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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데우스: 미래의 역사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 - 뤼트허르 브레흐만

Chapter 1.#1 '유토피아'의 귀환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

유토피아가 없는 세계지도는 잠깐이라도 들여다볼 가치가 없다. 인류가 늘 지향하는 국가를 제외했기 때문이다. 그곳에 발을 디딘 인류는 다시 밖을 보고 더 나은 국가를 찾아 항해를 떠난다. 진보는 유토피아를 깨닫는 과정이다.

-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1900년), 아일랜드 출생의 극작가이자 소설가

 

 

유토피아의 귀환

역사에서 배우는 교훈을 짧게 소개하면서 글을 시작해보려 한다.

 

과거에는 무엇이나 지금보다 열악했다. 세계 역사의 99%를 차지하는 기간 동안 인류의 99%는 가난했고 굶주렸을 뿐 아니라 더러웠다. 두려움에 떨었고, 어리석었고, 질병에 시달렸으며, 못생겼다. 17세기 프랑스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1623~1662년)은 삶을 거대한 눈물의 골짜기로 묘사하면서 “인류는 비참해질 줄 알기 때문에 위대하다”고 썼다. 영국 철학자 토머스 홉스(1588~1679년)는 인간의 삶이 근본적으로 “외롭고 가난하고 추잡하고 잔인하며 짧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지난 200년 동안 모두 변했다. 인류가 지구에 존재해온 기나긴 세월 중 짧은 기간 동안 수십억 인구가 갑자기 부를 쌓고 영양분을 풍부하게 섭취할 뿐 아니라 안전해졌다. 말끔해지고 똑똑해지고 건강해졌으며 외모가 준수해지기까지 했다. 1820년에는 세계 인구의 94%가 극도의 빈곤에 빠져 허덕였지만 1981년에 들어서면서 그 비율은 44%까지 떨어졌고, 수십 년이 지났을 뿐인데도 현재는 1% 미만이다. 이러한 추세가 계속된다면 인간의 삶을 끝없이 지배했던 극도의 빈곤은 조만간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현재 가난하다고 불리는 사람들까지도 역사상 유례없이 풍요로운 생활을 누릴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네덜란드에서 현재 노숙자가 받는 사회복지 보조금은 1950년 평균 네덜란드인의 소비 가능 액수보다 많고, 과거 네덜란드가 칠대양을 통치한 황금기에 살았던 국민의 소비 가능 액수보다 4배나 많다.

 

몇 백 년 동안 시간은 거의 정지해 있었다. 역사책을 메운 사건은 많이 발생했지만 인간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1300년에 살던 이탈리아 농부를 타임머신에 태워 1870년대 토스카나Tuscany 지방에 데려다놓더라도 별반 차이를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잠시 시간을 내서 그래프를 들여다보자. 원은 국가를 나타내고 원이 클수록 인구가 많다. 그래프 하단에는 1800년에 존재한 국가들이 있고, 상단에는 2012년에 존재한 국가들이 있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와 미국처럼 1800년 당시 가장 부유한 국가조차도 기대수명은 2012년 건강 지표상 최저인 시에라리온보다 짧았다. 다시 말해 현재와 비교했을 때 1800년에 존재한 국가는 부와 건강 분야에서 열악했다. 요즈음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조차도 1800년 가장 부유했던 국가들보다 생활형편이 낫다(물론 콩고의 소득은 지난 200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기는 했다). 그래프의 오른쪽 위에 있는 “풍요의 땅”에 도달하는 국가가 훨씬 많아지고 있다. 풍요의 땅은 기대수명이 75세 이상이고 평균 소득이 2만 달러가 넘는 곳이다.

현재 세계 1인당 소득은 1850년의 10배에 이른다. 평균 이탈리아인의 부는 1880년보다 15배 증가했다. 세계 경제는 어떨까? 거의 전 인구가 여전히 가난하고, 굶주리고, 두려움에 떨고, 어리석고, 병들고, 못생겼던 산업혁명 이전보다 250배 성장했다.

