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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데우스: 미래의 역사

<악마의 증명> - 도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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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악마의 증명> #3. 피고인은 공소사실을 모두 인정합니까?

길가로 뛰어나가 택시를 잡아탔다. “봉천동이요.”라고 해놓고는 뒷 좌석에 몸을 파묻었다. 극심한 피로가 몰려왔다. 돈 가방을 슬쩍 열어 보았다. 대충 300만 원 정도일 것 같았다. 강도질이야 해볼 만 한 돈이

지만 사람을 죽이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노릴 만한 돈은 아니다. 살인은 애당초 내 계획에 없었던 일이다.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고 예기치 못한 위험을 감수해야 되었기에 기분이 안 좋아졌다.

자정이 넘어 집에 도착했고, 형은 잠들어 있었다. 신문지 뭉치에 싼 과도와 돈 가방을 부엌싱크대 아래 배수관 뒤쪽에 던져 넣고 싱크대 문을 닫았다.

다음날 아침 형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CCTV 카메라에 찍혀 버렸으니 경찰이 곧 나를 체포하러 올 것 같다, 며칠간 피해있으라 하는 말에 형은 놀라면서도 순순히 여행채비를 하고 집을 나갔다. 사람을 찔러가면서까지 얻은 돈을 경찰에 압수당하는 것은 억울했다. 돈 가방은 집을 나서는 형에게 건네주었다.

 

 

 

 

다음날 의정부 부대찌개집 식당주인 50대 여성 김 모 씨가 귀갓길에 식당 앞에서 피살되었다는 보도가 조그맣게 기사로 실린 것을 인터넷 에서 확인했다.

그로부터 사흘 뒤 저녁. 집에 혼자 있을 때 형사 두 명이 찾아왔다. 문을 열어주자, 그들은 내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다. 나는 즉시 연행되었고, 월세집 수색도 진행되었다. 여자를 찌른 칼과 범행당시에 입었던 옷가지가 증거물로 압수되었다.

경찰은 역시 CCTV 화면에 찍힌 내 얼굴을 맨 먼저 확보한 것이었다. 그 화면에서 출력한 사진을 택시회사에 돌리면서 여자가 피살된 시간에 근처에서 택시를 잡아탄 남자를 수배했고, 신고정신이 투철한 그

택시기사가 나를 봉천동 집 앞까지 태워다 준 것을 경찰에 알려 금세 형사가 들이닥쳤던 것이다.

경찰은 CCTV 영상과 함께 범행에 사용된 칼과 옷을 내게 들이밀었다. 나는 자백했다. 생활고에 시달리다 못해 범행을 마음먹었고, 돈 가방만 탈취할 생각이었는데 여자가 도망치면서 경찰에 신고할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찌르고 말았다며 용서를 빌었다. 돈 가방은 강에 버렸고 돈은 다 써버렸다고 했다.

“그냥 찔렀어요, 나도 모르게 정신없이…… 찔러놓고 보니 정신이 들었습니다.”

나는 울먹였다. 칼을 준비해서 가게까지 찾아갔으니 우발적인 살인하고는 격이 다르다. 하지만, 내 성장과정과 생활고에 동정을 했는지 횡설수설인 진술에도 경찰들은 수긍을 하는 눈치였고, 현장 검증할 때의 사건재연도 성의 없이 대충 했지만 무리 없이 마무리 지어졌다. 사건은 곧 검찰로 송치되었다.

서울북부지검으로 송치된 후에도 사건수사는 일사천리였다. 무엇보다 본인이 자백하고 있고, 결정적으로 CCTV 화면에 칼로 찌른 후 카메라를 힐끗 쳐다보는 무표정한 내 얼굴이 뚜렷하게 나와 있다. 해상도

가 높지 않고 조명도 약했지만, 나임을 확인하기에는 충분했다. 내 지문이 검출된 칼과 여자의 피가 묻은 범행당시의 옷도 움직일 수 없는 증거물이었다.

 

 

 

 

강도살인이라는 중대사건 치고는 피의자가 순순히 자백해 수사가 쉽게 진행되자 검사는 내게 우호적으로 대해주었다. 담당검사는 호연정이라는 이름의 서른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였는데, 늘씬한 몸매에 긴

팔다리를 소유한 미인이었다. 눈이 살짝 작긴 했으나 그것도 까무잡잡한 피부와 갸름한 얼굴에 잘 어울렸다. “처음부터 죽일 작정이었던 것 같지는 않네요. 유흥비 때문이 아니라 생활고 때문이었던 동기도 참작될 거고. 사람을 죽여 놓고도 부인하는 뻔뻔한 자들이 대부분인데 처음부터 순순히 자백했다는 점도 있고. 어떻게 보면 당신은 좀 순진한 사람인 것 같네요. 내가 현직 검사입장에서 공식적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구형할 때 참작 해줄게요.”

호연정 검사는 곱상한 외모와 달리 털털하고 시원시원한 성격이었다. 아무리 우발적인 행위라고는 하나 살인을 저지른 나를 동생처럼 토닥거려 주었다.

사건은 검찰 송치 2주일 만에 기소되었다. 국선변호인이 선임되었고, 국선변호사 김기욱이 접견을 위해 구치소로 나를 찾아왔다. 김기욱 변호사는 무테안경을 쓰고 머리를 짧게 정리해 올백으로 넘긴 차가운

인상이었지만 의욕은 있었다. 나는 그에게 짤막하게 몇 가지만을 부탁한 다음 금방 돌려보냈다.

 

그로부터 다시 2주일 후 서울북부지방법원 제101호 법정에서 공판 기일이 열렸다. 큰 법정이었는데도 사건에 대한 관심 때문에 방청석은 가득 차 있었다. 먼저 호연정 검사의 모두冒頭진술이 있었다. 강도살인이라는 사건의 중대성을 감안해서 수사검사인 호연정 검사가 이례적으로 공판도 담당키로 한 모양이었다.

“피고인 박철은 현재 22세의 대학3년생인 자로서, 201X년 11월 4일 오후 10시 40분경 의정부시 T동 63번지 소재 ‘의정부 부대찌개’ 식당 앞에서 일을 마치고 귀가하던 식당주인 53세의 여성인 피해자 김정 자를 칼로 찔러 살해하고 현금 300만 원이 든 돈 가방을 가져가 강취하였습니다.”

호연정 검사는 그녀의 성격처럼 군더더기 없이 간략하게 마무리하였다.

곧이어 재판장의 인부 질문이 있었다.

“피고인은 공소사실을 모두 인정합니까?”

내가 경찰에서부터 쭉 자백을 했고 완벽한 증거가 갖추어져 있는 사건이어서 그런지 법정에는 살인사건에 걸맞은 긴장감은 없었다. 내가 다음의 말을 하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