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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데우스: 미래의 역사

국제법학자, 그 사람 백충현 - 이충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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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최초 공개] '독도 고유 영토론'에 결정적 타격을 주는 확실한 증거 <관판실측일본지도>

드디어 나타난 <관판실측일본지도>

 

이노우 다다타가가 도쿄 남쪽 1,000킬로미터 떨어진 오가사와라제도까지 가서 실측한 <관판실측일본지도> 일본 본토에서 25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독도가 표기되지 않았다는 것은, 일본이 주장하는 ‘고유 영토론’에 결정적

타격을 줄 수 있는 확실한 증거였다.

 

일본 정부에서 공개를 꺼리고, 메이지대학교에서도 촬영을 못하게 하는 <관판실측일본지도>는 이제까지 알려진 그 어떤 지도보다 그 가치가 높았다.

 

백 교수님,

이 지도가 바로 백 교수님께서 찾으시던 <관판실측일본지도>입니다. 이노우 다다타가 선생이 17년간 전국을 다니며 실측한 일본 최고의 관찬 지도입니다. 일본 정부에서는 이 지도를 한국인이 소장하는 걸 원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서점을 처음 시작하신 아버님으로부터 귀한 지도는 그 가치를 알고 꼭 필요로 하는 분에게 가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백 교수님께 먼저 연락을 드린 겁니다.

 

 

일본 고서점에서 자료를 찾는 백충현 교수의 모습(제일 아래쪽)

 

 

일본은 1996년 10월 20일에 치러진 일본 중의원 선거에서 하시모토 총리가 이끄는 자민당이 승리했다. 이틀 후인 10월 22일에는 일본 외무성 대변인이 정례 기자회견에서 “독도는 일본 영토”라고 주장했다. 자민당은 ‘독도 영유권 주장’을 총선 공약으로 내걸었다. 당시 우리 정부는 외무부 대변인 논평을 통해 “자민당이 전례 없이 독도 문제를 선거 공약으로 천명한 것은 공당으로서 무책임한 태도이며 우리 정부는 절대 용납지 않을 것”이라며 강경하게 대응할 방침임을 밝혔다. 시민 단체와 종교 단체에서도 규탄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자민당 정권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11월 1일, 일본은 독도에서의 부두 공사에 유감을 표하며 즉각 중단해달라는 의사를 우리 정부에 전달했다. 독도 영유권 문제는 다시 양국의 ‘현안 문제’가 되었다.

 

백 교수는 점점 극우 보수화의 길로 치달으며 계속 영유권 분쟁을 일으키는 일본의 행태가 안타까웠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양국 간의 진정한 우호 관계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 아니던가. 그러나 영토 분쟁은 어느 한 나라가 포기하지 않는 한 끝나지 않는 싸움이었다. 포기하지는 않겠지만 독도가 일본의 영토가 될 수 없다는 명백한 증거가 많아지면 일본도 힘이 빠지면서 잠잠해질 것이다.

 

1997년 4월의 주말, 백충현 교수는 도쿄 간다 지역 고지도 서점을 방문했다. 서점을 샅샅이 뒤질 각오로 편한 복장인 청바지를 입고, 제자 2명도 함께 갔다.

 

일본은 17세기부터 네덜란드와 교역을 시작하면서 나가사키항을 개방했다. 네덜란드인 거류를 위해 이 지역에 ‘데지마’라는 인공 섬도 만들었다. 데지마를 통해 측량술, 조선술 등 다양한 서양의 학문이 일본에 전해졌다. 서구의 측량술을 배운 일본은 18세기에 이르러 에도 막부 관찬 지도인 <형보일본도>, 사찬 지도인 나가쿠보 세키스이의 <신각일본여지노정도>, <개정일본여지노정전도>와 하야시 시헤이의 <삼국통람여지노정전도>, <대삼국지도> 등을 발간했다.

