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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데우스: 미래의 역사

장욱진, 나는 심플하다 - 최종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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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화가 장욱진 선생 탄생 100주년(3) 그 정신적인 것, 깨달음에로의 길 #1

 

그 정신적인 것, 깨달음에로의 길

 

20여 년 전의 일이었다. 오래간만에 몇몇 친구들이 장 선생을 모시고 혜화동 로터리에서 회동키로 되어 있었다. 나서다 보니 너무 시간이 일러서 나는 선생 댁으로 먼저 들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묘하게도 살림살이 문제가 얘기되었다. 무심코 월급의 높낮음에 대한 말을 한 것 같다. 그럭저럭 시간이 되어 술상 앞에 여럿이 앉게 되었다. 한 잔을 드시더니

 

비교하지 말라!

 

하고 벽력같이 소리치는 것이었다. 그리고 계속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무슨 영문인지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 혼자만이 그 말의 뜻을 알고 있었다. 장장 서너 시간을 계속하였는데, 그러는 가운데 모두가 대취하고 말았다.

 

물론 장욱진 선생은 그런 스타일로 말씀하시지 않는다. 선문답하듯이 단편적인 외마디소리뿐이었지만 그것을 지금 풀어보자면 위와 같은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비교하지 말라. 그는 비교라는 말조차 싫어했다. 그것은 그의 그림을 생각해보면 금방 이해할 수가 있다. 그는 일찍이 서구의 미술사조에서 이탈하였다. 아마도 장 선생은 그 무렵 대단한 결심을 하였을 것이다. 언제부터 그렇게 하셨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동경 시절에 학교에서는 학교 그림을 그리고 하숙집에 와서는 자기 생각을 그렸다고 하였다. 남북전쟁의 끝 무렵 <독>이란 그림이 있었는데 40년대 말쯤 이미 소위 장욱진의 그림이 탄생한 것이다. 그런 선각자였으니 오죽이나 많은 고뇌를 하였으랴.

 

 

〈독〉, 캔버스에 유채, 45×37.5cm, 1949

 

내가 미술대학 재학 시 어느 여름방학 때가 아니었던가 싶은데, 선생이 반도 화랑에서 개인전을 하고 있었다. 시골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에 와서 전시장엘 들렀더니 마침 계셔서 만날 수가 있었다. 보자마자 나가자는 것이었다. 골목집 대폿집으로 갔다. 일본 사람이 자꾸 졸라서 한 장 팔았는데 한잔하자는 것이었다.

 

내가 장욱진 선생을 만날 때는 술상 없는 날이 드물었다. 혜화동 시절에는 으레 ‘공주집’으로 달려간다. 그냥 뵙고 싶어서 발길이 가는 것이지만 나는 항상 무슨 말씀을 듣고자 하는 자세로 있었다. 선생도 그렇고 또 나도 그런데 인사라는 게 없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선생이 한창 매직 그림을 그릴 때였다. 한 뭉치를 그려놓고 보라 하시면서 한 장 가지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동학사엘 몇 번 갔었는데 갈 때마다 비가 온다, 그런 이야기였다. 나는 그때 어찌나 우스웠던지 체면 불고하고 배를 쥐고 웃었다. 구름이 몰리다 보면 비가되는데, 용은 구름을 몰고 다닌다는 말이 있다. 그러니 자기가 용과 같다는 말씀이 아닌가. 장욱진 선생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어디까지가 농담이고 어디까지가 진담인지 알 수가 없다.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나를 염두에 두고 하는 것인지도 분간하기가 어렵다.

 

자기 독백인지 나를 혼내는 것인지 종잡기가 어려운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부분 자기 독백이었을 것

같다. 자기 얘기를 하기에도 창창한 것인데 어찌 남의 얘기까지 생각해서 하랴. 장욱진 선생은 남의 얘기 하는 법이 별로 없다. 그는 사무적인 얘기를 싫어하였다. 체질적으로 어울리지 않았다. 부득이 필요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얼른 끝내고 먼지 털듯이 이내 황당무계한 세계로 도망친다.

 

 

〈밤의 새〉, 캔버스에 유채, 41×32cm, 1961

 

 

전원이 그리워 선생은 항상 밖으로 뛰쳐나갔다. 도시가 시끄러워서 견디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덕소로 갔다가 거기가 번화해지니까 돌아오고 수안보 깊은 마을로 갔다가 또 돌아왔다. 그리고 이제는 신갈 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19세기의 프랑스였더라면 고갱처럼 타이티로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장욱진 선생은 숙명적으로 한국을 떠날 수 없는 조건을 지니고 있다. 한국의 문제를 떠나서 선생의 세계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한국의 과거 그리고 한국의 자연이 그의 고향인 것이다. 돼지, 강아지 그리고 까치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충청도 내판의 풍경들일 것이다. 그는 아마도 개량종 짐승들을 그리지 못할 것이다. 그가 만약에 셰퍼드를 그린다면, 그가 만약에 잉꼬를 그린다면…… 그것은 아마 상상도 못할 일일 것이다. 그는 참새를 그린다. 참새는 우리 조상 대대로 민중의 삶 속에서 같이 놀던 짐승이다.

 

덕소 시절에는 강이 그림 속으로 많이 들어왔다. 강이 있고 뒤에 산이 있고 하늘에는 새가 자주 날았다. 한번은 매직으로된 그림이었는데, 하얀 하늘에 네 마리의 새가 줄지어 서편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나는 장난삼아 “선생님 저게 무슨 새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참새지.” 하였다.

그래서 내가 말을 받아서 “참새는 그렇게 날지 않던데요.”라고 하였더니

선생은 “내가 시켰지.” 하였다.

 

내가 시켰지! 하는 그 말씀이 두고두고 잊히지가 않는다. 내 그림 속에서는 무엇이든지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브란쿠시의 유명한 절구가 생각난다. “제왕처럼 명령하고 노예처럼 일한다.” 내 화면 속에서는 무엇이든지 명령하는 대로 따라야 한다. 한 치의 오차도 있을 수 없다. 내 화폭 속에서는 내가 제왕인 것이다.

 

어쩐 일일까. 그는 꽃을 그리지 않는다. 그는 잎이 무성한 여름나무를 그린다. 박수근은 이른 봄 몽우리 지는 과수원의 꽃을 그렸다. 늦은 가을, 추운 겨울의 잎이 다 떨어진 나무를 그렸다. 같은 시대를 함께 살았으면서도 장욱진 선생은 봄 풍경이 없고 가을, 겨울 풍경이 없다. 여름 풍경뿐이다. 무더운 여름, 그 나뭇 잎들 속에서 새들이 놀고 원두막 안에는 웃통을 벗어젖힌 촌부가 앉아 있다. 생명이 활활 타오르는 찬란한 여름, 그리고 여름밤의 풍경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