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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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시간을 위하여> - 김형석

Chapter 5.#5. 조금, 오래된 이야기들_책 속 수필선: 길과 구름과 실존

조금, 오래된 이야기들

_책 속 수필선 길과 구름과 실존

 

하늘에는 구름이 흐르고 땅에는 길이 깔렸고 내 마음에는 사색이 계속되고….

 

 

매일 오후마다 나는 산책을 즐긴다.

 

어려서부터 길을 많이 걸어야 했고 또 걷기를 즐겼다. 초등학교 5, 6학년 때에는 십 리나 되는 산길을 걸었고 중학교 시절은 이십 리나 넘는 먼 거리를 통학했다. 나는 갈대와 같이 모든 꿈을 길 위에 뿌려놓았고, 앞으로 찾아올 삶의 파노라마를 무수히 그렸다가는 지우곤 했다.

 

그때부터 산길을 좋아했고 자연을 소요하는 습관을 떼어놓을 수 없게 되었다. 부산 피난살이에서는 바닷가 바위틈 자갈길이 잊을 수 없는 인상이 되었고, 서울 삼청동 뒷산 길의 아침 안개는 내 파란 많은 삶에 고요한 보금자리가 되어주었다.

 

지금도 고개를 넘으면 또 고개, 고개 마루턱에 올라서면 또 굽이도는 산길을 무턱대고 끝없이 걸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참으로 돌고 또 돌고, 넘고 또 넘는 산길은 끝없이 우리를 부르는 매혹과 애착, 기대와 불안을 동시에 가져다주곤 한다.

 

이러한 나에게 지난봄 신촌으로 이사를 오게 된 데는 나만이 아는 하나의 숨겨진 즐거움이 있다.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그러나 우거진 숲, 돌들이 앙상히 드러난 산길, 파란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만이 아는 즐거움이다.

 

곧 나는 신촌의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게 되었고, 도심지에서는 소유할 수 없었던 푸른 하늘, 밤 달빛을 내 것으로 삼았다. 지난여름 친구들에게 신촌은 하늘이 보여서 좋다고 말했더니, 친구들은 내가 거짓말이나 하는 듯이 웃고만 있었다.

 

그러나 시내 도심지 인조 세계에 사는 그들이 어떻게 하늘과 구름을 소유할 수 있겠는가. 다방 속 연기 자욱한 문명의 노예들과 마주 앉는 것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빗방울이 떨어지는 아침이면 우산의 필요 여부나 알려고 잠시 기계적으로 하늘을 쳐다볼 뿐 도대체 도시인들이란 하늘을 보며 살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세상에는 질서가 있고 생활에는 의미가 있듯이 산책에도 이치가 있다. 아침 산책은 마음의 그릇을 준비하고 육체의 건강을 촉진시키는 소임所任을 맡아주고, 저녁 산책은 마음의 내용을 정리하여 육체의 휴양을 채워준다. 사색을 위해서는 오전이나 오후의 소요가 자연의 변화를 동반하지 않으므로 좋고, 자연의 미를 느끼기에는 해 뜨기 전에 떠나서 아침볕과 같이 돌아오는 길이 좋다.

 

석양을 받으며 떠나서 황혼에 돌아오는 산책도 자연을 감상하기에 흡족하다. 안개 속 소나무 사이로 흘러드는 아침저녁의 고요, 산 밑이 온통 그림자로 채워지는 부드러운 장막 속에 잠겨보는 심정, 이 모두가 얼마나 아름다운 정서인가! 사람들은 바빠서 산책의 여유가 없다고 한다. 평생 그렇게 마음이 바쁜 사람은 큰일을 남기지 못하는 법이다. 동중정 정중동動中靜 靜中動이란 귀한 교훈이다.

나는 봉원사奉元寺 앞 화장터 맞은편 산길을 골라 연세대학교 뒷산 중턱을 끼고서 도는 코스를 택한다. 여러 해 전에는 내 키보다도 낮았던 소나무들이 이제는 내 키의 배나 될 만큼 자랐다. 혼자 걷는 산길은 끝없이 고요하고 아늑하다. 이따금씩 새소리도 들려오고, 여름 장마 때면 샘물이 굴러 흐르는 소리도 들려온다.

