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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데우스: 미래의 역사

장욱진, 나는 심플하다 - 최종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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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화가 장욱진 선생 탄생 100주년(2) 장욱진, 그의 삶 뒷면 "나는 심플하다"

 

나는 심플하다.

 

이 말은 장욱진이 한때 술만 취하면 얘기했던 말입니다. 이런 말은 보통 사람의 경우에는 쑥스러워 입에 담기조차 어려운 것입니다. 이는 그가 술이 취했을 때 분위기를 보고 나올 수 있었던 말이었는데, 그것도 흉허물 없는 제자들과 있을 때만 그랬습니다. 그러니 농담만은 아니었습니다.

 

1970년을 전후로 여러 해 동안 그랬었는데 나이로 봐서도 50대이고, 분명히 진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워낙 간단한 단어이고 상징적이어서 모두 웃고 흘려버렸지 아무도 그 뜻을 묻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무슨 뜻이냐고 누군가 물었다면 그때는 정말 유치스러운 분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한 것이 10년 세월 동안의 일이었으나 나도 물론 그랬거니와 아무도 그 ‘심플’이라는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는 보통의 말이 아닌 것으로 남아 있습니다. 선생이 타계하시고 난 후 연기군 선영 언덕에 탑비를 만들어 세웠는데 그 비문 역시 “나는 심플하다.”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나는 깨끗하다. 나는 죄가 없노라!”라는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는 지금 깨끗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 나는 지금 죄의 침투를 물리치기 위해서 싸우고 있다.”는 그런 절규와 선언으로 들렸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기고 있다!”라는 심정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이것은 “나는 깨끗하노라.” 하는 선언적인 의미가 아니라 “나는 싸우고 있다.”는 그런 자기 확인과 승리감의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기쁨일 수도 있겠습니다.

 

덕소 생활을 철수했던 시기였는지 혜화동에서 주로 만났던 때의 일입니다. 한 번은 댁을 찾아갔는데 선생은 상당히 술에 취해 있었습니다. 다짜고짜 하시는 말씀이 “나는 심플하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장난이나 농담이 아니었습니다. 우습기도 했지만 한편 엄숙하기도 했습니다.

 

그 무렵 그는 그림을 여기저기 걸어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지 집 안에 그림이 한 점도 눈에 띄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떤 변화가 생긴 것입니다. 그즈음부터라고 생각되는데 그는 ‘심플하다’라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화가가 집에 그림을 거는 뜻은 우선 새로 그린 것을 내가 보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내 공부이고 내가 즐기기 위해서이며, 또한 거기에는 손님이 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그림들이 집 안에서 자취를 감춘 것입니다. 그와 때를 같이해서 심플이라는 말도 자취를 감춘 것입니다. “그림이란 그리면 그것으로 끝이다. 과거를 돌아볼 필요가 없다. 현재만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순수 현재를 살기 위해서 과거를 차단한다.”라는 뜻으로 나는 생각했습니다.

 

그 뒤로 수안보에 계셨던 시절이나 용인 시절에도 방 안에 그림을 걸어놓는 일이 없었습니다. 나는 그때 ‘지금 이분은 상당한 경지에 들어가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장 선생은 일생에 걸쳐서 그림 그리는 일 이외에는 아마도 다른 어떤 것에도 손댄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남은 시간은 주로 소일하는 것이었습니다.

 

전에 미술대학교수 생활을 몇 해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월급은 한 달 대폿값 정도였던 시절이었습니다. 결국 부인이 살림을 떠맡았습니다. 그 당시 누가 그림 한 장 산다는 것은 말도 들을 수 없었던 시절이었습니다. 합판으로 집을 짓고 겨울을 나는데, 아이들은 고만고만한데, 그는 술만 마셔 매일같이 학생들 이 떠메다가 방에 눕혀놓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체력이 장사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만큼 견딜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돈이 되는 일에는 손을 댄 적이 없습니다. 아마도 의식적으로 기피한 것 같습니다. 당시 유행이었던 기록화를 그에게 그리라니까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런 그림은 성미에도 맞지 않는 게 사실이기는 했지만 계약서 쓰고 계산하는 그런 것이 생리적으로 맞지 않는 것입니다. 전생에 돈과 무슨 특연이 있었던지 돈과는 상관을 안 했습니다. 돈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생활하고 있는 것—위신 세우는 일, 권세 좇는 일—에는 10리 밖에서 도망치는 것입니다.