 

백 교수가 간다 서점가를 찾아온 것은 <관판실측일본지도>를 찾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동안 어느 서점에서도 연락은 없었다. 어쩌면 한국인에게는 팔지 않겠다는 고서점 주인들의 묵계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백 교수는 포기하지 않고 제자들과 서럼 경상도 남쪽은 표기되어 있지만 그 오른쪽에 울릉도와 독도는 없었다. 일본 서북쪽에 오키섬은 표기되어 있었다. 백 교수는 꼼꼼하게 지도에 표기된 섬을 살폈다. 그러나 <관판실측일본지도>에 있던 일본 남쪽의 오가사와라제도는 없었다. 일본에서 일본 전역을 다 담은 지도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는 지도였다. 그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참고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어 값을 물어 보았다. 우리나라 돈으로 2, 000만 원이라고 했다. 백 교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지도가 2,000만 원이라면 네 권으로 된 <관판실측일본지도>가 나타나면 값을 얼마를 달라고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물론 그 기회가 올지 안 올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국제법적 증거 가치가 낮은 <대일본연해여지전도>는 구입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백 교수는 주인에게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그렇게 해야 <관판실측일본지도>가 나타났을 때 연락을 해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대일본연해여지전도>의 모습

 

<대일본연해여지전도> 중 조선 부분

 

 

8월 중순, 일본 도쿄에 있는 고지도 전문점 충경당의 주인 이마이 데츠오씨로부터 국제전화가 왔다.

백 교수는 벌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다음 날 아침 비행기로 출발하겠다고 했다.

데츠오 사장은 백 교수와 악수를 한 후 이층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로 안내했다. 그리고 사무실 안쪽 방에서 네 권으로 된 푸른색 표지의 <관판실측일본지도>를 들고 나왔다.

 

백 교수님,

이 지도가 바로 백 교수님께서 찾으시던 <관판실측일본지도>입니다.

이노우 다다타가 선생이 17년간 전국을 다니며 실측한 일본 최고의 관찬 지도입니다. 일본 정부에서는 이 지도를 한국인이 소장하는 걸 원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서점을 처음 시작하신 아버님으로부터 귀한 지도는 그 가치를 알고 꼭 필요로 하는 분에게 가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백 교수님께 먼저 연락을 드린 겁니다.

 

 

데츠오 사장님, 저에게 먼저 기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럼 자세히 볼 수 있을까요?

 

“예, 백 교수님. 시간을 갖고 편안히 살펴보십시오.”

 

백 교수는 벅차오르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지도를 한 권 한 권 펼쳤다. 메이지대학교 박물관에서 보았던 판본과 같은 지도였다.

 

경상도 지방의 산 이름도 표기되어 있었지만 그 오른쪽에 울릉도와 독도는 없었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가면 일본 서북쪽에 있는 오키섬만 있었다. 지난번 구입하지 않았던 <대일본연해여지전도>에 빠져 있던 도쿄에서 남쪽으로 1,000킬로미터 떨어진 오가사와라 제도 부분도 메이지대학교에서 본 것처럼 자세하게 표기되어 있었다. 한 장의 낙장도 없는 완벽한 지도였다.

 

백 교수는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표기하지 않은 이 지도가 독도가 우리 영토라는 ‘결정적 단서’이고, 이로써 영유권 분쟁에서 절대적 우위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관판실측일본지도>의 조선 동쪽과 일본 북쪽 부분. 네 모 칸이 울릉도와 독도가 있는 곳이다. 당시 독도가 일본 영토로 인식되고 있었으면 오른쪽의 오키섬처럼 표기가 되어 있어야 한다.

 

 

<관판실측일본지도>의 오키섬 부분.

 

 

당시 한국과 일본은 1995년 유엔 해양법 협약 발효로 인한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을 1996년에 각각 선포한 후 두 나라 사이에 겹치는 구역을 조정하기 위해 협상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은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해 독도가 자신들 고유의 영토라는 것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었고 자민당에서는 이를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다.

