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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위한21가지제언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 유발 하라리

Chapter 6.정의|우리의 정의감은 시대착오적일지도 모른다

나 자신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경제적, 정치적 유대의 연결망에 의존해야 하고, 전 지구 차원의 인과관계까지 너무나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

 

정의

우리의 정의감은 시대착오적일지도

 

우리의 다른 모든 감각들이 그렇듯이, 정의감도 오랜 진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인간의 도덕은 수백만 년에 걸친 진화 과정에서 형성된 것으로, 수렵·채집인이 소규모 무리를 이뤄 살면서 직면했던 사회적, 윤리적 딜레마를 해결하는 데 맞게 조정돼왔다.

 

가령, 만일 내가 당신과 같이 사냥을 나갔다가 나는 사슴 한 마리를 잡았는데 당신은 아무것도 못 잡았다면, 나는 내가 잡은 사슴을 당신과 나눠 가져야 할까? 만약 당신이 버섯을 캐러 갔다가 바구니 한가득 담아서 돌아왔는데 내가 당신보다 힘이 세다면 그 버섯을 내가 다 빼앗아도 될까? 만약 당신이 나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알았다면 어두운 밤을 틈타 선제공격에 나서 당신의 목을 베어도 될까?

 

겉으로 봐서는 우리가 아프리카 초원을 떠나 도시 정글에 이르기까지 변한 것이 많지는 않은 듯하다. 보기에 따라서는, 지금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 — 시리아 내전, 세계 불평등, 지구온난화 — 은 예전의 문제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문제는 규모다. 정의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도저히 적응했다고 할 수 없다.

 

 

문제는 어떤 가치에 있는 것이 아니다. 21세기의 시민들은 종교가 있든 없든 각자 수많은 가치를 추구한다. 문제는 이 가치들을 복잡한 지구촌 세계에서 실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화근은 숫자에 있다. 수렵·채집인 시절의 정의감은 수십 제곱킬로미터 넓이의 지역에 모여 사는 수십 명의 생활에 관련된 딜레마에 대처하도록 구성된 것이었다. 그렇게 형성된 도덕감으로 오늘날 온 대륙을 가로질러 수백만 명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려고 할 때는 압도될 수밖에 없다.

 

정의를 실행할 때에는 일련의 추상적인 가치뿐 아니라 구체적인 인과관계까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만약 당신이 아이들을 먹이려고 버섯을 캐 왔는데 내가 버섯 바구니를 강제로 빼앗았다면, 이런 행동은 당신이 했던 일을 헛수고로 만들고 아이들을 굶주린 채로 잠들게 만든 것이기 때문에 누가 봐도 부당하다. 이런 것은 이해하기 쉽다. 인과관계를 파악하기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오늘날 우리가 사는 지구촌 세계의 내재적 특징은 인과관계가 고도로 분기화하고 복잡해졌다는 것이다. 가령, 나는 남에게 해를 끼칠 만한 일은 그 무엇도 하지 않고 집 안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다. 하지만 좌파 운동가들에 따르면, 이런 나는 요르단강 서안 지구의 이스라엘 정착민들과 병사들이 저지르는 잘못을 수수방관하는 협력자가 된다. 또한 사회주의자들에 따르면, 내가 누리는 안락한 삶은 비참한 제3세계 노동착취공장에서 자행되는 미성년 노동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동물복지 운동가들은 내 삶이 인류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범죄 중 하나에 얽혀 있다고 일깨운다. 그 범죄란 수십억 마리에 이르는 농장 가축들을 잔인한 착취 체계 아래 둔 것을 가리킨다.

 

그 모든 것에 대해 나는 정말 비난받아야 할까? 답하기가 쉽지 않다.

 

나 자신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경제적, 정치적 유대의 연결망에 의존해야 하고, 전 지구 차원의 인과관계까지 너무나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나로서는 가장 단순한 질문에조차 답하기 어렵다.

 

가령 내가 먹는 점심은 어디에서 오는 건지, 내가 신는 신발은 누가 만든 건지, 내가 가입한 연금기금은 내 돈으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와 같은 질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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