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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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데우스: 미래의 역사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 - 뤼트허르 브레흐만

Chapter 8.#8 기계에 맞서는 경주

이것이 처음은 아닐 것이다. 20세기 초 기계는 전통적인 직업을 퇴물로 만들고 있었다. 1901년 영국에서 전통적인 직업은 100만 개 이상이었지만 불과 몇 십 년 만에 거의 전부 사라졌다. 엔진 달린 운송 수단이 출현하면서 그들의 소득은 자기 식량조차 대지 못할 정도로 서서히 하지만 확실히 잠식당했다.

 

당연히 짐수레 말의 이야기이다.

 

운전하는 로봇, 책 읽어주는 로봇, 말하고 쓰고 가장 중요하게는 계산하는 로봇이 위험할 정도로 신속하게 발달하다 보니 풍요의 땅에 사는 주민도 일자리를 빼앗길까 봐 마땅히 걱정할 만하다. 노벨상 수상자 바실리 레온티예프는 1983년 이렇게 썼다. “가장 중요한 생산 요소로서 인간의 역할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농업 생산에서 말의 역할이 줄어들기 시작하다가 나중에 트랙터가 도입되면서 사라진 것과 같은 이치이다.”

 

로봇의 등장은 주당 근로시간을 줄이는 동시에 보편적인 기본소득을 제공하자는 주장을 가장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근거이다. 실제로 현재 추세대로라면 구조적인 실업이 발생하고 불평등이 확산될 것이다.

1830년 허더즈빌드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윌리엄 레드비터라는 영국인 장인이 격렬하게 항의했다. “기계는 도둑이고 수천 명을 약탈할 것이다. 결국 깨닫겠지만 기계가 이 나라를 파괴하고 말 것이다."

 

기계는 우선 임금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1969~2009년 풀타임 근로자의 실질적인 중간 임금은 14% 감소했다. 독일에서 일본에 이르는 다른 선진국에서도 임금 성장은 생산성이 계속 증가하는 시기에도 대부분의 직업에서 제자리에 머물렀다. 가장 주목할 만한 원인은 단순하다. 노동력의 희소가치가 점점 떨어지기 때문이다. 기술의 발달 때문에 풍요의 땅에 사는 주민도 전 세계 수십억 근로자와 직접 경쟁해야 하고 게다가 기계하고도 경쟁해야 한다.

 

물론 사람은 말과 달라서 학습하고 성장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교육에 더욱 많은 돈을 쏟아 붓는 동시에 지식 경제를 외치며 만세 삼창을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문제가 하나 있다. 전문직 종사자조차도 걱정해야할 이유이다. 숙련된 근로자였던 윌리엄 레드비터는 1830년 기계화된 직조기가 들어서면서 일자리에서 밀려났다. 그가 교육을 받지 않아서 가 아니라 그의 기술이 갑자기 불필요해졌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러한 운명을 맞을 사람은 더욱 불어날 터였다. 그래서 윌리엄은 “나는 기계가 결국 우주를 파괴하리라 생각한다”고 경고했다.

 

기계에 맞서는 경주에 참여한 것을 환영한다.

 

 

이번은 다르다

 

백만 달러짜리 질문을 던져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미래에는 어떤 일자리가 새로 생겨날까? 더욱 중요하게는 우리가 이 새 일자리를 원할까?

 

물론 구글 같은 기업의 직원들은 군침이 돌 정도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매일 안마를 받으며 넉넉한 급여를 벌어들인다. 그러나 실리콘 밸리에서 일할 수 있으려면 재능이 넘쳐야 하고 야망과 운도 있어야 한다. 이것이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노동시장 양극화” 또는 “열악한 직업”과 “훌륭한 직업” 사이에 벌어진 틈이다.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직업과 기술이 전혀 필요하지 않은 직업은 매우 안정적인 상태로 남아있지만 보통 기술을 보유한 사람이 종사할 수 있는 일자리는 감소 추세이다. 현대 민주주의의 근본인 중산층은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쇠퇴하고 있다. 이 과정의 진행 속도로 보면 미국이 단연 앞서 있지만 다른 선진국도 머지않아 그렇게 될 것이다.

