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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데우스: 미래의 역사

<호모 데우스> - 유발 하라리

Chapter 7.#7. 허용되지 않는 자유의지

오늘날 세계는 개인주의, 인권, 민주주의, 자유시장이라는 자유주의 패키지가 지배하고 있다.

하지만 21세기 과학이 이 자유주의 질서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 과학은 가치의 문제를 다루지 않으므로, 자유주의자들이 평등보다 자유에 더 가치를 두고 집단보다 개인에 더 가치를 두는 것이 옳은지 판단할 수 없다. 그렇지만 다른 모든 종교처럼 자유주의도 추상적인 윤리적 판단만이 아니라 사실적 진술을 기반으로 하는데, 이런 사실적 진술들은 엄밀한 과학적 검증을 통과하지 못한다.

 

인간은 자신의 욕망에 따라 행동한다. 우리가 ‘자유의지’를 욕망에 따라 행동하는 능력이라는 뜻으로 정의한다면, 맞는 말이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고, 침팬지와 개, 앵무새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질문은 앵무새와 사람이 내면의 욕망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느냐가 아니다. 중요한 질문은 그들이 애초에 자신의 욕망을 선택할 수 있느냐이다. 왜 앵무새는 오이가 아니라 크래커를 먹고 싶어할까? 왜 나는 짜증나는 이웃에게 다른 쪽 뺨을 내어주는 대신 그를 죽이기로 결정할까? 왜 나는 검은색 자동차가 아니라 빨간색 자동차를 사고 싶어할까? 이 소망들 가운데 그 어떤 것도 내 선택이 아니다. 내가 특정한 소망을 느끼는 것은 내 뇌에서 일어나는 생화학적 과정들이 그런 느낌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들은 결정론적이거나 무작위적일 뿐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저 가설이나 철학적 추론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뇌영상을 이용해 사람의 욕망과 결정을 본인이 미처 의식하기도 전에 예측할 수 있다. 어떤 실험에서 사람들을 거대한 뇌 스캐너에 넣고, 양손에 스위치를 하나씩 쥐게 했다. 그리고 내킬 때마다 두 스위치 중 하나를 누르라고 했다. 피실험자가 실제로 행동을 하기도 전에, 심지어 자신의 의향을 자각하기도 전에 과학자들은 피실험자의 뇌신경 활성을 보고 어떤 스위치를 누를지 예측할 수 있었다. 피실험자가 자신의 선택을 인지하기 영 점 몇 초 내지 몇 초 전에 피실험자의 결정을 알려주는 뇌신경 활성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오른쪽 스위치나 왼쪽 스위치를 누르는 결정은 피실험자의 선택을 반영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이 아니다. 사실 우리가 자유의지의 존재를 믿는 것은 잘못된 논리 때문일 것이다. 어떤 생화학적 연쇄반응이 오른쪽 스위치를 누르고 싶게 만들 때 나는 실제로 오른쪽 버튼을 누르고 싶다고 느낀다. 여기까지는 사실이다. 나는 정말로 그 버튼을 누르고 싶다. 하지만 사람들은 ‘내가 그 스위치를 누르고 싶다면 그 소망은 내 선택’이라는 결론으로 논리적 비약을 감행한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나는 내 욕망을 선택하지 않는다. 단지 그 욕망을 느끼고 그것에 따라 행동할 뿐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계속해서 자유의지에 대해 논쟁을 벌이는 것은 과학자들 중에서조차 낡은 신학적 개념들을 계속 사용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유대교 학자들은 수백 년 동안 영혼과 의지의 관계에 대해 논쟁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이 영혼이라 불리는 내적 본질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이 진정한 ‘나’라고 추정했다. 또한 그들은 내 자아가 옷, 자동차, 집을 소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욕망을 소유한다고 주장했다.

 

선한 욕망을 선택하면 천국에 가고, 악한 욕망을 선택하면 지옥에 간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나는 정확히 어떻게 내 욕망을 선택하는가?

예컨대 왜 이브는 뱀의 말을 들은 뒤 금지된 과일을 먹고 싶은 욕망이 생겼을까? 그 욕망이 이브에게 강요된 걸까? 이브의 마음속에 우연히 떠오른 걸까? 아니면 이브가 그 욕망을 ‘자유의지’로 선택했을까? 만일 이브가 그 욕망을 자유의지로 선택하지 않았다면 왜 그 행동에 대해 이브를 벌할까?

 

 

 

 

하지만 영혼은 존재하지 않고 인간에게는 ‘자아’라고 불리는 내적 본질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자아가 어떻게 욕망을 선택하는가”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것은 미혼 남성에게 “당신의 아내는 어떻게 옷을 고르는가?”라고 묻는 것과 같다.

현실에는 의식의 흐름만 존재하고, 욕망은 그 흐름 안에서 생겨났다가 사라질 뿐이다. 욕망을 소유하는 불멸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내가 내 욕망을 결정론적으로 선택하는지, 무작위로 선택하는지, 자유의지로 선택하는지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세 번째 천년의 초입에 자유주의가 직면한 위협은 ‘자유의지를 지닌 개인 따위는 없다’는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 기술들이다. 머지않아 우리는 개인의 자유의지를 전혀 허용하지 않는 엄청나게 유용한 장치들, 도구들, 구조들의 홍수에 직면할 것이다. 민주주의, 자유시장, 인권이 과연 이 홍수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