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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데우스: 미래의 역사

<헌법의 주어는 무엇인가> - 이국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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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2 헌법의 '상대방' 찾기

연재 #2

 

헌법의 주어를 찾았으니

두 문장의 상대방을 찾아야 한다.

헌법의 주어를 찾았으니, 이제 수화자, 즉 이 두 문장의 상대방을 찾아야 한다.

 

대한민국 헌법에 의하여 정부가 수립되던 1948년 8월 15일에는 옛 조선총독부 건물 앞에서 벌어진 국민축하식에 실제로 이 두 문장의 상대방으로 부를만한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주한 미군정의 최고책임자였던 존 하지 미합중국 육군 중장도 있었고, 5월 10일 제헌의회 선거과정을 관리했던 UN한국위원단의 대표들도 있었다. 이들 중에 예를 들어 하지 장군에게 말한다고 생각하고 이 두 문장을 다시 한 번 읽어 보자. 자주와 독립의 의기가 물씬 풍겨 날 것이다.

 

“우리 대한국민이

주한 미군정의 최고책임자인

미합중국 육군 중장 존 하지에게 말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우리 대한국민이 존 하지에게 다시 말한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우리 대한)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우리 대한)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상상력을 더 발휘하여, 헌법 1조의 상대방을 여러 방면으로 넓혀 보자. 조선 총독이나 일본 왕을 상대방으로 두면 어떻게 될까? 헌법 1조는 제국주의를 극복한 승리의 선언이 될 것이다. 아직 해방을 맛보지 못한 다른 식민지 백성들을 상대방으로 두면 어떻게 될까? 헌법 1조는 피식민의 서러움을 공감하면서 하루바삐 독립할 것을 격려하는 위로의 메시지가 될 것이다. 헌법 전문에 등장하는 3‧1운동이 고종황제의 인산 일에 시작된 것을 생각하여, 이 두 문장을 고종 황제에게 말한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헌법 1조는 왕조 국가의 전통을 끊고 자유와 평등을 새로운 국가의 기초로 삼는 시민 혁명의 권리선언이 될 것이다.

 

더 많은 상대방을 상정하여 그 앞에서 읽으면 읽을수록 헌법 1조의 의미와 내용은 더욱 풍부해진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상대방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그것은 바로 헌법 1조를 함께 선언하는 동료 대한국민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헌법의 주어이자 저자인 우리 대한국민이 동료 대한국민을 앞에 두고 그에게 말하는 방식으로, 그와 함께 말하는 방식으로 선포된다. 비유컨대 대한민국 헌법은 우리 대한국민이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함께 부르는 합창과도 같다.

 

이 점을 더 깊이 느끼기 위하여 간단한 역사적 상상을 시도해 보자. 1948년 7월 17일 헌법공포식에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제헌국회의장으로서 단상 위에 있었다. 만약 그때 이승만 박사가 다음과 같은 발언으로 헌법공포식을 시작했다면 어땠을까?

 

“나는 왕가의 자손으로서,

조선 왕조의 지배층이었으며,

젊은 시절부터 평생 동안 독립운동에 헌신해 온 사람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중에는 나를

국부로 부르는 사람들마저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내 생각에, 그와 같은 자격,

그와 같은 특권을 가진 채로 우리가

이 헌법을 통해 만드는 대한민국을 시작해서는

안 될 줄 압니다.

 

대한민국은 오로지

우리 대한국민의 자유와 평등을 전제로만

출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 여러 시민들 앞에서 선언하고자 합니다. 나는 이제 내가 가진 모든 기득권을 포기합니다.

그 대신 나는 지금 이 순간부터 대한국민

그 누구와도 동등한 한 사람의 시민임을

명예롭게 받아들입니다.

 

여러분과 동등한 시민이라는

단 한 가지 명예로운 사실에만 근거하여 나는 이제 말합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입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우리 대한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우리 대한국민으로부터 나옵니다.”

 

이승만 (1945년)

 

만약 모두가 국부라고 받드는 어르신이 실제로 이렇게 시민선언을 했다면, 그 뒤로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제헌 국회의원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차례로 단상에 나아가 감격적인 시민선언을 이어가지 않았을까?

그리고 만약 그 광경이 녹화되어 남아 있다면, 지금도 우리 각각은 차례로 단상에 나아가 시민선언을 이어가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게 되지 않을까? 물론 이러한 광경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역사적 상상일 뿐이다. 하지만 헌법 1조의 두 문장은 그와 같은 역사적 상상을 충분히 자극하고도 남을만한 정치적 에너지를 함축하고 있다. 이것이 헌법 1조의 힘이다.

 

이미지 출처; jtbc 차이나는 클라스 방영분 캡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