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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 인문학> - 개빈 에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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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파랑과 초록의 난제 _<컬러 인문학>

* <컬러 인문학>의 본문을 일부 미리 봅니다.

 

파랑과 초록은 서로 다른 색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나뭇잎과 풀은 초록색이고 하늘과 바다는 파란색이다. 서로 달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몇몇 문화권에서 그 둘은 같다. 파랑은 비교적 최근에 색표에 추가되었으며, 세계의 몇몇 지역에서는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다. 파랑이 영어에 등장하게 된 것은 겨우 11세기에 들어와서였다. 이는 아마도 자연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싶다. 하늘은 그저 하늘이고 바다는 그저 바다일 뿐인 데다 둘 다 색을 자주 바꾸기 때문이다. 그 외에 자연은 파랑을 생산하는 데 매우 인색하다(우리는 블루베리, 파랑새, 청파리, 참다랑어, 블루벨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이 모두는 보라에 가깝다). 이는 또 역사적으로 파란색 염료와 색소가 부족했다는 사실과도 관계가 있다. 암각화에서는 파랑이 아예 존재하지도 않을뿐더러 이후 몇천 년이 지나도록 이 색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파랑과 초록의 난제

 

대부분의 현대 유럽 언어에서 ‘파랑’이라는 말의 어원은 실재하는 파란색 사물이 아니라 검정이나 초록에서 시작됐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파랑을 아주 좋아해 이를 가리키는 말이 따로 있었던 데 비해 중국인,일본인, 유대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실제로 그들은 파랑을 아예 색으로 보지 않았을 수도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파랑은 그저 초록의 변종일 뿐이었고 그래서 이름도 따로 없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는 검정과 흰색, 그 외 어두침침한 색조에 대해서는 수백 번 넘게 언급했지만 파랑은단 한 차례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진한 포도주 빛깔 바다wine-dark sea’에 대해서는 이야기하면서 푸른 바다에 대해서는 일절 말이 없었다.

 

 

이집트인들이 파란색을 가리키는 이름을 만들어 사용했던 데에는 청금석에 대한 접근이 용이해 이를 예술에 적용했다는 사실이 어느 정도 원인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남는 시간이면 그리스 고전을 연구했던 개혁 성향의 영국 총리 윌리엄 글래드스턴은 호메로스에게 파랑에 대한 어휘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그리스인들은 색맹이 틀림없었다고 생각했다. 글래드스턴이 미처 깨닫지 못했던 점은 이러한 언어적 색맹은 비단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중국인, 일본인, 유대인들에게까지 나타나며, 힌두교의 베다 찬가는 천체에 대한 다채로운 표현으로 가득하지만 여기서도 하나의 색으로서 파랑은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세상 모든 언어를 고려할 때 파랑을 하나의 고유한 색으로 인정하는 태도는 검정이나 흰색, 빨강, 노랑, 초록에 비해 비교적 늦게 나타난다.

 

줄루어, 한국어, 베트남어, 타이어, 쿠르드어를 비롯해 몇몇 현대 언어의 경우에도 파랑과 초록의 경계가 불분명하기는 마찬가지다.

 

파랑과 초록을 혼동하기 쉬운 이유 중 하나는 그 둘이 색채 스펙트럼에서 나란히 붙어 있기 때문인데, 그렇다 보니 어떤 사람들은 큰 차이를 못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몇몇 문화권에서는 색을 명기할 때 다른 요인들이 작용한다. 예를 들어 태평양 뱅크스 제도의 모타섬 주민들에게 색을 식별하는 기준은 밝은 정도와 분위기, 질감과 관련되어 있다. 색의 밝기와 광택의 유무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이 주어지지만 나뭇잎의 초록은 하늘의 파랑과 동일한 색이다.

 

앙골라 국경 근처에서 반유목 생활을 하는 나미비아의 힘바족 5만여 명은 명확한 청록 구별 능력 때문에 최근 들어 관심을 받고 있다. 색에 대한 이름과 표현이 많은 서구인들에 비해 힘바족에게는 딱 네 개, 그러니까 ‘zoozu’(초록, 파랑, 빨강, 보라 같은 주로 진한 색), ‘vapa’(흰색과 노란색 계열), ‘borou’(그 외 초록과 파랑 계열), ‘dumbu’(그 외 초록, 빨강, 갈색 계열) 밖에 없다.

 

 

위는 힘바족의 색 인식 능력을 알아보는 실험에 사용했던 유색 사각형이다. 어떤 사각형이 다른 것들과 다른 색조인지 구별 할 수 있겠는가?

사각형 한 개가 섞인 상태에서 색을 구분해보라는 주문을 받았다. 그들은 구분하는 데 애를 먹었다. 그런 다음 부족민들 앞에 초록 사각형 여러 개가 주어졌다. 그중에는 음영이 다른 초록 사각형도 하나 섞여 있었다. 그들은 이번에는 전혀 애를 먹지 않았지만 서구 지원자들은 그 반대였다. 힘바족이 색과 관련해 이처럼 특이한 이유는 그들의 사냥 환경, 즉 빛과 어스름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들은 파랑과 초록 같은 색을 구분하는 데에는 애를 먹지만 서로 다른 색조를 판단하는 데에는 아주 뛰어나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인들처럼 힘바족에게도 파랑을 가리키는 말이 없는 것이다. 파랑은 그들에게 굳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색에 관한 한 언어가 인식을 좌우하는 듯하다.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예를 들어 러시아인들이 그렇듯 파랑을 둘로 나눈다. 대신 그들은 짙은 파랑dark blue, 연한 파랑light blue, 바랜 파랑pale blue, 아주 연한 파랑baby blue, 고운 파랑navy blue, 차가운 파랑icy blue, 하늘빛 파랑sky blue 같은 한정형용사를 사용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빨강은 연한 빨강이나 창백한 빨강보다는 분홍을 동반한다. 분홍은 빨강과 다른 색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청록색turquoise

 

색채 전문가들은 청록색은 70퍼센트가 파란색이고 30퍼센트가 녹색이라고 말한다. 공교롭게도 이 이름은 준보석에서 유래했다(보석의 원산지가 터키라 생겨난 이 말은 19세기 후반에 영어권으로 건너왔다). 다른 모든 색깔이 그렇듯 오늘날 청록색도 하늘색celeste, 청록색turquoise blue, 밝은 청록색light turquoise, 중간 청록색medium turquoise, 짙은 청록색dark turquoise, 신비한 진줏빛 청록색pearl mystic turquoise 등으로 세분된다. 현대 패션에서 청록색은 주로 여성복 색으로 각광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