 

오늘날 풍요의 땅에 거주하는 일부 주민은 자신들이 여전히 원기 왕성하고 진정성이 있으며 기꺼이 소매를 걷어 붙이고 일할 준비를 갖추고 있는 데도 한쪽으로 완전히 밀려났다고 실감한다. 20세기 전환기를 맞은 영국 짐수레 말의 처지와 비슷하게도 그들은 임금의 많고 적음을 떠나 자신을 기꺼이 써줄 고용주를 찾지 못할 것이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인력이나 로봇 노동력이 틀림없이 더 쌀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임금이 더욱 싼 아시아나 아프리카에 외주를 주는 편이 훨씬 효율적인 경우가 많겠지만, 아시아나 아프리카 국가에서도 임금과 기술이 선진국을 따라잡는 순간 로봇이 승리할 것이다. 베트남과 방글라데시에서 노동력을 착취하는 작업장까지도 결국 자동화할 것이다.

 

로봇은 아프지 않고 휴가도 내지 않고 불평도 하지 않지만 사람들을 박봉에다가 장래성이 없는 직업에 몰아넣는다면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다.

 

 

자본주의의 미래

 

오늘날 우리 존재의 궁극적 목적이 유급 노동이 아닌 미래를 상상하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하지만 상황이 다른 세상을 상상할 수 없는 것은 상상력이 빈약하다는 뜻일 뿐 상황을 바꿀 수 없다는 증거는 아니다. 1950년대 냉장고와 진공청소기, 무엇보다 세탁기 등이 등장했을 때만 해도 이러한 기술 발전 덕택에 기록적인 수의 여성이 노동시장에 진출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었지만 실제로 그렇게 됐다.

 

그렇더라도 역사의 경로를 결정하는 요인은 기술 자체가 아니다. 결국 인간의 운명을 어떻게 형성할지 결정하는 주체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미국에 널리 퍼져 있는 급진적 불평등은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하는 각본이 아니다. 이러한 현상에 맞서려면 생계를 위해 일해야 한다는 독단적 견해를 21세기 어느 시점에서 거부해야 한다. 사회가 부유해질수록 노동시장은 더욱 비효과적으로 번영을 분배할 것이다. 기술이 베푸는 축복을 누리고 싶다면 궁극적으로 재분배를 선택해야 한다. 그것도 대규모로 재분배해야 한다.

 

돈의 재분배(기본소득), 시간의 재분배(주당 근로시간의 단축), 과세의 재분배(노동이 아닌 자본에 부과하는 세금), 로봇의 재분배가 필요하다.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오스카 와일드는 “모두의 재산”인 지적인 기계로 누구나 혜택을 받는 시대가 오리라 고대했다. 기술적 진보는 사회를 전체적으로 더욱 번성하게 만들지는 모르나 구성원 전체가 혜택을 받으리라고 주장하는 경제 법칙은 없다.

 

얼마 전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사회가 현재 선택한 길을 계속 걸어가면 어느 결에 19세기 말 도금시대로 돌아가리라고 주장해 주의를 끌었다. 주식과 주택, 기계 등 자본을 소유한 사람이 누리는 생활수준이 자본 없이 열심히 일만 하는 사람보다 훨씬 높았기 때문이다. 수백 년 동안 연간 경제 성장률은 2%를 밑돌았지만 자본 수익률은 4~5%였다. 불평등은 강력하고 포괄적인 성장의 재기(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 않다), 자본에 대한 중과세(이것도 가능할 것 같지 않다), 3차 세계대전의 발발(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을 차단하면서 다시 한 번 위협적인 기세로 확대될 수 있었다.

 

교육과 규제, 내핍을 늘리는 일반적인 해결책은 새 발의 피에 불과할 것이다. 피케티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재산에 진보적 성격의 세금을 매기는 것이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미래는정해져 있지 않다. 역사를 통틀어 정치에서는 평등을 향한 행진이 늘 존재했다. 공동 발전의 법칙이 스스로 출현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앞장서서 법을 만들어야 한다. 이러한 법이 없으면 자유 시장 자체가 위험에 빠질 것이다. 피케티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자본주의자에게서 자본주의를 구출해야 한다."

 

1960년대 있었던 일화를 인용하면 이러한 역설을 말끔하게 설명할 수 있다. 헨리 포드의 손자가 노조 지도자 월터 루서에게 새 자동화 공장을 견학시키며 “월터, 이 로봇에게 어떻게 조합비를 받아낼 건가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루서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이렇게 받아쳤다. “헨리, 이 로봇에게 어떻게 자동차를 사게 할 건가요?”

 

 

미래는 이미 도달해 있다.

단지 골고루 분배되어 있지 않을 뿐이다.

- 윌리엄 깁슨(William Gibson, 소설가, 19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