 

이런 상황에서 현 일본 정부와 직접적인 연결성을 가진 메이지 정부에서 편찬했고, 제목처럼 이노우 다다타가가 도쿄 남쪽 1,000킬로미터 떨어진 오가사와라제도까지 가서 실측한 <관판실측일본지도>에 일본 본토에서 25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독도가 표기되지 않았다는 것은, 일본이 주장하는 ‘고유 영토론’에 결정적 타격을 줄 수 있는 확실한 증거였다. 일본 정부에서 공개를 꺼리고, 메이지대학교에서도 촬영을 못하게 하는 <관판실측일본지도>는 이제까지 알려진 그 어느 지도보다 그 가치가 높았다. 그러나 아직 기뻐하기는 일렀다.

 

“데츠오 사장님, 완벽합니다. 제가 일전에 메이지대학교에서 본 지도와 완전히 일치합니다.”

 

“백 교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역시 제가 백 교수님께 먼저 연락을 드리기를 잘한 것 같습니다.”

 

데츠오 사장이 잔잔히 미소를 띠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백 교수는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최대한의 예의를 갖춰 물었다.

 

“데츠오 사장님, 이 지도의 가치를 어느 정도로 평가하시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데츠오 사장이 백 교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백 교수님, 아시다시피 이 지도는 일본 최고의 권위가 있는 관찬 지도이고, 다케시마 영유권 문제에 대한 중요한 단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지도가 매물로 나오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데츠오 사장은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그는 고지도 서점 주인들의 모임인 ‘수레바퀴 문고회〔文車ふぐるま)の 会〕’의 창립 멤버 7인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서점에서는 ‘충경당 고지도목록’이라는 소책자를 꾸준하게 발행했고, 이 책은 일본 학자들에게 고지도와 서지의 기초 자료로 활용되었다. 그는 <관판실측일본지도>의 가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고, 이 지도가 그의 서점에 매물로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라 그의 신용과 실력 때문이었다.

 

“백 교수님, 저도 이 지도의 가치에 대해 많이 생각해보았습니다. 고심 끝에 그 가치를 1,000만 엔으로 책정했습니다.”

 

당시 환율로 1억 원이었다. 백 교수가 어느 정도 예상했던 가격이었지만 1억은 큰돈이었다. 백 교수가 미소를 띠고 데츠오 사장을 바라보았다. 데츠오 사장도 백 교수의 미소와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기에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백 교수님, 적당한 가격을 말씀드린 겁니다.”

 

데츠오 사장은 놓치지 말고 구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백 교수를 바라보았다.

 

“데츠오 사장님, 이 지도가 그 정도의 가치가 있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그리고 저에게 먼저 기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저희 한국에는 외환 관리법이 있어서 제가 출국할 때 지참할 수 있는 외화 액수에는 제한이 있습니다. 따라서 한국에서 법적 절차를 거쳐 송금을 받아야 하는데, 얼마나 시간을 주실 수 있으신지요?”

 

데츠오 사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백 교수님,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그러나 저 역시 이런 귀한 물건을 오래 서점에 놔두는 건 무리입니다. 며칠이면 준비가 되시겠는지요?”

 

이번에는 백 교수가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데츠오 사장이 전화를 가리키며 국제전화를 해도 된다고 했다. 백 교수는 고맙다며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그러나 아내도 송금을 해본 적이 없다며 차남인 영진의 친한 친구가 은행에 근무하고 있으니 얼른 알아보고 전화를 주겠다며 충경당 전화번호를 물었다. 그 사이 백 교수는 다시 한 번 <관판실측일본지도>를 살폈다. 오키섬과 대마도 부분을 보며, 이노우 다다타가가 17년간 전국을 다니며 실측했다는 말이 헛말이 아니라는 것과 일본 최고의 관찬 지도라는 명성을 괜히 얻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면 볼수록 감탄이 나왔다. 그때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충경당 거래 은행 이름과 계좌번호를 알려주면 내일 오전에 5,000만 원을 송금하고, 하루 이틀 후에 나머지 5,000만 원을 송금할 수 있다고 했다. 며칠 후 백 교수는 <관판실측일본지도>를 앞에 두고 데츠오 사장과 기념사진을 찍고 바로 하네다공항으로 향했다.

