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김영사가 기획한 특별한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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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변동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 - 정호승

Chapter 5.4회. 아기 발이 가장 예쁩니다

저에게도 발을 씻을 수 있는

기쁜 시간을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까지 길 없는 길을 허둥지둥 걸어오는 동안

발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습니다

뜨거운 숯불 위를 맨발로 걷기도 하고

절벽의 얼음 위를 허겁지겁 뛰어오기도 한

발의 수고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비로소 따뜻한 물에 발을 담그고 발에게 감사드립니다

굵은 핏줄이 툭 불거진 고단한 발등과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 같은 발바닥을 쓰다듬으며

깊숙이 허리 굽혀 입을 맞춥니다

그동안 다른 사람의 가슴을 짓밟지 않도록 해주셔서

결코 가서는 안되는 길을 혼자 걸어가도

언제나 아버지처럼 함께 걸어가주셔서 감사합니다

싸락눈 아프게 내리던 날

가난한 고향의 집을 나설 때

꽁꽁 언 채로 묵묵히 나를 따라오던 당신을 오늘 기억합니다

서울역에는 아직도 가난의 발들이 밤기차를 타고 내리고

신발 없는 발들이 남대문 밤거리를 서성거리지만

오늘밤 저는 당신을 껴안고 감사히 잠이 듭니다

 

_정호승, <발에 대한 묵상>

 

 

사람의 신체 중에서 가장 예쁘고 아름다운 것을 꼽으라면 단연 아기의 발이다. 첫돌 지난 아기에게 어디 한 군데 어여쁘지 않은 데가 있으랴마는 나는 아기의 발을 가장 예뻐한다. 물론 고사리 새순 같은 아기 손도 예쁘지만 얇은 홑이불 사이로 살며시 삐져나온 아기의 발은 너무나 예쁘고 앙증스러워 나를 어찔하게 만든다. 특히 새끼발가 락을 보면 무슨 맛있는 과자인 양 그대로 앙 하고 깨물고 싶다. 연분홍빛을 살짝 띤 아기의 새끼발톱은 얇고 보드랍 다 못해 투명하기까지 하다. 굳은살이 박이고 뭉그러져서 보기조차 싫은 내 새끼발톱이 처음에는 이렇게 어여쁜 것이었구나 하고 감탄하게 된다.

 

나는 사람의 새끼발가락이 원래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못생긴 줄 알았다. 발톱을 깎을 때마다 뭉툭하게 뭉그러진 새끼발톱만 봐왔기 때문에 갓난아기의 새끼발톱이 그렇게 어여쁜 줄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처음엔 누구의 발이나 아기 발처럼 예쁘지만

살아가면서 발 모양이 점점 보기 싫게 변한다.

 

발의 모양이 곧 삶의 모양이 되는 것이다. 삶이 힘들면 힘들수록 발의 형태 또한 일그러져 그 힘듦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마치 고된 훈 련 과정을 거친 레슬링 선수의 귀가 뭉툭하게 변형된 것처럼 발의 모양 또한 마찬가지다. 발끝에 힘을 주고 서서 춤을 추는 발레리나의 발이 어찌 온전할 수 있겠는가. 스케이트 선수들은 발과 스케이트와의 밀착도를 높이기 위 해 스케이트를 맨발로 신는다고 하니 그 발이 온전할 리가 있겠는가.

 

아기 발은 꼭 나뭇잎 같다. 아니, 나뭇잎에 내린 봄눈 같다. 아니, 나뭇잎에 어리는 초봄의 햇살 같다. 아니, 따스한 봄날 냇가의 작고 맑은 조약돌 같다.

 

 

 

나는 비록 나이가 들었지만 내 발을 아기 발처럼 소중히 여긴다. 많은 이들이 손의 수고는 소중히 여기지만 발의 수고는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손은 발을 씻겨주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지만 발은 그 손을 다른 곳으로 데려다주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손이 가보고 싶은 곳이 있을 때 발이 가주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손의 수고나 발의 수고나 가치는 똑같다.

 

하루 종일 서울 거리를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온 내 발을 깨끗이 씻고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직도 내 발이 포대기 밖으로 살짝 삐져나온 아기의 발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지만 온갖 고생을 다 해온, 발뒤꿈치에 굳은살이 굳게 박인 내 발 또한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