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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데우스: 미래의 역사

<남아 있는 시간을 위하여> - 김형석

Chapter 3.#3. 살아간다는 것_인생론: 산다는 것의 의미

산다는 것의 의미

 

삶의 출발은 누구나 다 같다. 그러나 도달하는 목표는 모두가 다르다. 동일한 방향에서 앞뒤의 거리가 있는 것만이 아니다. 방향 자체도 제각기 다른 삶을 사는 것이 인생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아의 발견과 완성이라는 일차적인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인간은 식물이나 동물과 같이 종류로 구별하지 않는다. 개인으로서의 개체가 인간이다. 따라서 개성이 없는 인간은 제구실을 하지 못하며 인간다운 삶을 누리지 못한다.

 

만일 내가 없다고 상상해보라. 그러면 무엇이 남겠는가. 나의 무無는 그대로 세계의 공허를 가져온다. 내가 있음으로써 역사, 사회, 세계가 나를 중심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내가 아는 세계 속에 살게 되어 있으며 나와의 관계성 속에서 세계의 의미를 찾는다.

 

 

그러면 나는 누구인가. 나에게는 육체적 자아가 있고 정신적 자아가 있다. 이 둘이 합해서 하나의 인격 자아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나의 육체성이 아니다. 인간의 육체는 두 가지 면에서 언제나 공통성을 갖고 있다. 동일한 본능적 요소를 갖고 있으며 주어진 유래성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므로 인간들의 육체에는 큰 차이와 구별이 없다. 인간을 육체만으로 따진다면 인간도 역시 한 가지 동물의 종류에 속할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가장 뒤떨어지고 보기 흉한 동물일지 모른다. 동물은 죽을 때도 아름다움을 잃지 않으나 인간의 우는 모습은 가장 보기 흉하다는 누군가의 말이 생각난다.

 

육체적 인간은 공간에 속하기 때문에 크고 작은 차이도 별로 없으며, 삶의 내용이 같으므로 가치를 평가할 표준이 없다. 유래성이라는 것은 육체적 자아는 이미 주어진 것이라는 뜻이다. 체격, 체질, 체력 등 모두가 날 때부터 주어진 그대로이다.

 

그러므로 나의 나됨은 육체적 자아가 아니다. 정신을 지닌 인격으로서의 자아이다.

 

우리는 육체가 없는 인격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신적 자아야말로 나를 만드는 자아이다. 그러면 이러한 자아는 어떻게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는가.

 

인간은 오랫동안 육체라는 자연의 껍질 속에서 살아야 한다. 본능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삶을 누린다. 그러는 동안에는 정신적 자아가 나타나지 않는다. 자아의 발견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언젠가는 육체와 본능의 울타리를 스스로 넘어서는 때가 찾아온다. 그때 비로소 내가 나를 보고 알게 되며 자아의식이 움트게 된다. 우리의 정신이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정신적 자각이 없는 동물은 죽을 때까지 자아의식을 갖지 못한다. 자기 자신을 보거나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러한 자아의식은 언제 나타나는가, 자신에 대한 자각은 어떻게 가능한가.

 

 

사람들은 그것을 넓은 의미의 교육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가르치고 배우는 동안에 자신의 정신이 자라고 자아의식을 지니게 된다.

 

이때의 교육은 넓은 의미의 체험이다. 그리고 정신적 사고를 뜻한다. 여러 가지를 체험하고 많은 문제를 생각하게 될 때, 우리는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교육은 자기를 발견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며, 교육이 계속되는 동안 인간은 꾸준히 자아를 찾아 성장하는 것이다.

 

교육이 그치면 성장도 그친다. 체험이 멎으면 삶이 끝난다. 새로운 사색을 못하는 사람은 자기를 키워갈 능력을 잃는다.

 

그러나 자아의식을 남달리 강렬하게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막연하게 자아를 느낄 뿐 뚜렷한 개성과 자각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100의 자아의식과 20의 자아의식을 갖는 사람이 같다고는 볼 수가 없다.

 

그러면 강렬한 자아의식을 갖는 사람은 어떤 성격의 인간인가. 자아 속에 남다른 문제의식을 느끼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이 가질 수 없는 깊고 중요한 문제를 갖는 사람은 그만큼 자아의식이 뚜렷해진다. 그러나 인간이면 누구나 갖는 문제로 만족하는 사람은 자아의식도 빈곤하며 그에게는 확실한 개성이나 뚜렷

한 자아성이 없다.

 

 

예술가는 예술을 통한 문제의식이 강렬하기 때문에 그만큼 자아의식도 뚜렷해진다. 사상가는 자기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하기 때문에 남보다 다른 자아성을 지니고 산다. 이 문제는 육체나 본능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신이 자기통일과 성장을 위해 불가피하게 찾아 누리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성격의 교육도 두 가지 책임을 가진다. 처음 과정은 자아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 교육이며 다음은 스스로 문제를 발견할 수 있도록 이끄는 노력이다.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 중학년 때까지는 정신적인 성장을 돕는 일반적인 교육으로 그친다. 그 이상의 것은 아이들이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고등학교 상급반이나 대학생이 된다는 것은 어떤 문제의식과 더불어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흔히 전공의 선택이나 생의 방향 결정이라고 부른다.

 

만일 우리 가운데 전공과목을 내가 선택할수 없었다든지, 대학에 다니면서 남다른 문제의식 없이 세월을 보내왔다면 그것은 질적으로는 고등학교의 연장일 수는 있어도 문제의식이 뚜렷한 대학생이라고는 볼 수가 없다. 공과에서 기술은 습득할 수 있고, 상과에서 부기 이론은 배울 수 있어도 자신의 문제를 갖고 자기의 삶을 영위하는 인간으로는 성장할 수가 없다.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찾아 해결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기발견은 자아의식에서 오며 그 자아의식은 문제의식에서 싹튼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어떤 문제를 가지고 사느냐가 어떤 인간이 되느냐이며, 어떤 문제를 해결 지었는가가 어떤 생애를 살았는가와 통한다.

 

우리가 젊은 지성인들에게 문제의 소유자가 되어달라고 부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