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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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변동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 - 정호승

Chapter 7.6회. 시인은 죽어도 시는 영원합니다

이제는 조국이 울어야 할 때다

어제는 조국을 위하여

한 시인이 눈물을 흘렸으므로

이제는 한 시인을 위하여

조국의 마른 잎새들이 울어야 할 때다

 

이제는 조국이 목숨을 버려야 할 때다

어제는 조국을 위하여

한 시인이 목숨을 버렸으므로

이제는 한 젊은 시인을 위하여

조국의 하늘과 바람과 별들이

목숨을 버려야 할 때다

 

죽어서 사는 길을 홀로 걸어간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웠던 사나이

무덤조차 한 점 부끄럼 없는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했던 사나이

 

오늘은 북간도 찬 바람결에 서걱이다가

잠시 마른 풀잎으로 누웠다 일어나느니

저 푸른 겨울하늘 아래

한 송이 무덤으로 피어난 아름다움을 위하여

한 줄기 해란강은 말없이 흐른다

 

_정호승, <윤동주 무덤 앞에서>

 

 

 

1989년 봄, 어느 시사잡지를 뒤적이다가

윤동주(尹東柱)의 무덤 사진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누렇게 시든 겨울 풀들이 흔들리고 있는 황량한 벌판을 배경으로 북간도의 파란 겨울 하늘이 쓸쓸히 무덤을 쓰다듬고 있는 한 장의 사진이었다. 무덤 옆에는 분명히 한자로 ‘시인윤동주지묘(詩人尹 東柱之墓)’라고 쓰여 있었고, 상석 하단에는 용정중학교에서 1988년에 묘비를 세운 것으로 새겨진 글씨가 보였다. 그 사진은 ‘사랑의 전화’ 운동을 펼치는 심철호 선생과 재미 사진작가 에드워드 김이 찍어 국내에 처음으로 공개하는 윤동주 무덤 사진이었다.

 

윤동주 무덤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안 나는 벅차오르는  가슴을 쓰다듬으며 사진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마음속으로 “윤, 동, 주” 하고 가만히 불러보았다. 윤동주 시인이 무덤의 창을 열고 “누구니?” 하고 웃으면서 나를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나는 사진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

아예 오려서 호주머니 속에 넣고 다녔다.

 

시작(詩作) 메모용 작은 수첩 하나를 양복 윗저고리 호주머니 속에 늘 넣고 다녔는데, 사진을 수첩 갈피 속에 끼워 넣고 틈만 나면 꺼내 들여다보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윤동주 시와 같은 시를 쓰는 시인이 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만큼 윤동주 시인에 대한 나의 존경과 그리움은 컸다.

 

그리움이 너무 컸기 때문일까. “언젠가 윤동주 무덤에 꼭 가봐야지” 하고 마음속으로 굳게 결심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그 기회는 빨리 찾아왔다. 나는 당시 조선일보 사 출판국에서 발행하는 《월간조선》 잡지기자 생활을 하 고 있었는데, 마침 회사 측에서 전 사원들에게 해외여행의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그래서 1989년 천안문 사태가 나던 그해, 그러니까 한중수교가 이루어지기 전에 중국 여행팀에 소속돼 뜨거운 여름 햇빛을 등에 지고 북경과 연변을 거쳐 백두산 천지에까지 가게 되었다.

 

윤동주는 키 작은 소나무들이 듬성듬성 자란 솔밭 곁에, 용정 시가지가 한눈에 다 내려다보이는 동산기독교묘지 위에 말없이 누워 있었다. 40여 년 동안 아무도 찾는 이 없었던 공원묘지의 잡초 더미 속에 누워 윤동주는 아무 말이 없었다. 늦여름의 시들한 풀잎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귀뚜라미 소리만 세차게 들려올 뿐이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살다 간 그는

어쩌면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며’

언젠가는 찾아올 조국의 동포들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라던 윤동주는 이제 죽었어도 ‘한 점 부끄럼 없이’ 잡초가 무성한 북간도 용정 땅에 조용히 누워 있었다.

 

윤동주의 무덤은 잔디가 잘 자라지 않아 봉분의 흙이 그대로 드러난 부분이 많았다. 봉분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시멘트로 두껍게 무덤 테를 만들어놓았는데, 묘비 하단 양쪽 꽃병엔 플라스틱 꽃들이 수북이 꽂혀 있었다.

 

나는 윤동주의 무덤 앞에 서서 말을 잃었다. 윤동주의 무덤 사진을 늘 가슴에 품고 다니던 내가 정작 윤동주의 무덤 앞에서는 말문이 막혀 그저 무덤에 돋은 푸른 풀들만 바라보았다. 대리석 제상 위에 조그만 송장메뚜기 한 마리가 한가롭게 뛰어노는 게 보여 그 송장메뚜기가 윤동주의 화신인가 싶기도 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 다. 그는 분명 ‘죽어가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면서’ 무덤 속에서도 ‘잎새에 이는 바람에 괴로워했을’ 것이다.

 

 

나는 윤동주의 무덤 앞에서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떠날 시간이 되어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자 일행 중 누 군가가 “정호승이 니는 아예 여기 살아라” 하고 핀잔을 주었다. 나는 비로소 윤동주의 무덤 앞에서 내가 시를 쓰며 밥을 먹고 사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시인은 죽어서도 사랑받는다. 시인은 죽어서도 시를 쓴다. 시인은 죽어도 시는 영원하다.

 

일본 제국주의의 칼날 앞에 무참히 쓰러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사랑했던 사나이. 한 시대의 통한을 슬프고 도 아름다운 언어로 노래했던 시인 윤동주. 그는 지금 남의 나라 땅 북간도 용정에 묻혀 해란강을 굽어보며 잠들 고 있으나 그를 사랑하는 우리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