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김영사가 기획한 특별한 즐거움.
책과 함께하는 재미가 가득합니다.

호모 데우스: 미래의 역사

<시간은 이야기가 된다> - 강세형

  • 다른회 보기
  • 1
  • 2
  • 3
  • 4
  • 5
  • 6

Chapter 3.#2. 시간은 이야기가 된다_캐럴 실즈, <스톤 다이어리>

(※ 강세형 작가의 신작 <시간은 이야기가 된다>를 연재합니다. 이 책에는 다양한 책과 영화에 대한 저자의 감상을 담고 있습니다.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처음 만나는 작가 ‘캐럴 실즈 Carol Shields’의 이 책을 처음 잡았을 때, 나는 그냥 덤덤했다. 큰 기대나 설렘도 없었고, 그렇다고 재미없으면 어쩌지 미리 걱정이 됐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처음 만나는 사람과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아, 그의 얘기를 듣기 시작할 때의 느낌이랄까. ‘제1장 1905년 탄생’, 나는 이렇게 태어났어요. 그녀는 자신의 탄생 설화로 입을 열었다. ‘그런 사람이 있지. 맨 처음부터 시간의 순서대로 차근차근 얘기하길 좋아하는 사람. 자, 이제 한번 들어 볼까.’ 그렇게 시작된 이 책과의 만남.

모든 인생에는 거의 읽히지 않는, 분명코 큰 소리로 읽히지 않는 그런 페이지가 있기 마련이다.

모든 인생에는 분명코 큰 소리로 읽히지 않는 페이지가 있듯, 이 세상에는 분명코 기록되지 않을 대단찮은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사실, 그런 사람들이 더 많다. 책 ‘스톤 다이어리’의 데이지처럼, 영화 ‘보이후드’의 메이슨처럼, 그저 누구나 겪을 법한 시시콜콜한 얘기들로만 가득 찬 삶이 세상에는 더 많다. 하지만 그 페이지엔 정말 아무 일도 없었을까? 그들은 정말 어떤 이야기도 남기지 않았을까?

 

 

영화 ‘보이후드’의 마지막에서, 이제 열여덟이 되어 대학생이 된 메이슨을 떠나보내며 엄마는 왈칵 눈물을 터뜨린다. “결국 내 인생은 이렇게 끝나는 거야. 결혼하고 애 낳고 이혼하면서. 이제 뭐가 남았는지 알아? 내 장례식뿐이야!” 메이슨이 난독증이 아닐까 걱정했던 시간, 메이슨에게 처음 자전거를 가르쳐 주었던 소소했던 시간들을 떠올리며, 그렇게 두 아이를 키우며 흘려보낸 대단찮은 시간들을 추억하며, 하지만 이제 내 품을 떠나는 아이들을 지켜보며 어쩐지 서러워진 엄마는 이렇게 소리친다.

 

난 그냥 뭔가 더 있을 줄 알았어!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는, 그리고 이 영화와 닮아 있는 책 ‘스톤 다이어리’는, 바로 그 엄마와 같은 생각으로 어쩐지 불쑥불쑥 쓸쓸해지곤 하는 수많은 평범한 삶들에게 보내는 위로다. 뭔가 더 있지 않아도 된다고, 당신이 보낸 그 대단치 않아 보이는 시간들도, 이렇게 모여 한 편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고 말해 준다. 당신이 겪어낸 그 수많은 시간들이 곧 한 편의 영화이며, 한 권의 책이며, 기적이라고. 시간이 만들어 준 기적.

 

죽음을 앞두고 있는 데이지는 생각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누군가 (그것이 누구든)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그리고 우리가 선택됐다. 데이지의 그 평범하고 시시콜콜한 삶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으로. 그리고 나는 그 시간이, 그녀의 인생을 듣는 그 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즐겁고 감동스러웠다.

인간은 오로지 그 최후의 순간까지 음식과 일과 날씨와 대화의 일상적인 음악에 맞춰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어쩌면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오늘도 내 친구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이제 정말 선도 그만 보고 싶다. 선 볼 때마다 우울해지기만 하는데, 우리 엄마는 언제쯤 포기하실까?” 한 달 전에도 이미 들었던 이야기 같은데, 나는 또 깔깔거리며 이렇게 답을 하고 있다. “우울할 게 뭐 있어. 그냥 단편 소설 한 편 읽는다고 생각하면 되지.” 그에게도 분명 이야기가 있을 테니까. 그 또한 시간을 겪어낸 사람이니까.

 

 

“그나저나 오늘 날씨 참 좋다. 볕 좋은 카페에서 책 한 권 읽는다고 생각하면 되겠네.”

 

우리의 이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일상의 대화 또한, 언젠가는 이야기를 완성하는 한 페이지가 될지도 모른다. 우리 또한 지금 켜켜이 시간을 쌓아 가고 있는 거니까. ‘난 그냥 뭔가 더 있을 줄 알았어!’ 불쑥 쓸쓸해진 어느 날 꺼내 볼 수 있는 이야기들을 만들어 가고 있는 중이니까. 아무리 평범해 보이는 순간들만이 계속되는 것 같아도,

 

시간은 이야기가 된다.

나라는 이야기, 우리라는 이야기.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그 시시콜콜한 나의 이야기, 너의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