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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데우스: 미래의 역사

<악마의 증명> - 도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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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악마의 증명> #4.제가 하지 않았습니다.

 

“인정하지 않습니다. 제가 하지 않았습니다.”

 

 

 

 

재판장과 배석판사는 선잠을 깬 듯한 표정을 지었다. 방청객들도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특히 불의의 일격을 맞은 호연정 검사의 표정은 볼만했다. 얼굴이 확 붉어져서는 검사가 끼어들 순서가 아닌데도 끼어들었다.

“피고인, 검찰에서 다 자백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제가 하지 않았습니다.”

재판장은 안경을 추켜올리며 내 국선변호사에게 다시 확인했다.

“피고인은 범행을 부인하는 것입니까?”

“네, 수사기관에서 자백은 했지만 그건 본의 아니게 거짓말 한 것입니다. 피고인의 범행이 아닙니다. 피고인은 당일 사건현장에 가지도 않았습니다. 외출하지 않고 집에서 일찍 잤다고 합니다.”

김기욱 변호사는 확신에 찬 태도로 대답했다. 호연정 검사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한 채 김기욱 변호사를 쏘아보았다. 자백하는 피고인을 변호사가 꼬드겨 범행을 부인하도록 부추겼다고 생각한 듯 했다. 증거가

완벽한데 괜히 시간을 낭비케 하고 피고인인 내 양형에도 오히려 불리하게 되었다는 무언의 나무람이 담겨 있었다. 재판장은 생각지도 못하게 재판이 번거롭게 되었네, 하는 표정을 잠시 지어보였다가 도리 없다는 듯 말했다.

“그렇다면 검찰 측에서 입증계획을 밝혀주시죠”

호연정 검사는 화가 났는지 일사천리로 모든 증거를 공개했다.

“우선 피고인은 경찰과 검찰에서 자신의 범행을 자백했습니다. 범행현장에서 피고인의 얼굴이 찍힌 CCTV 화면, 그리고 피고인의 지문이 묻어있는 칼과 범행당시 입었던 것으로 피해자의 피가 묻어있는 옷을 증거로 제출하겠습니다. 칼과 옷은 모두 피고인의 집에서 압수되었습니다.”

김기욱 변호사는 아무런 이의도 않고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변호인은 증거를 인정하는지 여부를 밝혀주십시오.”

“피고인의 경찰과 검찰에서의 진술을 모두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다른 증거물들은 피고인의 범행과 관련이 없습니다.”

 

 

 

 

경찰과 검찰에서의 내 자백조서가 휴지조각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피고인이 법정에서 부인하면 수사기관에서의 진술은 증거로서의 가치가 없게 된다.

힐끔 보았더니 호연정 검사의 얼굴빛이 다시금 붉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피고인이 자백을 뒤집어봤자 다른 증거들이 워낙에 탄탄하다는 믿음 때문인지 크게 동요하지 않고 있는 듯 했다.

김기욱 변호사는 내친 김에 몰아붙였다.

“피고인 측에서는 피고인의 형 박성을 증인으로 신청하겠습니다.”

“피고인의 형이 관계가 있나요?”

재판장은 의아한 듯 물었다.

“분명히 사건의 진상과 큰 관련이 있습니다. 증인으로 채택해주시면 신문과정에서 모든 것을 밝히겠습니다.”

“좋습니다, 증인 채택하겠습니다. 다음 기일은……”

“재판장님.”

“왜 그러시죠?”

“사실은 피고인의 형인 박성 씨가 지금 법정밖에 와 있습니다. 지금 증인신문을 하도록 허락해주십시오.”

“그건 곤란합니다. 검찰의 반대신문준비가 안 되어 있지 않습니까?

무엇을 위한 증인인지도 불명확한 상태고.”

“피고인은 지금 강도살인죄로 구속되어 구금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 무죄라면 하루라도 빨리 나가야 마땅합니다. 형의 증언은 피고인의 유무죄를 가릴 수 있는 중요한 내용임을 말씀드립니다. 형은 사건 이후 모습을 감추었다가 이제야 법정에 나온 것입니다. 만약 오늘 못한다면 다음에 꼭 증언을 들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검사님만 양해해주시면 되지 않을까요.”

 

 

 

 

김기욱 변호사는 재판장에게서 시선을 돌려 결정을 촉구하듯 호연정 검사를 쳐다보았다. 호연정 검사는 더할 나위 없이 명백한 증거가 있는데도 도대체 피고인이 무슨 뚝심으로 범행을 부인하는지 궁금하던 차에 변호사의 얘기를 듣고는 호기심이 폭발해버린 모양이었다.

“좋습니다. 재판장님. 검찰은 지금 당장 증인을 신문해도 이의가 없습니다.”

소송 전략상 즉석에서 증인신문을 하는 것은 거부함이 마땅하겠건만 검사는 호기심과 더불어 호승심이 발동한 탓인지 쾌히 수락했다. 그만큼 증거에 충분한 자신이 있다는 것이리라.

“그럼 재정증인으로 신문토록 하겠습니다. 증인을 부르세요.”

김기욱 변호사는 법정 뒤에 앉아있던 자신의 직원에게 손짓을 했고, 직원은 내 형 박성을 데리러 법정 뒷문을 나갔다. 잠시 후 법정 뒷문이 빼곡히 열리더니 내 형이 들어왔다.방청객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재판장도 흘깃 내 형을 보더니 얼이 빠져서 내 얼굴을 한번 보고는 다시 내 형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형이 증언대 앞으로 오기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호연정 검사의 표정은 더욱 볼만해졌다. 안 그래도 까무잡잡한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피고인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또 한 명 법정으로 들어오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