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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데우스: 미래의 역사

<조선반역실록> - 박영규

Chapter 3.#3 이방원의 최대 난적, '신덕왕후 강씨'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인 뒤로 역성혁명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리고 1392년 7월 17일, 드디어 이성계는 왕위에 올랐다. 이성계는 조선의 국조가 되었고, 그의 둘째부인 강씨는 조선의 첫 국모가 되어 현비

로 불리게 되었다. 이미 이성계의 첫째부인 한씨는 1391년에 죽었으므로 강씨가 왕비가 되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세자 책봉에서 한씨 소생들은 배제되었다. 이성계는 한씨 소생 아들들인 여섯 형제를 제치

고 강씨 소생인 막내 방석을 세자로 삼았다. 물론 왕비 강씨의 영향력에 의한 것이었다.

 

세자 책봉 과정에서 이성계는 처음에 강씨 소생 중에 첫째인 방번을 세우려 했다. 하지만 신하들은 이렇게 쑥덕거렸다.

 

만약에 강씨가 낳은 아들을 세우려 한다면 막내아들이 조금 낫겠다.

실록은 그 이유를 방번이 광망하고 경솔하여 볼품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성계가 그들 신하들의 뜻을 받아들여 8남 방석을 세자로 세운 것이다.

 

방석을 세자로 세운 때가 1392년 8월 20일이니, 건국일로부터 한 달이 갓 지난 시기였다. 방석이 1382년 태생이니 당시 방석의 나이는 불과 11세였다.

 

세자 책봉에 있어 이성계의 장남 방우가 제1순위가 되었어야 했지만, 당시 이방우는 개성에 있지 않았다. 그는 1388년에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자, 가족들을 이끌고 철원으로 은거하였다. 말하자면 이

성계의 회군을 반역이라 여기고 벼슬을 버린 채 초야에 묻혀버린 것이다. 또한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왕위에 오르자, 고향인 함흥으로 들어가 살았다. 조선 개국 이후 그는 매일같이 술독에 빠져 지내다가 이듬해인 1393년 12월에 마흔 살의 나이에 술병으로 사망했다.

 

장남 이방우가 정치에 뜻이 없고, 아버지의 혁명을 반역으로 보았던 까닭에 이성계는 애초에 그를 세자로 책봉하려는 뜻이 없었다. 그렇다면 둘째인 방과가 세자가 되었어야 했으나 왕비 강씨의 영향력이 컸던

만큼 그녀 소생인 8남 방석이 세자로 책봉된 것이다.

 

이를 두고 훗날 왕자의 난에 성공한 후 이방원은 방석을 세자로 세운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왕비 강씨를 서모라고 칭하고, 방번과 방석을 서자로 칭하게 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고려 말엽엔 중처 제도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는 정식 부인을 둘 이상 둘 수 있는 제도였다. 신덕왕후 강씨는 중처 제도에 따라 정식으로 이성계와 결혼하여 시집온 여자였기에 첩은 아니었다. 따라서 강씨는 이방원의

계모이지 서모는 아니며, 방번과 방석 또한 서자는 아닌 것이었다. 그럼에도 태종은 실록에 강씨를 서모로, 방번과 방석을 서자로 칭하도록 하였다.

 

또한 이방원은 부왕 이성계가 여러 첫째부인의 아들들을 제치고 둘째부인 강씨의 아들을 세자로 삼은 것을 잘못이라 지적하게 되는데, 강씨가 둘째부인이긴 하나 이미 첫째부인 한씨가 사망한 상태였고, 강씨가 조선의 첫 왕비이기 때문에 왕비의 아들이 세자로 책봉되는 것이 예법에 어긋나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세자를 책봉하는 것은 왕의 의지에 의한 것이므로 반드시 장남을 세자로 삼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러므로 이성계가 방석을 세자로 세운 행위는 문제가 될 것이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이방원은 방석의 세자 책봉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아니, 자신이 세자로 책봉되지 못한 것을 불만스러워 했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어떤 이는 만약 이성계가 장남 방우나 차남 방과를 세자로 세웠다면 왕자의 난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당나라 태종은 아버지 이연이 자신의 큰형이 자 장남을 황태자로 책봉한 것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켜 형을 죽이고 아버지의 황위를 빼앗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이방원 또한 당태종 이세민과 같은 행동을 하지 말란 법이 없지 않는가?

 

그만큼 이방원의 야심은 컸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왕위를 차지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비(신덕왕후) 강씨가 버티고 있는 한 쉬운 일은 아니었다. 건국 이후 왕실의 실권을 자치한 인물은 바로 현비 강씨였

다. 그녀 역시 이방원 못지않은 야심만만한 인물이었다.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였다는 사실을 알고 이성계가 무섭게 화를 냈을 때, 이방원을 거들고 나선 사람이 바로 강씨였다. 이성계가 정몽주를 죽인 이방원을 몰아세우자 방원은 강씨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어머니께서는 어찌 변명해주지 않습니까?

그러자 강씨는 방원을 편들며 되려 화난 얼굴로 이성계를 몰아세운다.

공은 항상 대장군으로 자처하시면서 어찌 놀라고 두려워함이 이

같은 지경에 이릅니까?

강씨의 그 한마디에 이성계는 화를 누그러뜨리며 이방원의 계획을 묵인하였다.

 

이렇듯 강씨는 대담한 여자였다. 이성계조차도 그녀의 말이라면 끔뻑 죽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방석을 세자에 책봉한 것 역시 그녀의 의지라고 할 수 있었다. 또한 정도전이나 남은, 조준, 배극렴 등의 개국공신들도 그녀의 눈치를 보아야만 했다.

 

그런 강비가 버티고 있는 한, 이방원은 함부로 야심을 드러낼 수 없었다. 만약 강씨에게 야심이 들키는 날엔 제아무리 천하의 이방원이라고 해도 무사할 수 없을 터였다.

 

조선 개국 당시 신덕왕후 강씨의 나이는 37세였고, 이방원의 나이는 그녀보다 열한 살 어린 26세였다. 강씨가 방원의 큰형 방우보다 두 살 어렸지만 방원은 그녀에게 꼬박꼬박 어머니라고 불렀다. 사실 방원은 소년 시절 이후 개성에서 지냈는데, 그 시절 방원을 보살핀 사람이 바로 강씨였다. 또한 강씨는 방원을 매우 영특하게 여기며 총애했기 때문에 둘의 관계는 매우 돈독한 편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조선 개국 이후 급격히 악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