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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이야기가 된다> - 강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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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4. 내 이름은, 강세형입니다._니콜라이 고골, <외투>

(※ 강세형 작가의 신작 <시간은 이야기가 된다>를 연재합니다. 이 책에는 다양한 책과 영화에 대한 저자의 감상을 담고 있습니다.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내가 절대 바꿀 수 없는 것들이 분명 존재한다. ‘니킬’이란 미국식 이름으로 개명을 한 고골리. 니킬이란 이름으로 미국 여자와 미국식 연애를 하고, 그녀의 부모님 집으로 들어가 완전한 뉴요커의 삶을 사는 동안에도, 이따금 고골리를 찾는 누군가의 전화가 걸려 왔다. 고골리가 다른 친구들과 있을 때는 꼭 ‘니킬’이라 부르는 그의 부모님조차 간혹 ‘고골리’란 단어를 입 밖으로 내는 실수를 저지르셨다. 세상에는 내가 절대 바꿀 수 없는,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그저 내게 주어진 것들 또한 분명 존재한다. 나의 이름, 나의 국적, 나의 가족, 그리고 내가 꼭 해야만 하는 많은 일들. 우리는 어떠한 부분에선 반드시 ‘주어진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이제야 네 욕망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구나.”

한 선배가 나의 세 번째 책에 실린 글들을 보고 했던 말. 그때 내 입에선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이렇게 또 열심히 살다 보면, 저도 언젠가는 좋은 작가가 될 수 있겠죠.” 그 말에 내가 더 놀랐던 것 같다. ‘어, 내가 계속 작가로 살 건가 보네….’ 그동안 나는 늘 글로부터 도망갈 궁리만 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요즘은 정말 그런 생각이 가끔 든다는 거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한 20년 후쯤 정말 좋은 작가가 한번 돼 볼까.

 

3백여 페이지가 넘는 긴 시간 동안 고골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이름 고골리와 싸운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서야, ‘니콜라이 고골리의 단편 모음집’을 펼쳐 보게 된다. 그 책은 그의 열네 번째 생일에 그의 아버지가 선물한 책이었고, 그 책의 맨 첫 페이지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너에게 이름을 준 사람이다. 너에게 너의 이름을 지어 준 사람으로부터.’ 이제야 겨우, 자신의 이름과 정면으로 마주한 고골리. 아래층에선 그의 어머니와 가족들, 친척들의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그는 책을 열었다. 작가의 연대표가 눈에 들어왔다. 1852년 사망. 그의 마흔두 번째 생일의 한 달 전이었다. 언젠가는 고골리 또한 그 나이가 될 것이다. 그 나이를 지나 이미 세상을 떠난 그의 아버지도 떠올랐다. ‘우리는 모두 고골리의 외투 속에서 나왔다’는 도스토옙스키의 말과 함께 ‘고골리’와 ‘고골리의 외투’를 좋아했던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것처럼, 그 또한 언젠가는 사라지고, 이미 개명을 한 고골리란 이름 또한 저 아래층 ‘고골리를 아직 고골리라 부르는 사람들’과 함께 언젠가는 법적으로도 소멸된 채 결국 없어지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첫 번째 단편소설을 읽어 나가기 시작한다. ‘외투’였다.

 

 

우리의 이름은, 단순히 ‘누군가에게서 불리기 위한 수단’만이 아니다. 우리의 이름 안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다. 아버지의 성, 가족의 역사, 나의 국적, 내가 선택할 수 없었던, 그저 내게 ‘주어진 삶’이 담겨 있다. 하지만 또 그 안에는 내가 선택할 수 있었고, 결국 내가 선택했던 삶 또한 담겨 있다. 누군가 나의 이름을 떠올릴 때, 그는 나와 관련된 많은 것들을 함께 떠올릴 것이다. 누군가는 내가 쓴 글이나 책을 떠올릴 것이고, 나와 가까운 누군가는 나와 함께한 추억들을 떠올릴 것이다. 그렇게 나의 이름은 누군가에겐 나의 직업일 것이고, 누군가에겐 친구일 것이고, 누군가에겐 원망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사랑일 수도 있다. 나의 수많은 선택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듯, 나의 수많은 선택들이 또 ‘지금의 내 이름’을 만든 것일 테니까.

 

그래서 나는, 궁금해진 거다. 고골리, 그는 그 후 어떻게 됐을까? 자신에게도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어쩌면 이미, 이 한 권의 책 안에서도 그는 여러 번의 선택과 시행착오를 반복했다는 것. 그래서 이 책의 이야기 또한 자신의 선택이 만들어낸 이야기라는 것. ‘주어진 이름’과 싸우고 있다 생각했지만, 실은 부정하고 외면하고 있었을 뿐. 이제야 겨우 자신의 ‘주어진 삶’과 정면으로 마주한, 그래서 내게 ‘주어진 삶’뿐 아니라,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삶’의 존재 또한 알게 된 그는 또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 나 또한, 궁금해서 말이다.

 

내 이름은, 강세형입니다.

 

20년 후에도 나는 내 이름을, 이렇게 소개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내 이름은, 지금의 내 이름과는 또 조금 달라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궁금해진 거다. 20년 후쯤, 나는 또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그동안 내 이름은 또 어떤 새로운 이야기들과 어떤 추억들을 만들어 가며, 어떤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로 기억되고 있을지. 나 또한, 궁금해서. 이제야 겨우 나의 삶과 정면으로 마주한 나의 ‘선택’이 만들어 갈, 나의 20년 후가, 나 또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