 

생각에 잠기고 문제들이 꼬리를 물고 찾아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목적지 아닌 종착점에 도달한다. 원래가 산책을 위한 산책은 목적지가 없고 사학자史學者와 같은 관찰이 필요 없다. 그것은 나 같은 산책객에게는 돈을 벌기 위해 노래를 부르고 배부르기 위해 차를 마시는 것과도 같이 느껴진다.

 

산이면 무슨 산이나 좋고 그 이름을 모으는 산이면 더욱 좋다. 구태여 꽃 이름을 묻지 않고 새의 노래를 구별치 않는다. 이렇게 종점에 도달하면 나는 나무가 없는 잔디밭에 누워버린다. 지금까지는 길이 내 발을 끌어주었으나 하늘과 구름은 내 마음을 푸른 저쪽으로 이끌어 간다. 빈 마음에 빈 하늘을 담는다. 하늘 끝까지 바라본다.

 

 

구름은 파란 하늘에 손님인 양 움직이고 용모를 바꾸며 흘러간다. 검은 연기가 바른편 굴뚝에서 솟아오른다. 홍제원 화장터에서 오늘도 또 하나의 육체가 재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아까 산책을 떠날 때에는 신촌 화장터 굴뚝에도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도대체 이렇게 저물었는데 그들의 넋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내가 산책을 떠날 때, 그때는 신촌 화장터에서 한 육체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와 보니, 또 하나의 생명이 땅에서 없어지고 있다. 한 생명의 마지막은 나의 산책길에서 시작이 되었고, 또 한 생명의 사라짐은 내 산책길의 마지막이 된다.

 

결국은 처음이나 마지막이 동일한 것뿐인데 다른 것은 내 주관뿐인지 모른다. 시간은 영구하고 인간들은 그 영원의 바닷가에서 소꿉질을 하다가 사라진다면 거기에 무슨 시종이 있으며 성패가 있으며 행幸과 고苦가 있겠는가. 본래가 무한 속에 유한이란 있을 수 없는 법이며 시간과 영원이란 차원이 다른 것이다. 이런 생각에 잠겨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는 두 화장터의 사라지는 생명과 육체들을 남의 것으로 보았고 객관적인 사실로 돌렸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현실이라고 생각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삶의 애착보다는 삶의 완성욕完成慾을, 사망의 공포보다는 삶의 주체아를 생각할 때, 비로소 여기에 또 하나의 자아 실존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신촌 화장터의 죽음을 무시하고 사망의 허무를 박차고 삶의 줄을 타고 떠났다. 안심과 희망과 기대가 있었다. 그 화장터가 멀어질수록 마음의 만족이 찾아왔다.

 

그러나 새로운 문제가 나타났다. 또 하나의 화장터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비존재非存在에의 가능성, 삶의 공허화가 있을 뿐이다. 결국은 내 삶이 화장터에서 시작해 또 다른 화장터에 매여 있는 것뿐이다.

 

니체의 말과 같이 모든 삶은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앞으로 가려니 공허 위에 달려 있는 줄이기에 두렵고, 뒤로 돌아서자니 마찬가지의 공허가 있다. 그대로 머물러 있자니 밑으로 떨어질까 두려워진다.

 

오히려 다행스러운 것은 내가 사색에 잠겨 앞도 뒤도 모르고 살아왔던 일, 앞을 보지도 않고 생각에 몰두했던 것뿐이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내 산책과 같은 삶을 그대로 지니고 있지 않은가. 그사이에 정치를 떠들고 예술을 논하고 학學을 주장하고 돈을 벌고 삶을 즐기고 더 나아가 삶을 연구한다고? 그러는 동안에 인생은 목적지가 아닌 종점에 도달하고야 만다.

 

여기에 사르트르의 20세기 실존 철학은 먼 옛날 석가세존의 젊은 시절 생각의 한 갈래에 지나지 못하며 나사렛 예수가 가리키는 손끝을 세인世人들이 부정 못하고 바라보는 이유가 성립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