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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데우스: 미래의 역사

<악마의 증명> - 도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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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악마의 증명> #2.나는 이 순간 당신의 운명을 거머쥔 존재란 말이다!

 

 

부대찌개 식당과 돈 가방과 50대 여자의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택시는 봉천동 내 집에 도착해 있었다. 방 하나, 부엌 하나의 월세집. 이곳이 형과 내가 사는 공간이다. 연립주택의 반 지하여서 월세가 쌌다. 어학에 재능이 있는 형은 일문학과에 진학했다가 휴학하고, 집에서 주로 번역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내고 있다. 둘이서 끊임없이 아르바이트를 해야 겨우 학비와 월세를 감당할 수 있었다.

나는 형 몰래 주방싱크대 서랍에서 날이 잘 선 과도를 골라

신문지에 싸 놓았다. 실제로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신문지에 싼 칼날 끝만 살짝 보여줘도 그 아줌마는 굵은 다리를 후들후들

떨다가 철퍼덕 주저 앉아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어 주리라.

다음날 오후 9시쯤 준비한 과도를 가을용 긴 외투 안에 집어넣고 집을 나섰다. 그 때까지도 형은 번역원고를 배 밑에 깔고 티브이를 보면서 빈둥거리고 있었다. 저러다 라면을 끓여먹고 일찍 잠들겠지. 형의 습성은 내가 잘 안다. 예의 그 식당까지 거슬러 찾아가는 길은 전날보다 멀게 느껴졌다.

 

 

 

 

전철로 도봉산역까지 간 다음 택시를 탔다. 도로가에 덩그러니 있는 식당이라 지표가 없어 택시기사에게 위치를 설명하기 어려웠다. 기억을 더듬어 주먹구구로 설명할 수밖에 없었는데, 근처의 R사거리를 기억해 내고 그 서쪽으로 500미터 쯤 더 가자고 주문한 다음에야 겨우 익숙한 간판을 발견 해낼 수 있었다.

‘의정부 부대찌개’라는 큼직한 글씨가 있고 ‘의정부’와 ‘부대찌개’ 사이로 삐친 듯한 브이자 위에 ‘원조’라고 쓰여 있다. 도착하니 오후 10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식당에는 드문드문 손님이 남아 있었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부근 후미진 곳에서 식당을 주시했다. 식당 손님이 하나 둘 줄어들더니 영업이 끝나고 마침내 종업원들이 나갔다. 그 다음에야 불이 하나 둘 꺼지기 시작했다. 여주인은 직접 문단속을 해야 안심이 되는 모양이었다.

어지간히 종업원을 못 믿는 군. 덕분에 나는 오늘 돈을 벌고 당신은 경을 치는 거다.

10시 40분이 막 넘어설 무렵 드디어 여자가 문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나 손에는 돈 가방을 든 채였다. 전날 밤 여러 차례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 해본 결과로는 식당 문을 잠그고 주차장까지 걸어가기 전의 짧은 시간이 범행기회였다. 그 중에서도 가게 문을 잠그려 문 앞에 서서 잠시 지체하는 순간이 최적의 순간이다. 눈치 채지 못하게 옆으로 조용히 다가갔다.

“조용히 해.”

나지막한 내 말에 여자가 돌아보았다. 넙데데하고 기가 세 보이는 얼굴이었고, 체격 또한 건장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였다. 온갖 궂은 일로 억척스러워진 50대 여자의 몸매. 힘만으로 따진다면 연일 라면으로 골아있는 나를 훨씬 웃돌아 보였다. 여자는 일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예상대로 일이 진행된 건 딱 여기까지였다. 공포에 질려 다리를 후들거릴 줄 알았던 여자는 다음 순간 확 불쾌한 표정을 지었는데 겁에

질린 얼굴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약간 기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방만 내놔. 그럼 안 다쳐.”

그 말에 여자는 얼굴을 험악하게 찌푸렸다. 미간에 깊은 주름이 지고 눈초리가 올라간 그 얼굴은 분명 몹시 성난 표정이었다. 난 움찔해 버렸다. 그것이 실수였다. 원래 나약한 인상의 내 얼굴은 위협에 적합하지 못하다. 그런데다가 겁에 질려 벌벌 떨 줄 알았던 여자의 예상치 못한 사나운 반응에 나도 모르게 움츠러든 것이 잘못이었다. 칼을 먼저 보여주었어야 했는데, 칼은 신문지에 싼 채 허리춤에 늘어뜨리고 있어서 여자가 제대로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제일 큰 패착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여자의 눈에는 내가 애송이로 보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어린 노무 자식이!” 여자는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나무 등걸 같은 팔뚝으로 나를 확 밀쳤다. 내 몸은 종잇장이 펄럭이듯 휘청하며 뒤로 한 발자국 밀려났다. 여자는 벌레를 보는 듯한 눈길을 쏘아 보내고는 주차장 쪽으로 뛰어갔다. 뛰면서 가방 안에 손을 집어넣었는데 휴대폰을 꺼내들려는 모양이었다. 경찰에 신고를? 다급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화가 울컥 치밀었다.

나는 여자를 따라잡았다. 뛰어가는 여자의 옆구리에 신문지에 싼 칼끝을 찔러 넣었다. 여자는 흡 하는 신음소리를 허공에 남기고 조금 전의 씩씩함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맥없이 쓰러졌다. 그 모습에 왠지 한 번 더 울컥했다.

이제는 다리가 좀 후들거리는 모양이지? 이왕이면 좀 더 빨리 자빠졌으면 어때? 아줌마까지 날 장기판의 졸로 취급했어? 나는 이 순간 당신의 운명을 거머쥔 존재란 말이다!

 

 

 

 

일을 저질러버렸다는 느낌보다는 분풀이를 했다는 후련한 생각이 앞섰다.

옷을 살폈다. 다행히 피가 적게 튀었다. 튄 피도 대부분 칼을 싼 신문 지에 묻었다. 불현듯 누군가 나를 내려다보는 느낌이 얼핏 들었다. 고개를 들어올려다보았다. 이런! 주차장 입구 위쪽에 CCTV가 설치되어 있었다.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CCTV 카메라 렌즈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낭패였다. 첫날에 주변을 꼼꼼하게 살피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식은땀이 솟았지만 난 그 와중에도 목표물을 잊지 않았다. 여자가 떨어뜨린 돈 가방을 주워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도로에는 차가 드문드문 있었지만 어차피 달리면서 길 안쪽 사각지대인 이 쪽을 본 사람이 있을 리 없다. 제길, 그놈의 CCTV 카메라만 아니었다면. 나는 준비해 온 여분의 신문지에 과도를 싸서 외투 안주머니에 넣고 자리를 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