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김영사가 기획한 특별한 즐거움.
책과 함께하는 재미가 가득합니다.

21세기를위한21가지제언

<퐅랜, 무엇을 하든 어디로 가든 우린> - 이우일

  • 다른회 보기
  • 1
  • 2
  • 3
  • 4

Chapter 1.#프롤로그 <퐅랜, 무엇을 하든 어디로 가든 우린>

 

나는 도시를 좋아해서 적지 않은 도시를 여행했다. 그리고 그리 많은 시간이 흐르지 않아 사람 사는 모습이란 지구 위 어느 곳에서든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새로 찾은 도시의 첫인상은 언제나 저마다 모양과 색깔이 달랐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익숙해지면 그 도시에서의 삶도 떠나온 곳에서의 삶과 일란성 쌍둥이처럼 닮아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한편으론 반가웠고,

다른 한편으론 아쉬웠다.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내 둥지와 닮은 곳을 찾아내 기뻤고, 같은 이유로 마음이 또 다른 새로운 곳을 향하게 되어 슬펐다. 나는 늘 ‘익숙한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원했다.

 

왜 나는 자꾸만 낯선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걸까. 이유가 특별히 없다면 그 자체가 바로 목적이 아닐까. 어쩌면 새로움과 낯섦을 찾아 헤매는 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목적일지 모른다.

새로운 곳, 낯선 환경. 그런 데에서 조금 오래 머물러보고 싶었다.

 

꽤 오래전에 비교적 장기간 머문 곳이 있다. 이집트의 작은 바닷가 마을 다합과 캐나다의 몬트리올이다.

1997년 초 몇 달은 다합에서, 여름 몇 달은 몬트리올에서 보냈다. 사실 두 곳에서의 기억 가운데 특별히 대단한 건 없다. 시간이 느릿느릿 기어가는게 보일 정도로 난감하게 한가하고 한없이 무료한 나날이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그래서 그때의 시간과 장소들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야 할 젊은 날, 나는 별로 하는 일도 없이 그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이집트에선 반나절은 바닷가에 누워 책을 읽었다. 몬트리올에선 쿠폰을 끊어 일주일에 한두 번 동네에 있는 작은 극장에 갔다. 마침 ‘몬트리올 국제 재즈 페스티벌Festival International de Jazz de Montréal’ 기간이라 공연도 구경했다. 매일매일 마시고 춤췄다. 젊은 날의 일탈이었다. 돈을 벌고 미래를 위해 준비해야 할 시간이었지만, 나는 쳇바퀴에서 빠져나와 한없이 빈둥거렸다. 지는 해를 바라보며, 주홍빛 바다 냄새를 맡았다. 발가락 사이로 모래 알갱이를 느끼고 아내의 여린 손길을 느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어디에서든 할 수 있다. 이제 지구 위, 사람이 사는 도시는 어디나 비슷비슷하니까. 아시아든 유럽이든 아메리카든 별 차이가 없다. 세계의 도시는 좋든 싫든 점점 더 닮아만간다.

 

내 고향은 서울이다. 하지만 내가 서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태어나 살아온 도시지만 나는 서울의 부분적이고 특정한 것들만을 마음 내키는 대로 기억할 뿐이다. 어디 살든 자기가 속한 도시에서의 삶은 각자의 것이다. 서울에 백 명이 산다면, 백 개의 서울이 존재하는 것과 같다. 만약 내가 서울이 아닌 다른 도시를 선택해 살게 되면, 나만의 서울이 존재하는 것처럼 나만의 어떤 도시가 존재하게 될 것이다. 세계의 도시가 다 비슷해 보일 지라도 지구 위 사람들은 각각의 도시를 모두 다른 도시로 기억한다.

 

 

오리건Oregon 주 퐅랜Portland. 이 도시를 어떻게 발견했는지 모르겠다. 여기에 도착하기 전에는 지도를 보여주며 찾아보라고 해도 못 찾을 만큼 잘 모르는 도시였다. 우연히 책에서 보고 호기심에 이것저것 알아봤다. 그냥, 괜찮을 것 같았다.

나는 그저 내가 잘 모르는 도시를 찾고 있었다. 잘 모르는 도시, 그래서 내 삶을 새롭게 발견할 수밖에 없는 도시를. 그렇게 황당하게 태평양을 건너와 이 년을 살았다. 당연히 나는 아직도 이 도시를 잘 모른다. 하지만 나는 퐅랜이 좋다. 이곳의 삶도 다른 도시에서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겠지만,

나는 날마다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있다. 결코 사사롭다고 할 수 없는,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만한 것들이다. 그런 것들이 특별히 이 도시, 퐅랜이라서 더욱 좋거나 소중한지는 모르겠다. 그냥 어쩌다보니 이 도시에 나는 서 있다. 아내와 딸 그리고 고양이 한 마리와 함께. 다행히 이곳이 무척 마음에 든다. 퐅랜, 나는 이 도시가 좋은데 어떤 게, 뭐가 어떻게 좋은지 이제부터 쓰고 그릴 생각이다.

물론, 지극히 나만의 퐅랜 이야기다. _프롤로그에서

 

포틀랜드 일러스트 지도 ⓒ이우일

 

 

누구나 여행을 떠난다. 누구든 떠날 수 있고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

하지만 그것을 선택하는 것은 온전히 자신에게 달려 있다.

꿈을 꿀 수 있는 자유는 누구에게나 있지만,

현실을 꿈으로 가득 채우는 것은 언제까지나 자기 자신의 선택이다.

_이우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