들에게서도 차를 구해 마셨다.
제주도에 유배 가서 차가 떨어지자 빈랑 잎으로 황차를 만들어 마시기까지 했다. 초의에게는 제발 장마철에는 차를 보내지 말고, 보내더라도 항아리에 밀봉해서 보내줄 것을 요청할 정도였다. 그가 마신 차의 양은 결코 적지 않았다. 그는 차에 대한 답례로 많은 글씨를 써서 선물했다. 추사가 이들 승려에게 써준 편지와 글씨는 우리 차 문화사에 잊지 못할 아름다운 장면으로 기억된다. 그는 앞장서서 우리 차의 예찬자가 되었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점을 강조했다. 여기에 박영보와 신위 등이 한몫 거들고, 정조의 외동사위였던 홍현주까지 가세하자, 초의차의 명성은 하늘을 찔렀다.

5. 들불처럼 번져간 차에 대한 열기
초의뿐 아니라 호의나 향훈, 색성 같은 승려들도 차를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다산의 두 아들이 호의에게 보낸 수십 통의 편지 또한 차에 관한 얘기를 빼고는 말하기가 어렵다. 정학유는 자신이 먹는 차의 양이 1년에 수십 근이 넘을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차에 대한 관심의 고조는 찻물이나 차도구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좋은 물을 찾아 여행을 떠나곤 했다. 추사의 동생 김명희는 「다법수칙」 같은 글을 통해 제다법을 향후에게 귀띔해주었다. 초의와는 「사차」시를 주고 받으며 차에 대한 벽을 피력했다. 여기에 신헌과 신헌구, 이상적과 이유원 등이 가세했고, 범해 각안이 「차약설」과 「차가」를 짓는 등 실로 조선 후기 차 문화는 전에 없던 성황을 이룩했던 것이다.
이유원은 아예 다옥을 마련하고 차를 즐겼고, 보이차와 일본 차에 대해서도 귀중한 기록을 남겼다. 이상적은 백두산에서 나는 백산차와 가야사 5층탑에서 나온 용단승설차에 관한 증언을 남겼다. 각 지역에서 나는 차와 샘물에 관한 기록도 이 시기에 이르러 부쩍 늘어난다.


옛글을 현대적 언어로 풀어내는 작업에 몰두해온 정민 교수,
수십 년간 반복 누적되어온 학술적 오류를 바로잡다!

차 문화에 대한 기존 저술에서는 학술적으로 적지 않은 문제가 발견된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오류가 수십 년을 반복되며 누적되어가는 경우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대표적 차 고전이라 할 「동다송」은 각 구절 밑에 해당 전거를 각주로 달아놓았다. 이것을 단락 표시로 착각하면서 17송이니 31송이니 하는 이상한 분절법이 생겨났다. 고작 40여 구에 불과한 한 편의 시를 수십 토막으로 잘라 읽는 독법이 지금도 바른 방법인 양 행세하고 있다.
흔히 다산의 말로 즐겨 인용되는 “차 마시는 민족은 흥하고, 술 마시는 민족은 망한다.”는 음다흥국론 같은 것은 다산이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말이다. 어디서 나왔는지도 모를 얘기가 오늘도 신화처럼 떠돌고 있다.
초의가 백운동에 갔다가 거기서 백학령(白鶴翎)이란 신품종의 국화를 보고 쓴 시가 있다. 그런데 첫 번역에서 이 백학령이 국화 품종의 이름인 것을 모르고 백학이 난다고 해석했다. 그래서 다음에 실린 ‘그 중의 한 그루를 나눠 화분에 심고’라는 시가 느닷없이 ‘차나무 한 그루를 화분에 심고’로 둔갑해버렸다. 나중에 이 시는 한국의 차시 속에 버젓이 포함되었다. 지금까지 십여 종의 『초의시집』의 번역이 나왔어도 이 오류는 전혀 고쳐지지 않고 있다.
『동다기』에 ‘구방지상마(九方之相馬)’란 말이 나온다. 중국 고대에 천리마를 잘 알아보던 구방고란 사람이 말의 관상 보듯이, 차의 맛을 잘 감별해낸다는 뜻으로 쓴 말이다. 정작 차 문화 강의 교재에는 ‘아홉 방향으로 서로 말을 타고’로 풀이되고 있다. 이런 식의 오역과 오류의 답습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정민 교수는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에서 차 문화에 대한 차학을 전공하는 전문인의 양성이 시급함을 이야기하며, 우리도 중국에서처럼 우리 차 문화사를 종합하는 전망을 수립할 때가 되었음을 강조한다. 차를 마시고 향을 사르며 인생의 정취를 음미했던 선인들의 정신을 되살리기 위해서 앞으로 한국의 차 문화사 전반으로 관심을 확대할 작정임을 비쳤다. 원문을 부록으로 실어 가독성을 높였고, 상세한 연표는 차 문화사의 맥락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무엇보다 한국과 중국의 박물관과 개인 소장가들에게서 구한 다채로운 도판들이 훌륭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정민

충북 영동 출생. 한양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모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한문학 전공. 옛글을 현대적 언어로 풀어내는 일에 몰두해왔다. 문학을 넘어 문화사 전반으로 사유를 확장 중이다. 최초의 차 저술인 『동다기』의 발굴을 계기로 차 문화 연구에 빠져들었다. 다산, 초의, 추사를 중심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차 문화의 융성을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로 집대성했다.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비슷한 것은 가짜다』, 『미쳐야 미친다』,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 『고전문장론과 연암 박지원』 등의 책을 펴냈다. 『한시미학산책』, 『정민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이야기』, 『꽃들의 웃음판』 등 한시 관련 저술과, 『마음을 비우는 지혜』, 『내가 사랑하는 삶』, 『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 『돌 위에 새긴 생각』, 『다산어록청상』, 『성대중 처세어록』, 『죽비소리』 등 청언 소품집을 펴냈다. 수필집 『책 읽는 소리』, 『스승의 옥편』 외에 연구서로 도교적 상상력을 다룬 『초월의 상상』, 새의 기호학적 의미를 문학과 회화 작품을 통해 읽어본 『한시 속의 새, 그림 속의 새』 등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