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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데우스: 미래의 역사

<컬러 인문학> - 개빈 에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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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남자아이에게 분홍색은 무슨 의미일까?

* <컬러 인문학>의 본문을 일부 미리 봅니다.

 

남자아이들을 위한 분홍

 

뉴캐슬어폰타인대학교 진화심리학자와 신경과학자 팀은 2007년 다소 괴상한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그들은 자연선택을 통해 분홍을 선호하는 여성과 파랑을 선호하는 남성으로 진화했다는 개념에서 출발했다.

 

그들은 영국 학생 208명과 부분군을 이루는 중국 학생 37명에게 여러가지 색을 보여주고 마우스를 클릭해 그중 가장 좋아하는 색을 고르라고 주문하는 방법으로 실험을 진행했다. 그런데 약간 놀랍게도 세계 다른 지역의 이전 연구들에서도 그랬듯이 남학생뿐만 아니라 여학생이 가장 좋아하는 색도 파랑이었다. 이는 파랑이 남녀 공히 가장 좋아하는 색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보여준다.

 

하지만 연구진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여학생들은 남학생에 비해 분홍을 좀 더 좋아했다. 연구진은 분홍에 대한 선호가 생물학적인 진화의 결과라고 결론 내리고 소급 적용되는 해결책을 내놓았다. 파랑에 대한 선호의 기원과 관련해 연구진을 이끈 안야 헐버트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사바나 시절로 되돌아간다면 우리는 자연스레 파란 하늘에 끌릴 겁니다. 파란 하늘은 곧 좋은 날씨를 뜻했기 때문이지요. 투명한 파랑은 또 한 좋은 수원을 뜻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중심 주제인 여성의 분홍에 대한 선호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했다.

그 답은 인간이 수렵-채집 생활을 하던 시절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당시 여성은 주로 채집 활동을 했고 따라서 빨갛게 잘 익은 과일을 찾아내는 능력이 중요했을 겁니다.

 

박사는 빨강을 좋아하는 특징을 유발하는 임의적 유전자 변이가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다는 점은 둘째치고 빨갛게 잘 익은 과일을 좋아하는 것이 분홍에 대한 선호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다시 말해 그와 같은 특징이 유전자가 정상인 사람들의 선택적 진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이러한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의 언론 매체들은 연구진의 결론을 앞다퉈 받아들였다.

 

〈타임스〉는 ‘과학, 남자아이는 파랑을 좋아하고 여자아이는 분홍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이유를 드디어 밝혀내다’ 라는 제목의 기사를 뽑았고, 아무도 그 기사 내용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아들에게는 파란색을 입히고 딸에게는 분홍색을 입히는 부모들이 이제부터는 전통이 아니라 저 깊이 자리한 진화의 본능을 따를 가능성이 높다.

 

또 잡지 〈타임〉은 “여성은 생물학적으로 분홍색을 좋아하도록 프로그램화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분홍색 옷을 입은 소년The Pink Boy〉(토머스 게인즈버러, 1782)과 〈분홍색 세일러복을 입은 소년의 초상화Portrait of a Pink Boy in a Sailor Suit〉(자크 에밀 블랑슈, 20세기 초)를 보면 20세기의 반대 경향이 나타나기 전까 지 남자아이에게 분홍색 옷을 입히는 것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벤 골드에이커는 〈가디언〉에 기고하는 ‘배드 사이언스’라는 칼럼에서 문제의 실험이 빨강의 서로 다른 음영을 식별하는 능력보다 선호도를 측정하도록 고안되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는 다시 말해 실험이 아전인수격 결과를 제시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그와 다른 몇몇 회의론자들이 깊이 파본 결과 문서 보관소에서 좀 더 결정적인 판단의 근거가 나왔다. 결국 여자아이들의 분홍 선호 취향은 실은 매우 최근의 현상이었을 뿐이다.

 

예를 들어 1897년으로 되돌아가 〈뉴욕타임스〉는 〈아기의 첫 번째 옷〉이라는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충고했다.

분홍은 대개 남자아이의 색으로, 파랑은 여자아이의 색으로 간주되지만 어머니들은 그 문제에서 자신의 취향을 따르면 된다.

 

17년 뒤 〈아메리칸 선데이 센티널〉은 이보다 좀 더 단호한 어조로 어머니들에게 “기존의 전통에 따르고 싶다면 남아에게는 분홍을, 여아에게는 파랑을 입히라”고 충고했다. 비단 미국에서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1918년 〈브리티시 레이디즈 홈 저널〉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실었다. “일반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지는 통념에 따르면 남자아이에게는 분홍이, 여자아이에게는 파랑이 좋다. 분홍은 좀 더 분명하고 강해 보이는 색으로 남자아이에게 더 잘 어울리지만 파랑은 좀 더 섬세하고 얌전해 보여 여자아이한테 더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이 당시 분홍을 남성적으로 보았던 이유 중 하나는 빨간 피와의 연관성 때문이다. 이 남자다운 색에서 나온 밝고 옅은 색은 당연히 소년들의 색이었다. 인도를 비롯해 다른 나라들에서는 좀 더 대담한 분홍이 소년들뿐만 아니라 성인 남성에게도 강한 남성적 함의를 지니고 있었다.

 

 

소녀복 마케팅은 1950년대부터 분홍 쪽으로 심하게 기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