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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동양신화> - 정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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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이야기 동양신화] 수렵 사회에서 농경 사회로의 변화와 '농업의 신'

 

수렵 사회에서 농경 사회로

 

염제 이전의 옛날 사람들은 살아가기 위하여 들로 산으로 뛰어다니며 먹을 것을 구해야 하는 원시 수렵 생활을 했다. 대개 사냥을 해서 짐승의 고기만을 먹고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염제 시대 무렵에는 인구가 늘어나면서 수렵만으로는 먹고살기가 어렵게 되었다. 날이 갈수록 인구 증가에 따른 식량문제가 점차 심각해진 것이라고나 할까. 염제는 백성들이 굶주리는 것을 보고 대책을 마련하기에 골몰했다. 그러고는 드디어 식량을 생산해내기 위해 농업을 발명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도 몇 가지 설이 있다. 일설에 따르면 염제가 식량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곡식의 비가 내렸다고 한다. 염제가 하늘에서 쏟아진 곡식들을 심어 비로소 농업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염제가 약초를 캐서 광주리에 가득 담아 돌아오는 모습 완전히 인간화된 모습이 다. 머리위로약초를감별하는채찍이보 이고 손에 영지괈芝버섯 같은 것을 들고 있다. 요괞나라 때 작자 미상의 그림 <채 약도採藥圖>

 

또 다른 설에 따르면 몸빛이 붉은 새 한 마리가 주둥이에 아홉 개의 이삭이 달린 벼를 물고 하늘을 날아다

니더니 그 이삭이 땅에 떨어졌다고 한다. 염제가 그것을 주워 밭에다 뿌렸는데 사람들이 그 쌀밥을 먹고 배가 부른 것은 물론, 늙어도 죽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인류가 염제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수렵 채취의 단계에서 농업의 단계로 옮겨 갔

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불은 농업과 어떤 관련이 있기에 염제는 두 개의 신적인 속성을 함께 지니게 되었을까?

 

처음에 농업이 시작되었을 때는 경작지가 없었기 때문에 산에 불을 질러 화전을 일구어 농사를 지었다. 이 때문에 불의 신이 농업의 신과 동일시되었을 것이다. 아울러 염제는 태양신이기도 한데 태양이 작물의 생장을 주관한다는 사고가 염제로 하여금 농업의 신도 겸하게 하였을 것이다.

 

또 붉은 새 한 마리가 벼이삭을 물고 날아왔다는 이야기도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붉은 새는 그 빛깔로 보아 불의 신인 염제의 사자임을 암시하고, 많은 곡식 중 벼이삭을 물고 온 것은 도작농업이 강남 지역에서 비롯되었음을 시사한다. 염제는 남방의 신이기 때문이다.

 

염제는 또한 의약의 신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한의학을 창시한 신인 셈이다.

 

 

풀을 씹어 맛을 보고 있는 염제 |약초인지 독초인지를 알기 위해 염제가 직접 풀을 씹어 그 맛을 보고 있 다. 염제의 이러한 행위는 질병에 대한 원시인류의 높은 관심을 반영한다 《천지인귀신도감》에서.

염제는 어떤 풀이 인간에게 이롭고 해로운지를 감별하여 알려주었는데, 동진 시대에 지어진 소설집인《수신기》2에 의하면 염제에게는 자편이라는 신비한 붉은 채찍이 있어서 이 채찍으로 풀을 한 번 후려치면 그 풀의 독성의 유무와 맛, 특징 등을 다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염제는 천하의 산과 들을 다니면서 모든 풀이 어떠한 약효가 있는지를 파악하여 인간의 병 치료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한의학의 고전으로서 모든 한약재를 분류, 기록해놓은《신농본 초경》3이라는 책은 염제의 이러한 신화적 행위를 기려 이름 붙여진 것이다.

 

그러나 일설에 따르면 신비한 붉은 채찍 같은 것은 없었고 염제는 매일 직접 풀을 씹어서 맛을 보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염제는 종종 독초에 중독되기도 하였는데, 그럴 때에 차 잎을 씹으면 해독이 되었다고 한다. 중국인들이 즐겨 마시는 차의 효능을 염제 신화에 기대어 강조한 것이리라.

 

또 다른 설에 따르면 염제가 단장초라는 풀을 맛보다가 그만 창자가 끊어져 죽고 말았다고 한다. 이는 염제 신화가 민간에서 전설로 변하면서 그를 지나치게 인간화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 밖에도 염제가 인간을 위하여 행한 중요한 업적으로는 시장을 개설한 일이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만나 편하게 물건을 바꿀 수 있도록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장소에서 시장을 열도록 한 것 이다.