 

중세의 유토피아

 

과거는 생활하기에 확실히 가혹한 시대였으므로 사람들은 상황이 개선되는 날이 오기를 꿈꾸며 살았다.

사람들이 가장 선명하게 꿈꿨던 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무릉도원 “코케뉴Cockaigne”였다. 코케뉴에 도달하려면 먼저 5킬로미터나 깔려 있는 쌀 푸딩을 먹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노력할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코케뉴에 도착하면 강에는 포도주가 흐르고, 구운 거위가 공중을 날아다니고, 팬케이크가 나무에서 자라고, 하늘에서는 뜨거운 파이와 빵이 비처럼 내리기 때문이다. 농부나 수공업자, 성직자 할 것 없이 모두 평등하고 근심 걱정이 없다.

 

네덜란드 역사가 헤르만 플레이는 이렇게 썼다.

 

중세인에게 현대 서구 유럽은 진정한 코케뉴에 매우 가깝다. 1년 365일 하루 24시간 내내 패스트푸드를 먹고, 실내 온도를 알맞게 조절할 수 있고, 자유롭게 사랑하고, 굳이 일하지 않아도 돈이 굴러 들어오고, 성형수술을 받아 젊음을 연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세상에는 굶주려 고통 받는 사람보다 비만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이 더 많다. 서구 유럽에서 살인율은 중세보다 평균 40배 낮아졌고, 합당한 여권이 있으면 감동적인 사회 안정망을 보장받는다.

 

 

유토피아의 귀환

 

지금은 거의 잊힌 다른 형태의 유토피아적 사고도 있다. 청사진이 해상도가 높은 사진이라면 이 형태의 유토피아는 흐릿한 윤곽일 뿐이다. 이 유토피아는 해결책이 아닌 길잡이를 제공한다. 사람들에게 정해진 틀에 맞추라고 강요하지 않고 바뀌라고 자극한다. 18세기 프랑스 계몽사상가 볼테르가 말했듯 “완벽한 것은 좋은 것의 적”으로 이해한다. 한 미국 철학자는 “진지한 유토피아적 사상가라면 청사진 개념에 틀림없이 심기가 불편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영국 철학자 토머스 모어는 이러한 맥락에서 유토피아라는 용어를 만들고 그에 관한 책을 썼다. 모어가 주장한 유토피아는 무자비하게 적용되는 청사진이 아니라, 극도로 빈곤하게 생활하는 보통 사람들에게 사치품을 더 많이 바치라고 요구하는 탐욕스러운 귀족을 기소하는 곳이다.

어째서 우리는 1980년대 이후 어느 때보다 부유해졌는데도 점점 더 열심히 일하고 있을까? 어째서 빈곤을 완전히 퇴치하고도 남을 만큼 부유한데도 인구 수백만 명이 여전히 빈곤에 허덕일까? 어째서 개인소득의 60% 이상을 자신이 어쩌다 태어났을뿐인 국가가 좌지우지할까?

 

유토피아는 해결책은 고사하고 미리 재단한 대답을 제공하지도 않지만 옳은 질문을 던진다.

 

대서사의 파괴

 

하지만 대단히 서글프게도 오늘날 좀 더 나은 세상을 바라는 꿈은 제대로 싹도 틔우지 못했다. 진부한 상투적 표현을 빌리자면 꿈은 악몽으로 바뀌기도 한다. 유토피아는 불화와 폭력, 심지어 대량 학살의 온상으로 결국 역逆 유토피아를 뜻하는 디스토피아로 탈바꿈한다. “인간의 진보는 신화다”라는 상투적 표현도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는 중세식 낙원을 그럭저럭 구축해왔다.

 

모든 종교가 광신적 종파를 낳듯 역사를 보더라도 파시즘과 공산주의, 나치즘을 비롯해 끔찍한 형태의 공상적 유토피아주의로 가득하다. 하지만 급진적 종교가 폭력을 선동한다고 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종교를 모두 없애야 할까? 유토피아주의를 제거해야 할까? 더욱 나은 세상이 실현되기를 꿈꾸는 것조차 그만둬야 할까?