 

 

백충현 교수와 데츠오 사장 이 <관판실측일본지도>를 들 고 찍은 사진.

 

 

보통 때 같았으면 주 일본 한국 대사관에 들러 제자들을 만났겠지만 이날은 서둘러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서 지도의 반출을 막을 법적 근거는 없지만 그래도 한시라도 빨리 <관판실측일본지도>를 한국 땅으로옮기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기내로 가지고 들어갈 수 있는 가방에 지도를 넣고 비행기에 올랐다. 잠시 후 비행기는 굉음을 내며 하네다공항 활주로를 이륙했다. 그는 고개를 등받이 의자에 기댔다. 스르르 눈이 감겼다. 그러나 잠은 오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비행기는 한국 상공으로 접어들었다. 조그만 창문 아래로 한국의 검푸른 바다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언제 봐도 아름답고 푸근한 우리 바다, 우리 영토였다. 백 교수는 자리 위 선반 캐비닛을 바라보았다. <관판실측일본지도>를 가지고 국제법적 논리로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 얼마나 억지인가를 밝히는 논문을 쓸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서울에 온 백 교수는 외무부에 있는 제자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그가 제자들에게 <관판실측일본지도>를 보여주자 모두들 기뻐하며 스승의 노고를 치하했다. 백 교수는 저녁 식사를 하며 내년까지 논문을 완성해서 국제회의에서 발표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제자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현재 한일 간에 진행되고 있는 신한일어업협정과 중간수역의 진행 상황에 대해 설명하면서, 독도 영유권에 대해 당분간 외교적 마찰을 피하자는 일종의 ‘신사협정’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했다. 백 교수는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물론 사적인 자리에서의 대화였지만 일본이 공개를 극도로 꺼려 하는 <관판실측일본지도> 를 내세워 논문을 발표하면 독도 영유권 문제는 다시 한 번 두 나라 사이에 현안으로 부상하면서 협상에 지장을 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백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제자들의 설명을 들었다. 그에게는 개인의 영예보다는 국가의 이익이 먼저였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이제 우리에게 <관판실측일본지도>가 있다는 걸 염두에 두고 좀 더 자신 있게 협상에 임하세요. 우리가 꿇릴 게 없잖아. 논문 발표 시기는 협상 진전을 봐가면서 하기로 하지.”

 

그러나 신한일어업협정이 끝나고 나면 일본은 틀림없이 신사협정을 깨트리고 다시 영유권 주장을 할 것이다. 그때 논문을 발표해 일본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면 될 일이었다.

 

● 신新한일어업협정과 중간수역

(中間水域, intermediate zone)

: 한일 양국은 국회와 의회에서 유엔 해양법 협약을 비준하고

각각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을 선포했지만 두 나라 사이에 영구적인 경계 획정이 쉽지 않았다. 한일 양국은 오랜 협의 끝에 신한일어업협정을 맺었다. 1998년 11월 28일, 서명을 거쳐 1999년 1월 22일부터 공식 발효되었다. 이 협정에서 한일 양국은 연안수역을 배타적 전관수역으로 하고, 그 나머지 가운데 수역을 중간수역으로 설정했다. 중간수역에서는 상대국의 국민과 어선에 대해 자국의 법령을 적용하지 않고, 공동으로 어업 자원을 보존ㆍ관리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이때 체결된 한일 간 신어업협정에서는 ‘독도의 영토적 지위에 아무런영향도 주지 않는다’라고 명시함으로써 독도에 대한 두 나라 사이의 영유권 주장을 피해 갔다.

 

 

신한일어업협정에 따른 중간수역을 표시한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