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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시간을 위하여> - 김형석

Chapter 4.#4. 살아간다는 것_인생론: 어떻게 늙어갈 것인가

늙는다는 것, 그 두 가지 형태

 

몇 해 전 읽었던 기사가 생각난다. 일본의 한 여론조사에서 ‘당신은 몇 살부터 늙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는가’라고 물었다. 그에 대한 대답은 약간 뜻밖이었다. 이십 대 후반부터였다는 것이다.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 초반까지는 피곤을 느낀다든지 쉬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일이 없는데 이십 대 후반부터는 피곤이 가시지 않는가 하면 체력의 한계를 느끼곤 했다는 것이다.

 

삼십 대가 되니까 배가 나오기 시작하고, 사십 대에는 머리카락이 희어지거나 빠지는 현상이 뚜렷해지고, 오십을 넘기니까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을 발견하게 되곤 했다는 조사였다. 육십이 지나면 이미 늙었으니까 더 말할 필요도 없어지고. 그렇게 일찍 노쇠 현상이 나타나는가 싶었으나 이야기를 듣고 보면 수긍이 가는 내용이기도 하다.

 

 

 

동양인들의 체력은 여자가 22세, 남자가 24세가 정상기라고 한다. 그 뒤부터는 서서히 체력이 하강하다가 사십 대가 되면 성인병 현상이 나타나고 ‘나는 늙었구나’ 하는 생각을 누구나 하는 것이 보통이다. 여자 농구 선수가 25세에 체력이 달려 더 못 뛰겠다고 은퇴하며, 축구 선수들의 전성기도 이십 대 후반기로 바뀌고 있다. 기술이 뒷받침하기 때문에 더 활약하기도 하나 체력은 이미 고비를 넘기고 있다.

 

만일 그런 신체적 조건으로 따진다면 인간은 누구나 20대 후반부터 늙어가는 것이 사실이다. 서서히 성장이 떨어져 육십을 넘기고 생로병사의 후반 과정을 밟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의 정신적 성장은 그렇지 않다. 이십 대 후반기나 삼십 대 초까지는 겨우 철들어 성장을 더해가기 시작한다.

 

사십 대가 되면 인간적 성장이 왕성해지며, 50대에는 기억력보다 소중한 사고력이 앞서게 된다. 그러다가 인간적 완성기는 육십이 넘으면서 가능해진다.

 

사람들은 ‘인생은 육십부터’라는 말을 자주 한다. 정신적 성장과 그 완숙기는 육십부터라는 뜻이다.

 

나는 내 가까운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인생의 성숙기는 언제로 체험했는가를 정리해본 바가 있다. 모두의 결론은 육십 세부터 칠십오 세까지였다는 얘기였다. 중요한 저서가 쓰인 것도 칠십 대 초반이었고 자신의 사상과 정신적 위상이 형성된 것도 같은 기간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육십이 되기 전까지는 인생의 의미도 깨닫지 못했는가 하면 삶의 보람도 터득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인기를 따라 움직이지 않고 소수이기는 해도 존경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육십 이전에는 불가능했다는 것이 일생에 대한 회고담이었다.

 

독일에서는 오래전부터, 미국에서도 1993년 이후부터는 대학교수의 정년은 따지지 않는 것은 정신적 성장, 사상과 학문의 성숙은 오래 가능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칠십까지는 누구나 강의를 하고 더 하고 안 하는 것은 자신의 학문적 성장의 문제라고 보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무엇 때문에 이런 문제를 제기해보는가.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은 두 가지 면에서 잘못된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그 하나는

 

신체가 늙으면 인생 자체가 늙어버리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소중한 정신적 건강과 성장을 일찍부터 포기해버린다.

 

그것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상실하는 일이다. 신체적 건강도 그렇다. 사십까지는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머문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십이 넘으면서부터는 강건한 정신력을 가진 사람이 건강한 신체를 유지하는 법이다. 육십을 넘긴 뒤부터는 더욱 그러하다.

 

또 하나의 잘못된 관념은 내 늙음과 성장을 주변적 환경에 맡겨버리는 일이다.

 

최근에는 일찍 직장을 떠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그래서 직장을 떠나 일거리를 잃게 되면 나는 할 일이 없어졌다고 해서 스스로 의욕과 성장을 포기하기 쉽다. 직장을 떠난다고 해서 일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일은 찾으면 얼마든지 있다. 일이 없어졌다고 해서 내 시간과 삶까지도 빼앗길 필요는 없다. 자신의 정신적 성장은 선택과 노력에 따라 달라질 수가 있다.

 

 

옛날부터 우리는 육십, 즉 회갑 관념에 붙잡혀 살았다. 육십은 이미 늙어버린 나이이며 칠십은 고희古稀라는 잠재 관념 때문에 회갑만 지나면 나 자신도 늙었다고 생각하며 칠십이 지났는데 누가 나를 인정하며 받아주겠는가 하는 생각을 스스로 해버리곤 한다.

 

육십이라고 해서 늙으라는 법도 없으며 칠십을 지냈다고 해서 나 자신을 늙은이로 자인할 필요도 없다. 인생은 육십부터이며 칠십은 완숙기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때때로 사회 지도층에 있던 사람들이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곤 한다. 그럴 때는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는데 늙는 것을 어떻게 하느냐고 체념한다. 그러나 10년의 세월이 지났다고 모두가 늙으라는 법은 없다. 사십 대도 공부하지 않고 일을 중단하면 녹슨 기계와 같아서 노쇠해진다. 그러나 육십이 되어서도 공부하며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사람은 젊은 활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인생이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운명적으로 주어져 있는 신체적 늙음 속에 어떻게 강력한 정신적 활력을 충당시켜 인간적 보람과 젊음을 유지하는가에 달려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오랜 세월을 공동체 안에서 살아온 노인들이 욕심의 노예가 되면 그 삶은 심히 추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사실이다. 나이 들면서 가장 삼가야 하는 것 중의 하나는 노욕에 빠지지 않는 일이다. 불행하게도 인생의 지혜를 상실한 노인들이 노욕을 극복하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_81쪽에서

 

 

나이 들면 공적인 일은 배후에서, 개인적인 일은 계속해서 진행시키는 자세가 꼭 필요하다. 그 어느 것에도 참여하지 못할 때는 취미 활동에서 삶의 보람을 이어가는 것이 옳다고 본다. 인간은 일을 통해 봉사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다면 늙었다고 해서 그 가능성을 포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_90쪽에서

 

 

젊었을 때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 용기가 만용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지적 판단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러나 용기가 없는 젊은이는 큰 뜻을 펴지 못한다. 장년기가 되면 일에 대한 신념이 있어야 한다.

_91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