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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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변동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 - 정호승

Chapter 3.2회. 산산조각으로도 살아갈 수 있지요

룸비니에서 사온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마룻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목은 목대로 발가락은 발가락대로

산산조각이 나

얼른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고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순간접착제를 꺼내 붙였다

그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주시면서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지

 

_정호승, <산산조각>

 

 

2000년 새해가 막 지났을 때였다. 가까운 벗들이 북인도 쪽으로 불교 4대 성지순례 여행을 떠난다는 소식을 전 해왔다.

 

서울에서 북인도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지만 부처님 이 처음 깨달음을 얻으신 곳 부다가야, 깨달음을 얻고 나 서 처음으로 설법을 하신 곳 사르나트(녹야원), 그리고 열반하신 곳 쿠시나가르, 태어나신 곳 룸비니를 차례대로 순례하게 되었다.

 

나는 급히 시간을 쪼개 아무 준비 없이 떠나오는 바람에 룸비니 사진도 한 장 찾아보지 못했다. 부처님이 태어나신 곳이니까 당연히 웅대하고 장대한 건축물이 있으리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룸비니는 인도와 네팔 국경을 넘어 한나절을 가야 하는 곳에 있었다. 하룻밤 먼저 인근 여관에서 잠을 자고 난 뒤 찾아간 룸비니는 황량한 들판 한가운데에 있었다. 우리나라 초등학교 운동장만 한 면적에 작고 초라해 보이는 마야데비 사원이 철조망으로 쭉 둘러쳐져 있었고 별다른 건축물이 눈에 띄지 않았다.

 

‘부처님이 태어나신 곳인데, 이렇게 초라할 수가!’

 

부처님의 위용을 드러낼 수 있는 웅대한 건축물을 기대했던 나는 실망감이 앞섰다.

 

철조망이 쳐진 정문 앞에는 노파 한 분이 가마니를 깔고 흙으로 만든, 앉아 계신, 내 손바닥만 한 부처님을 순례 기념품으로 팔고 있었다.

 

나는 그 부처님을 하나 사서 집으로 돌아와 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마음이 산란할 때 그 부처님을 바라보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편안해졌다. 그러나 그것도 차츰 시간이 지나자 그렇지 않았다. 집에 있으나 밖에 있으나 그 부 처님을 생각하면 할수록 자꾸 걱정이 되었다. 그것은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자칫 잘못해서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었다.

 

그런 걱정을 하지 않으려고 해도 하면 할수록 자꾸 그런 걱정이 들었다. 부처님께서 멀쩡히 제자리에 잘 앉아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런 걱정을 자꾸 한다는 것은 내가 내일을 걱정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내 삶이 또 산산조각이 나면 어떡하나.

 

 

한번 시작된 걱정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 돌아가신 법정(法頂)스님께서는 당신의 산문집에서 “오지 않은 미래를 오늘에 가불해 와서 걱정하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내가 꼭 그런 사람이었다.

 

불가에서는 “내일은 없다, 미래는 없다”고 한다. 그래서 “내일은 바로 오늘에 있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이 순간을 열심히 살아라”고 한다.

 

불가의 이 가르침을 법정스님께서는 당신의 산문집 곳곳에서 누누이 강조하셨지만 나는 오늘에 살지 못하고 내 일을 걱정하느라 늘 안절부절못했다.

 

그러자 어느 날, 내 시적 상상력 속에 존재하시는 부처님께서 나를 불렀다.

 

호승이 너, 이리 좀 와봐라!

 

나는 겁이 나 엉금엉금 무릎걸음으로 부처님 앞에 다가가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내 머리를 한 대 탁 치시면서 “이, 바보 같은 놈아.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은 것이고,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가면 되지, 무슨 걱정이 그렇게 많노?”하고 내 머리를 한 대 더 때리시면서 크게 야단을 치셨다.

 

순간, 부처님의 그 귀한 말씀이 불화살처럼 내 가슴에 날아와 박혀 <산산조각>이라는 시를 써보았다.

 

나는 스물세 살에 한국시단에 등단해서 지금까지 13권의 신작시집을 출간했다. 그러니까 그동안 약 1천 편 정도 의 시를 쓰고 발표했다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 내 인생에 큰 힘과 용기를 주는, 내 인생을 위로하고 위안해주는 단 한 편의 시를 꼽으라면 바로 이 시 <산산조각>을 손꼽을 수 있다. 내가 쓴 시 중에서 내가 늘 가슴에 품고 다니는 단 한 편의 시가 있다면 바로 이 <산산조각>이다.

 

지금도 나는 하루하루의 삶에서 견디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운 일에 부닥치면 “오늘도 산산조각을 얻었다고 생 각하고, 오늘도 산산조각으로 살아가면 되지 뭐!”하고 생각한다. 그러면 놀랍게도 나를 그토록 힘들게 하던 고통이 다소 가라앉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물론 완전히 가라앉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다소 가라앉는다. 전부가 아니라 할지라도 다소 덜 고통스러워지는 것, 그게 어디인가.