 

태양신인 염제는 해가 하늘 한가운데에 왔을 때를 시장을 여는 시각으로 정하였다. 그때에 사람들을 모이게 하고 물건을 가지고 오게 하여 교역을 행하도록 하였다. 염제가 시장을 개설하였다는 것은 고대의 농경 사회가 어느 정도 성숙한 단계에 진입하여 초보적으로 도시가 형성된 현실을 반영한다.

물·땅·시간의 신을 자손으로 두고, 고구려·월남에서 인기 있는 신

염제는 한나라 때에 만들어진 신들의 계보에서는 남방을 다스리는 지역신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사실은 중앙을 다스리는 황제보다도 일찍 등장하여 인류 문명의 초기에 많은 공적을 끼쳤던 위대한 신이었다. 그런데 그가 지역신으로 격하된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앞서 말했듯이 그가 후배 신인 황제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신들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너그럽고 인자한 염제에 비하여 젊은 황제는 야심만만하고 권력 지향적이었다. 염제는 황제와 두 차례의 큰 전쟁을 벌였다. 한번은 본인이 직접 휘하의 신들을 거느리고 판천이라는 곳에서 싸웠다. 또 한 번은 그의 후계자인 치우가 대신하여 탁록이라는 곳에서 싸웠다.

 

지존의 자리를 두고 벌이는 싸움이니만큼 치열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이 두 차례의 전쟁에서 패한 염제와 치우의 신족은 그들이 원래 거주했던 대륙의 동방에서 쫓겨나 미개지인 남방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염제의 패배와 황제의 승리, 이것은 자유롭게 공존했던 신들의 세계가 강력한 신에 의한 지배의 시대, 중심의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

 

염제는 비록 남방의 지역신으로 전락했지만 황제보다 앞서 대륙을 지배했던 까닭에 그의 후손 중에는 유명한 신들이 많으며 중국 및 주변 민족의 시조나 영웅들 중에도 그의 자손이 많다. 예컨대 불의 신 축융과 물의 신 공공共工, 땅의 신 후토와 시간의 신 열명 등이 모두 그의 자손이다.

 

흥미로운 것은 염제에게 딸이 넷 있었는데 이 여신들이 제각기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어서 후세 사람

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는 점이다. 가령 적제녀는 뽕나무의 신이 되어 살다가 승천했고 요희는 무산의 신녀가 되어 초나라의 회왕과 사랑에 빠졌으며, 여와는 동해를 건너다 익사하여 새로 변신하였고, 이름이 소녀로만 알려진 또 다른 딸은 적송자라는 신선을 따라가 도를 닦았다. 염제의 딸들에 대한 이러한 다양한 이야기들은 염제가 엄숙하기만 한 황제와는 달리 로맨틱하고 정감 있는 신이라는 이미지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신선 적송자|오른쪽에 이신의 상징인 붉은 소나무, 곧 적송이 한 그루 있다. 염제의 딸, 한고조 유방의 명신 장량등이 이 신선을 따라가 불사의 도를 배웠다고 한다. 명 왕세정의 《열선전전》에서.

염제는 대륙에서는 패배자였지만 주변 민족에게는 인기가 높았다. 그가 동방에서 남방으로 터전을 옮겼던 탓인지 동방과 남방의 민족들이 그를 시조신으로 섬기는 경우가 많다. 월남의 개국 신화에서 염제는 민족의 시조신으로 등장한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염제는 사람의 몸에 소의 머리를 하고 손에 벼이삭과 약초를 쥔 모습으로 나타나서 우리를 놀라게 한다.

 

이것이야말로 염제의 신화적 형상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중국에는 이러한 생동적인 염제의 그림이 없다. 염제는 이미 인간화하여 의젓한 임금님이 되어 있을 뿐이다.

 

인류를 위해 그토록 좋은 일을 많이 했던 염제, 그러나 염제는 별다른 잘못 없이 황제에게 지존의 자리를 빼앗기고 만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우라노스나 크로노스가 각기 젊은 신에게 자리를 빼앗긴 것은 나름대로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너무 탐욕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비롭고 베풀기 좋아하는 염제가 황제에게 축출된 것은 무언가 부당한 것 같고 억울한 느낌이 든다.

 

이 느낌, 그것은 흔히 말하는 한과 같은 것이 아닐까? 힘없고 약한 사람들이 품는 한의 정서가 동방의 신이었다.

 

남방으로 쫓겨간 염제의 억울한 심정에 멀리 뿌리를 대고 있다면 그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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