 

장욱진 선생의 생활을 회상해보면 꼭 ‘괴짜 중’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가 적은 어떤 글 속에 “머리만 깎으면 중이지…….”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걱정하지 말라."라는 성서 말씀을 죽기까지 실천한 사람 같습니다. 그는 이른바 제도권 생활을 완전히 포기한 사람입니다. 넥타이 매는 것조차 참지 못했습니다. 흥정과 작당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가 자유인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보면 결백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는 깨끗하다!

 

그는 싸워서 결국 이겼습니다. 그림을 집 안에다 걸어놓지 않을 때 그는 자기 그림으로부터의 해방, 지난 것들로부터의 자유……, 그런 뜻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것은 순수한 ‘오늘’의 탐구일 수도 있습니다.

 

 

〈진진묘〉, 캔버스에 유채, 33×24cm, 1970

 

 

장욱진 선생은 어려서 불가에 연이 닿은 터라서 그런지 별난 데가 많았습니다. 몸에 붙는 것을 신경질적으로 거부했습니다. 묻었다 하면 털어내는 것입니다. 아끼는 파이프 담뱃대를 들고 있다가 갑자기 내게 주어서 두 개를 얻은 적이 있습니다. 소유에 대한 거부 반응이었을 것입니다. 비움 또는 보시 행위일 수도 있습니다. 그는 탐욕과의 싸움에서 상당히 이기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떤 수필에서 “나는 술 먹은 죄밖에 없다.”라고 써놓은 것이 있습니다. 그는 욕심 많은 사람을 경멸했습니다.

 

그 옛날 혜화동에서 화실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이 양반 대취해서 올라가 일갈을 했는데 “아이들을 몇이나 꼬솼나?”라고 하여 두고두고 화제가 된 일이 있었습니다. ‘꼬솼다’라는 말은 ‘유혹한다’는 뜻의 사투리입니다.

 

그는 무소유자고 자유인입니다. 서울이 시끄럽다고 그는 늘 시골로만 다녔습니다. 덕소도 그렇고 수안보도 그렇고 시끄러운 서울을 피해서 간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지막에는 신갈로 간 것입니다. 더 사셨더라면 또 피난을 갔을 것입니다. 외부 세계와의 연결 고리를 모두 차단하고 고요한 곳을 찾아 오지로만 다녔습니다. 더 고요한 시간을 찾아 그림은 새벽에만 그렸습니다. 말하자면 빈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싸웠고, 거기서 얻은 그 정제된 빈 시간이 그가 진정으로 사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외유의 시간입니다. 그것은 술의 시간이기도 하였습니다. 장 선생의 전 생활이 그랬다고 할 만큼 그의 삶은 간단하고 일목요연했습니다.

 

 

〈해·달·산·아이〉, 캔버스에 유채, 45×26cm, 1962

 

 

장욱진 선생의 그림은 우리가 사는 평범한 모습 그것입니다. 해가 있고 달이 있고 아이들과 강아지가 놀고 산이 있고 하늘에는 새가 날고 하는 것들입니다. 이른바 진취적이라는 친구들이 모두 추상화 쪽으로 가고, 그것이 세상 물결이었지만, 그는 완강히 고집하여 애초에 먹은 마음 그대로 전 생애를 관철하였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눈물 나는 싸움이었을 것입니다. 큰 강물 한가운데서 물살을 흘려보내고 그 자리에 혼자 서 있는 것입니다.

 

_최종태, <장욱진, 나는 심플하다> 화가 장욱진, 그 삶의 뒷면 중에서

 

 

〈동물 가족〉, 회벽에 유채, 209×130cm, 1964

 

※ 이 포스트에 실린 장욱진 그림의 저작권은 장욱진미술문화재단에 있으며, 재단의 게재 허락을 받아 사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