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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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변동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 - 정호승

Chapter 4.3회. 첫눈은 첫사랑과 같습니다

마지막 첫눈을 기다린다

플라타너스 한그루 옷을 벗고 서 있는

커피전문점 흐린 창가에 앉아

모든 기다림을 기다리지 않기로 하고

마지막 첫눈이 오기를 기다린다

 

첫눈은 내리지 않는다

이제 기다린다고 해서 첫눈은 내리지 않는다

내가 첫눈이 되어 내려야 한다

첫눈으로 내려야 할 가난한 사람들이

배고파 걸어가는 저 거리에

내가 첫눈이 되어 펑펑 쏟아져야 한다

 

오늘도 서울역까지 혼자 걸었다

돌아오는 길에 명동성당의 종소리가 들렸다

땅에는 저녁별들이 눈물이 되어 굴러다니고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을 버릴 수 없어

나는 오늘도 그의 제자가 될 수 없었다

 

별들이 첫눈으로 내린다

가장 빛날 때가 가장 침묵할 때이던 별들이

드디어 마지막 첫눈으로 내린다

커피전문점 어두운 창가에 앉아

다시 찾아올 성자를 기다리며

첫눈으로 내리는 흰 별들을 바라본다

 

_정호승, <마지막 첫눈>

 

 

다시 첫눈을 기다린다. 첫눈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기온이 뚝 떨어져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종종 걸음을 치다가도 첫눈을 기다리며 하늘을 바라본다.

 

첫눈은 내가 기다리기 때문에 온다.

 

첫눈 오는 날 만나자는 약속 때문에 온다. 젊은 시절부터 나는 얼마나 첫눈을 기다리며 살아왔던가.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얼마나 가슴 두근거리며 살아왔던가. 이제는 첫눈 오는 날 만나자 고 약속한 사람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더러는 연락조차 두절돼 만날 수가 없지만, 겨울이 오면 그날의 그리운 얼굴들이 하나둘 다시 떠오른다.

 

사람들은 왜 첫눈 오는 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하는 것일까. 그것은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첫눈을 통해 말없이 나누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닐까. 아마 그럴 것이다. 사랑하고 있다는 믿음의 언어를 저 순백한 천상의 언어로 대신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첫눈은 첫사랑과 같다.

 

내가 아직도 첫눈 오기를 기다리는 까닭은 첫사랑이 다시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 인지도 모른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이 첫눈 오는 날 만날 사람이 점점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첫눈 오는 날 아직도 만날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인가.

 

첫눈은 공평하다. 불공정하지 않고 편애하지 않는다. 똑같이 축복을 내린다. 첫눈은 하늘이 내리는 축복의 평등한 손길이다. 첫눈은 죽은 자의 무덤 위에도 산 자의 아파트 위에도 내린다. 고속도로에도 굽은 산길에도 내린다. 선암사 해우소 위에도, 송광사 산수유나무의 붉은 열매 위에도, 명동성당의 뾰족한 종탑 위에도 내린다. 대기업 총수의 어깨 위에도, 가난한 아버지의 등허리 위에도 내린다.

 

첫눈은 어느 한 곳 어느 한 사람에게 치우치지 않고 분배의 법칙을 지킨다. 아무리 불평등하기를 원해도 반드시 평등의 질서를 지킨다. 인간의 삶이 종국에 가서는 결국 공평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지금은 내 삶이 남보다 못한 것 같고 때론 우월한 것 같지만 첫눈이 내리면 다 마찬가지다. 그것은 마치 죽음이 삶의 가치를 공평하게 만들어버리는 것과 같다.

 

첫눈은 이 공평성을 바탕으로

갈등과 균열을 봉합해준다.

 

한마디 말도 없이 모든 싸움과 분노와 상처를 한순간 에 고요히 잠재워버린다. 인간의 모든 죄악을 순결과 침묵의 힘으로 덮어버린다.

 

첫눈은 바로 인간을 거듭나게 하는 용서의 손길이다. 눈 내리는 눈길을 걸어가는 인간의 뒷모습을 보라. 그 눈길 위에 찍히는 인간의 발자국을 보라. 그 얼마나 겸손하고 경건하고 아름다운가. 첫눈 내리는 길을 걸으며 마음속 에 미움과 증오가 들끓고 사리사욕의 탐욕이 가득한 이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