 

물론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현상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낙관주의와 비관주의는 소비자의 신뢰와 신뢰 부족과 같은 뜻으로 쓰여 왔다. 다른 세상을 꿈꾸는 급진적 사고는 말 그대로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사회가 달성할 수 있는 성취에 대한 기대가 극적으로 잠식당하면서 결국 유토피아가 없는 기술관료제technocracy라는 차갑고 냉혹한 진실만 남는다. 정치의 임무는 문제 관리 정도로 전락하고 있다. 유권자는 정당이 달라서가 아니라 정당들을 거의 구분할 수 없어서 매번 지지하는 당을 바꾼다. 요즈음은 소득세율 1~2퍼센트 포인트를 놓고 좌파와 우파로 나뉜다.

 

저널리즘도 마찬가지여서 정치를 이상이 아니라 경력에 판돈을 거는 게임으로 묘사한다. 학계도 글을 쓰느라 너무 바빠서 글을 읽지 않고, 글을 발표하느라 너무 바빠서 토론하지 않는다. 사실 21세기 대학은 병원이나 학교나 텔레비전 네트워크와 마찬가지로 공장에 훨씬 가깝다.

 

한편 복지국가는 정책의 초점을 시민이 품은 불만의 원인에서 증상으로 차츰 옮기고 있다. 몸이 아프면 의사를 찾고, 기분이 우울하면 심리치료사를 찾고, 과체중이면 영양사를 찾는다. 유죄를 선고 받으면 교도소에 가고, 일자리를 잃으면 직업코치를 만난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디스토피아의 모습이다.

 

청사진

 

이제 유토피아적 사고로 돌아갈 때다.

우리에게는 새 북극성이 필요하고, 지도에 없는 머나먼 대륙인 유토피아를 포함한 새 세계지도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유토피아 광신자들이 신권정치나 5년 계획 등을 도구처럼 휘두르며 억지로 떠맡기는 엄격한 청사진이 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은 열렬한 꿈에 우리를 종속시킬 뿐이다. 유토피아utopia는 “좋은 장소”와 “없는 장소”를 동시에 가리킨다. 이제 상상력을 자극하는 대안적 관점이 필요하다. 이 관점은 복수이므로 서로 충돌하는 유토피아 개념들은 결국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생명선이다.

 

언제나 그렇듯 우리의 유토피아는 작은 규모로 시작할 것이다. 오늘날 문명의 토대를 쌓은 것은 자신의 드럼 소리에 맞춰 행진한 몽상가들이었다. 스페인 수사 바르톨레메오 데 라스까사스(1484~1566년)는 라틴아메리카의 원주민과 식민주의자가 동등하다고 강조하면서 누구나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는 도시를 건립하려고 시도했다. 공장 소유주인 로버트 오웬(1771~1858년)은 영국 근로자의 해방을 지지하고, 고용인에게 정당한 임금을 지불하고 체벌을 금지시키면서 방적공장을 성공적으로 운영했다.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1806~1873년)은 남녀가 동등하다고까지 믿었다(이러한 믿음은 아내가 그의 작품을 절반 이상 집필한 사실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세대를 내려오는 동안 각성한 몽상가가 없었다면 인류는 여전히 가난하고 굶주리고 더러울 것이고, 두려움에 벌벌 떨고 어리석을 것이며, 질병에 시달리고 추할 것이다. 유토피아가 없다면 우리는 길을 잃고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현재가 엉망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 하지만 더 나은 미래를 구축하겠다는 희망을 품지 않는다면 현재는 황량하다. 영국 철학자버트런드 러셀은 “인간이 스스로 행복하려면 이런저런 즐거움뿐 아니라 희망과 진취적인 기상과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다른 글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가 원해야 하는 것은 완성된 유토피아가 아니라, 상상과 희망이 살아 있고 꿈틀거리는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