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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 인문학> - 개빈 에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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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11가지 색에 담긴 인류 문화 '분홍색'에 담긴 인류사 _<컬러 인문학>

* <컬러 인문학>의 본문을 일부 미리 봅니다.

 

분홍은 새로운 색이다.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자연에는 분홍 색소가 없으며 역사의 대부분을 통틀어 우리가 현재 분홍으로 부르는 색조 계열은 따로 이름이 없었다. 파란색 계열의 연한 파랑처럼 분홍은 그저 연한 빨강이었을 뿐이다.

 

17세기와 18세기에 들어와 회화, 도자기, 의류 분야에서 분홍의 인기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특히 프랑스에서 그랬는데, 이곳에선 분홍을 ‘로즈rose/roze’ 또는 ‘로즈 퐁파두르rose Pompadour’라고 불렀다. 왕의 애첩 퐁파두르가 그 색을 유난히 사랑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유럽 언어에서 분홍이라는 색은 장미에서 유래한다. 스페인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노르웨이어, 스웨덴어로는 ‘rosa’, 네덜란드어로는 ‘roze’, 루마니아어로는 ‘roz’, 포루투갈어로는 ‘rosa’, 폴란드어로는 ‘różowy’, 체코어로는 ‘růžový’, 크로아티아어로는 ‘ružičast'이다.

 

세계 몇몇 지역에서는 장밋빛 또는 분홍의 사용이 훨씬 오랜 역사를 지닌다.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와 인도의 직물에서 그랬다. 하지만 분홍과 관련된 오늘날의 문화적 함의는 생겨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영어로 ‘분홍pink’이라는 말은 원래 백악으로 밝기를 더한 노랑을 뜻했다. 여우 사냥에 관심이 없다면 진한 빨강을 가리킬 수도 있다. 이 말은 또 주름 장식이 있는 가장자리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던 용어이기도 하다. 끝을 지그재그로 자르는 가위를 ‘핑킹가위pinking shears’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때문이며, 오늘날의 분홍이 탄생하게 된 것도 이 경로를 통해서였다. 연한 빨강 패랭이꽃이나 카네이션은 끄트머리를 핑킹가위로 다듬은 것처럼 보이는 꽃잎 때문에 ‘분홍’으로 알려졌으며, 이러한 우회로를 거쳐 17세기 말에 접어들면 ‘분홍’이라는 말이 연한 빨강과 연관되면서 하나의 색으로 자리 잡는다.

 

 

오늘날 분홍은 어린 소녀들의 장난감, 요정 드레스, 신발, 여성들의 차와 전화기 등 여성적 방향으로 기울어 있다. 또 유방암 캠페인의 색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분홍은 나치가 남성 동성애자들에게 낙인을 찍기 위해 사용했던 역삼각형의 색깔이기도 하다. 그때 이후로 분홍이 당당한 동성애자의 상징 중 하나로 다시 자리매김되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1970년대 후반에는 동성애자의 권리를 촉구하는 운동의 상징으로 분홍색 역삼각형 이 채택되었다. 이로써 나치 강제 수용소의 남성 동성애자 수감자들이 착용했던 분홍색 역삼각형 배지는 점차 복권되기 시작했다. 이 역삼각형은 나치에 희생당한 동성애자들을 기리는 추모비에도 사용되고 있다.

 

 

한편 일본에서는 ‘핑크 필름pink film’이 가벼운 포르노를 가리키는 용어로 자리 잡았다. 때로 분홍의 의미는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밝은 마젠타 핑크와 검정이 한데 섞이면 흰색 점이 있는 연한 분홍에 비해 좀 더 선정적인 의미를 띤다. 하지만 이 중 어느 것도 고유한 색이 아니다. 모르긴 해도 짧은 시간 안에 분홍만큼 그 의미가 많이 바뀐 색도 없지 않을까 싶다.

 

분홍색 돈pink money이란 과연 뭘까?

 

도로시 달러로도 알려진 핑크 달러와 핑크 파운드는 동성애자 사회의 시장구매력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택시, 항공사, 나이트클럽, 식당, 결혼식 서비스, 출판, 음악, 화장품 회사, 심지어 건설사와 배관업체를 비롯해 많은 사업체들이 동성애자 전용이라고 광고하면서 동성애자를 고객층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동성애자의 연간 구매력은 2012년 기준 미국에서만 2조 달러로 집계되는 등 큰 폭의 성장세를 보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