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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위한21가지제언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 유발 하라리

Chapter 7.탈진실|어떤 가짜 뉴스는 영원히 남는다

우리는 요즘 ‘탈진실 post-truth’이라 부르는 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는 말을 반복해서 듣는다.

 

사방이 거짓말과 허구로 둘러싸인 무서운 시대다. 사례는 어렵지 않게 들 수 있다.

 

2014년 2월 말의 일이었다. 군 계급장을 달지 않은 러시아 특수부대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크림반도의 핵심 시설을 점령했다. 하지만 러시아 정부는 물론 푸틴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서 이들이 러시아군이라는 사실을 반복해서 부인하며, 이들은 자발적인 ‘자위 집단’이며 현지 상점에서 러시아제로 보이는 군 장비를 구했을 거라고 주장했다. 이런 자가당착적인 주장을 편 푸틴과 그 측근들도 자신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다.

 

 

이런 거짓말을 두고도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은 보다 높은 진실에 봉사하기 위한 것이라는 핑계를 댈 수 있다. 러시아가 지금 정당한 전쟁을 치르고 있고, 정당한 대의를 위한 살인이 문제가 없다면, 거짓말쯤이야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그들이 우크라이나 침공을 정당화한다고 주장한 보다 높은 대의는 신성한 러시아 민족의 보존이었다. 러시아 민족주의 신화에 따르면, 러시아는 수천 년에 걸친 사악한 적들의 침략과 해체 기도를 이겨낸 신성한 실체다.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은 과거 몽골족과 폴란드인, 스베아족, 나폴레옹의 대육군 Grande Armée, 히틀러의 국방군 Wehrmacht에 이어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나토와 미국, 유럽연합이 러시아의 몸통 일부를 떼어내 우크라이나 같은 ‘가짜 국가들’로 만드는 식으로 러시아를 파괴하려 든다고 주장한다. 많은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에게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별개 민족이라는 주장이야말로 푸틴이 러시아 민족 재통합의 신성한 사명을 수행하면서 했던 그 어떤 발언보다도 훨씬 큰 거짓말에 해당한다.

 

이런 설명을 듣고 우크라이나 시민과 외부 관찰자, 전문 역사가 들이 격분하는 것은 물론, 이런 주장을 러시아의 속임수 병기 중에서도 일종의 ‘거짓말 핵폭탄’으로 간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크라이나를 별개의 민족이자 독립된 국가로 보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수많은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는 처사다. 가령, 러시아가 수천 년에 걸쳐 단일 국가로 이어져왔다고 주장하지만 키예프와 모스크바가 같은 국가에 속했던 것은 300년밖에 되지 않는다. 또한 과거에 러시아는 독립 우크라이나의 주권과 국경을 보장한 수많은 국제법과 조약을 수용했음에도 이제 와서 위반하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수백만 우크라이나인들이 자신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무시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발언권도 없단 말인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도 러시아 민족주의자들 말대로 주변에 가짜 국가들이 있다는 데는 분명히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그런 가짜 국가가 아니다. 가짜 국가들이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무단 침공을 위장하려고 세운 ‘루한스크 인민공화국’ ‘도네츠크 인민공화국’ 같은 것들이다.

 

어느 편을 지지하든, 우리는 실제로 무서운 탈진실의 시대에 살고 있는 듯 보인다. 비단 특정한 군사적 사건뿐 아니라 전 역사와 민족이 가짜로 조작될 수 있는 시대다.

 

하지만 만약 지금이 탈진실의 시대라면 진실의 태평성대는 정확히 언제였나? 1980년대? 1950년대? 1930년대? 그리고 탈진실의 시대로 넘어가게 한 것은 무엇이었나? 인터넷인가? 소셜 미디어인가? 푸틴과 트럼프의 부상인가?

 

역사를 대충 훑어보기만 해도 정치 선전과 거짓 정보는 새로운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심지어 민족을 통째로 부인하고 가짜 국가를 만드는 습관조차 유서가 깊다. 1931년 일본 육군은 중국 침략을 정당화하려고 자작 모의공격을 벌였고, 그런 다음 괴뢰국가인 만주국을 세워 정복을 정당화했다. 그런 중국 자신은 티베트가 독립국가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오랫동안 부인해왔다. 영국은 호주 점령을 ‘무주지 선점 terra nullius’의 법리로 정당화해 사실상 5만 년 원주민의 역사를 지워버렸다.

 

20세기 초 시온주의자들이 가장 좋아한 슬로건은 ‘땅 없는 사람(유대인)의 사람(팔레스타인인) 없는 땅으로의’ 귀환을 내세운 것이었다. 그 지역에 있던 아랍 사람들의 존재는 편리하게 무시됐다. 1969년 이스라엘의 골다 메이어 총리가 팔레스타인 사람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한 적도 없다고 한 말은 유명하다. 그런 견해는 지금도 이스라엘 내부에서 아주 흔하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대와 수십 년째 무력 분쟁을 해왔으면서도 말이다. 가령, 2016년 2월 이스라엘의 국회의원 아나트 베르코는 의회에서 연설하며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실체와 역사를 의문에 붙였다. 그녀가 제시한 증거가 무엇이었는지 아는가? 팔레스타인이라는 단어의 머리글자인 ‘p’조차 아랍어 철자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어떻게 팔레스타인 사람이 존재할 수 있겠느냐는 주장이었다. (아랍어에서는 f가 p에 해당한다. 따라서 팔레스타인 Palestine을 아랍어로 표기하면 Falastin이 된다.)

 

탈진실의 종
 

사실 인간은 늘 탈진실의 시대를 살아왔다. 호모 사피엔스야말로 탈진실의 종이다. 호모 사피엔스 특유의 힘은 허구를 만들고 믿는 데서 나온다. 석기시대 이래 줄곧 자기 강화형 신화는 인간 집단을 하나로 묶는 데 기여해왔다. 실로 호모 사피엔스가 이 행성을 정복한 것도 무엇보다 허구를 만들고 퍼뜨리는 독특한 능력 덕분이었다. 우리는 수많은 이방인들과도 협력할 수 있는 유일한 포유동물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도 허구의 이야기를 발명하고 사방으로 전파해서 수백만 명의 다른 사람들까지 그 이야기를 믿도록 납득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동일한 허구를 믿는 한, 우리는 다 같이 동일한 법을 지키게 되고, 그럼으로써 효과적으로 협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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