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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를 바탕으로> - 델핀 드 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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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예고 델핀 드 비강, <실화를 바탕으로>

 내 소설의 최신작이 출간되고 몇 달 후,
나는 글 쓰는 일을 중단했다.

 

 

그로부터 삼 년 남짓, 나는 글을 한 줄도 쓰지 않았다. 과장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한 줄도. 공문서에 대한 회답, 감사 카드, 휴가지에서 보내는 엽서, 하다못해 쇼핑 목록 몇 줄조차 쓰지 않았다. 어떤 모양새든 형식을 갖춰 써야 하는 글이라면 한 줄, 한마디도. 노트와 수첩과 메모지만 봐도 가슴에 통증을 느꼈다.

 

 

점차 글을 쓰는 동작 자체가 겁이 나고 자신 없어졌다. 볼펜을 쥐는 일조차 갈수록 어렵게 느껴졌다. 시간이 더 흐르자 컴퓨터의 워드 문서를 열기만 해도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나는 최대한 편한 자세를 하고, 컴퓨터 모니터의 각도를 보기 좋게 조절한 뒤 책상 밑으로 다리를 뻗었다. 그런 다음 가만히 있었다. 꼼짝도 하지 않고, 몇 시간씩, 화면만 노려보면서.

 

 

시간이 더 흐르자, 자판으로 손만 뻗어도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원고 청탁을 모조리 거절했다. 신문이나 잡지에 실을 짧은 글, 가벼운 터치의 여름 동정, 이런저런 작품의 서문, 그 밖에 집단 창작 참여분까지 예외 없이. 나에게 오는 편지나 메시지에서 쓰다라는 단어만 눈에 띄어도 배 속이 오그라들었다.

 

 

나는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었다.
글쓰기, 그건 이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때 내 주변과 소셜네트워크와 문단에 무성한 소문이 돌았다는 사실을 지금은 나도 알고 있다. 내가 절필할 거라는 말도 있었고, 지독한 슬럼프라는 말도 있었고, 갑자기 타오른 열정은 결국 꺼지게 마련이라는 말도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는 자기를 만나면서부터 내 문학적 정열이 식은 건 아닌지, 혹은 내가 신경성 식욕부진 같은 문제를 겪는 건 아닌지 걱정했고, 그 결과 조만간 내가 결별을 선언할지도 모른다고 상상했다.

 

 

친구와 친척 들, 때때로 기자들도 그 침묵에 관해 묻기 위해 내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그때마다 나는 각각 다른 이유를 댔다. 어떤 때는 피로 탓이라고 했고, 어떤 때는 외국 여행 계획이 있어서라고 했고, 어떤 때는 전작의 성공 때문에 중압감을 느껴서라고 했고, 이도저도 아니면 그냥 글이 좀 안 풀리는 시기라고 했다. 나는 시간이 없다고, 집중력이 떨어졌다고, 마음이 어지럽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오늘, 나는 그것들이 전부 변명이었다는 걸 알고 있다. 나에게 해당되는 사항은 하나도 없었다.

 


아마 내가 가까운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암시한 적도 있었으리라. 내 입으로 두렵다는 말을 흘린 기억은 없지만, 그건 분명히 두려움이었다. 지금은 나도 인정할 수 있다. 글 쓰는 일이, 그토록 줄기차게 나를 사로잡고 변화시켰던 그 일이, 소중했던 그 일이 나를 두렵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진실은 이렇다. 내가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어야 할 시점에, 그러니까 지난 십 년간 거의 생물학적 순환처럼 익숙하게 되풀이된 창작 주기(이른바 모색기, 준비기, 그리고 집필기)에 따르면 빽빽한 메모와 알차게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바야흐로 새 작품에 돌입했어야 할 시점에 나는 L을 만났다. 나를 지독히도 무력하게 만든 유일한 요인이 L이라는 것을 지금은 나도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한 그 두 해가 하마터면 나를 영원히 침묵시킬 뻔했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